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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판, 40대가 흔들고 있다

제작에서 소비까지 ‘흥행의 핵’으로 떠올라…내용도 복고·에로티시즘·직장인 애환 등 중년층 타깃

이형석│헤럴드경제 기자 ㅣ 승인 2012.07.10(Tue) 00: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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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들>(왼쪽 위), <건축학개론>(왼쪽 아래), <후궁: 제왕의 첩>(오른쪽).

영화 <5백만불의 사나이>로 스크린에 데뷔한 가수 출신 박진영(41)은 자신이 속한 세대에 대해 “우리들이 문화적 힘을 갖는 이유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경계에서 태어난 집단이기 때문이다. 음악으로 말하자면 악기도 다룰 줄 알면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에도 능하고, 영화로 치자면 필름으로 찍다가 고화질 디지털카메라에 곧바로 적응한 연령층이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가장 풍부한 플랑크톤을 먹고 자란 세대이다”라고도 덧붙였다. 연예기획제작사 JYP엔터테인먼트는 박진영을 포함해 경영 일선의 정욱 대표와 표종록 부사장 등 세 명이 모두 1971년생 동갑내기이다. <5백만불의 사나이>를 제작한 하리마오픽쳐스의 대표이자 영화 <7급 공무원>과 드라마 <추노>에 이어 이번 작품까지 시나리오를 집필한 작가 천성일 역시 1971년생이다.

이것은 국내 대중문화, 특히 영화계에서 40세 전후의 연령층이 제작에서 소비까지 유행을 주도하는 ‘흥행의 핵’으로 떠올랐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40대가 연출·제작하고, 40대 배우가 출연하고, 40대 정서를 담은 콘텐츠를 40대 전·후반의 관객층이 소비하는 것이 요즘 트렌드이다. 이들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태어났고 대부분 199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세대이다. 20대에는 ‘신세대’ ‘X세대’라는 이름으로 등장했고, 최근에는 ‘건축학개론 세대’로 불린다. 신드롬에 가까운 복고 열풍을 일으켰던 영화 <건축학개론>의 주인공은 설정상 96학번이지만 작품이 담은 전반적인 정서는 1990년대 초반에 더 가깝다. 실제 이용주 감독은 1970년생에 90학번(연세대 건축학과)이며 <건축학개론>의 제작사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에 따르면 시나리오 작업 단계에서 주인공이 92학번으로 설정되었다가 조금 더 젊은 연령층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극 속의 정서와 이야기 얼개는 그대로이다. 

40대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의 릴레이 성공

최근 한국 영화의 트렌드는 40대의 위력을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다. 상반기 흥행의 흐름은 크게 두 축이었다. 1990년대 전후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거나 40대를 주인공으로 한 복고풍의 영화와 파격적인 성적 묘사를 담은 청소년 관람 불가, 이른바 ‘19금 성인 영화’의 유행이다. 상반기에 개봉한 한국 영화 중 최고 흥행 기록을 달성한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1990년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노태우 정부 시절이 배경이었다. 황정민과 엄정화가 극 중에서도 실명 그대로 출연한 <댄싱퀸>은 아예 남녀 주인공이 91학번으로 설정되었다. 민주화 시위가 서울 거리를 달구었던 1990년대 초반의 풍경을 지나 현재 시점으로 카메라가 이동한다. 그리고 1990년대 대학가의 첫사랑 풍경을 그린 <건축학개론>이 뜻밖의 ‘잭팟’을 터뜨렸다. 외화를 포함한 상반기 흥행 순위 5위권에 절반이 넘는 이들 세 편의 작품이 모두 들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기대만큼의 흥행은 일구지 못했지만 <코리아>는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전 남북 단일팀 우승이 소재였다. 이 영화의 제작자 이수남 더타워픽쳐스 대표는 1970년생이다. 

노출과 성적 행위의 묘사 수위가 높은 성인 영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정의 달’인 5월을 전후해 개봉 편수도 늘어나고 관객 점유율도 올라갔다. 4~6월에는 <간기남> <은교> <돈의 맛> <후궁: 제왕의 첩> 등 19금 영화가 개봉해 한국 영화 중 무려 39.8%의 관객 점유율(영화관 입장권 통합 전산망 집계)을 차지했다. 지난해 한국 영화 중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 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24.6%에 불과했다.

각각 복고와 19금 영화를 대표하는 <건축학개론>과 <후궁: 제왕의 첩>의 연령별 객석 점유율은 40대를 전후한 관객층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준다. CJ CGV의 집계에 따르면 <건축학개론>의 관객 중 35~49세의 연령층은 남성 전체의 32%, 여성 전체의 29%에 이르렀다. <후궁: 제왕의 첩>의 관객 중 35~49세 연령층 점유율은 38%(남)와 37%(여)를 기록했다. CGV의 홍보팀 김대희씨는 “40세 전후 남녀 관객층의 정서와 라이프스타일은 최근 영화·극장업계에서도 가장 주목하고 분석하는 대상이다”라고 말했다.

복고와 에로티시즘에 이어 40대 전후의 정서를 테마로 한 콘텐츠는 직장인의 애환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이어지고 있다. 씁쓸하지만 진솔한 중년 샐러리맨의 자화상이 한국 영화에 잇따라 담겼다. 지난 6월21일 개봉한 송새벽·성동일 주연의 <아부의 왕>은 회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고지식한 직장인이 ‘아부의 정석’을 배워 최고의 보험 영업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코미디이다. 극은 허술하지만 “아침에 나올 때 거울을 보고 자존심은 냉장고에 넣어둬라”라든가 “아부란 상대의 허영심에 날아가 꽂히는 열추적 미사일 같은 거야” “‘나는 준다’의 미래형이 뭐라고 생각하니? ‘나는 받을 것이다’야” 같은 직장인 공감 백배의 대사를 쏟아냈다.

윤제문 주연의 <나는 공무원이다>(7월12일 개봉)는 매력적인 아이디어와 재치 있는 유머로 벌써부터 입소문이 나고 있는 작품으로, 마포구청 생활공해과에 근무하는 38세의 7급 공무원이 주인공이다. 직장인의 ‘로망’인 이른바 ‘철밥통’이다. 주인공은 매일 민원과 신고 전화, 서류 작업에 시달리면서도 남들은 변화 없는 삶이라고 하지만, 연봉 10억원의 대기업 임원이 부럽지 않고, 상식 쌓기가 취미이며, 밤마다 만나는 (강)호동이형, (유)재석이형이 식구 같은, 더 없이 만족스러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정년이 보장되고 정시 출퇴근이 이루어지는 공무원의 삶이야말로 연봉 10억원의 대기업 임원이 부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는 ‘흥분하면 지는 것이다’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는데, 인디밴드와 만나면서 스스로 세운 금기를 어기고 삶의 짜릿한 흥분을 만나게 된다. 이들 작품은 중년 샐러리맨의 삶을 모욕과 근성, 철밥통 사이에서 벌이는 생존의 몸부림으로 그려낸다.

   

방송·가요 등에서도 40대가 ‘주연’으로 맹활약

콘텐츠뿐 아니라 창작의 최전선에 선 40대 초반 감독과 배우의 파워는 한국 영화 사상 전무후무하다. 무엇보다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큰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스타 감독이 바로 1960년대 말~70년대 초반 출생자들이다. 올해 한국 영화 최대 화제작으로 꼽히는 총 제작비 1백40억원 규모의 <도둑들>

(7월25일 개봉)의 감독은 최동훈, 1971년생이다. 4백50억원의 초대형 한·미 합작 영화 <설국열차>를 촬영 중인 봉준호 감독은 이 세대의 선두로 1969년생이다. 독일을 무대로 한 남북 첩보전을 그린 100억원 규모의 영화 <베를린>

의 감독 류승완은 1973년생이고, <미스터 고>라는 3D 영화를 촬영 중인 김용화 감독은 1971년생이다. 모두 하반기 혹은 내년 상반기에 개봉될 예정이다. 이들이 각광받는 이유는 박진영이 지적한 바와 같다. 할리우드 영화의 세례 속에서 자라났고, 저화질의 비디오 복사 테이프 시대를 지나 디지털 세대를 열면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활용에 모두 능한 세대이다. 자유화와 민주화의 세례를 받았으며 사회를 보는 비판적이고 균형적인 시각과 영화의 오락적·상업적 가치에도 밝은 세대이다.

스타 배우도 빼놓을 수 없다. 오는 9월 개봉될 예정인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이병헌은 물론, 차승원·황정민·류승룡·정재영·고창석·유해진·박희순·김상호·박원상 등과 <도둑들>의 김혜수와 <미쓰 GO>의 고현정이 1970~71년생의 대표 주자이다.

요즘 40세 초반의 주인공을 내세워 한국 남성판 <섹스 앤 더 시티>로 꼽히는 SBS 드라마 <신사의 품격>이 장안의 화제이다. 이보다 더 단적으로 최근 유행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지금 영화·방송·가요를 망라한 대한민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40대야말로 가장 ‘핫’한 이름이자, 주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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