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산 제단에서 ‘조선’을 바라보다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2.08.1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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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시문 / 오언율시·칠언절구시 각 1수씩 남겨…반역의 의중은 일절 담겨 있지 않아

태종의 시를 지은 장소인 강화도 마니산(마리산) 제단. ⓒ 연합뉴스

태종 이방원은 고려 말 정몽주 일파를 축출하고 새 왕조를 일으키는 데 지대한 공을 쌓았다. 태조 7년(1398년) 가을, 무인난(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은 밤에 박포를 보내 조준을 부르고 스스로 길에 나와서 맞았다. 조준은 백관을 거느리고 전(箋)을 올려 적장자를 세자로 삼을 것을 청했다. 이로써 9월에 정종이 내선(선양)을 받았다. 그런데 정종 2년(1400년) 정월에 이방원의 넷째 형 방간이 박포와 공모해 정안군 이방원과 추종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이방원은 이를 평정하고 세제에 책봉되었다.

역대 국왕의 시문을 모은 <열성어제>에는 태종이 중국의 명나라 영락제나 명나라 사신들에게 건넨 시가 여럿 실려 있다. 영락제에게 건넨 시는 명나라 말 청나라 초의 문인 전겸익(錢謙益)이 엮은 <열조시집(列朝詩集)>에도 들어 있다. 중국 사신에게 건넨 시들은 16세기 조선 문인인 유희령이 편찬한 <대동시림(大東詩林)>에도 들어 있다. 그러나 태종이 영락제나 중국 사신에게 주었다는 시들은 과연 그의 자작인지 미심쩍다.

<대동시림>과 <열성어제>에 실려

태종이 지었다는 시로서 <대동시림>에도 실리고 <열성어제>에도 실린 시 가운데, 마리산의 제단에서 지은 시가 있다. 이 시는 태종이 고려 공양왕 때 우대언의 직함으로 있으면서 지은 것으로, 뒷날 조선 세조나 성종 때 어세겸(魚世謙, 1430~1500년)이 화운하기도 했다. 제목은 <마리산제단(摩尼山祭壇)>이며, 오언율시 1수와 칠언절구시 1수, 모두 두 수이다.

첫째
땅 외지고 사람 드문 곳
마음을 맑히며 밤낮으로 재계한다.
노란 국화는 우물가에 피었고
백로절 이슬은 계단이기에 촉촉하다.
군왕 위해 헌수하길 얼마나 간절히 하는가.
명성(샛별)도 응당 안배하리라.
사계절이 제 절기를 제대로 지키니
성스러운 은덕을 사모할진저.  

地僻人稀處(지벽인희처)
淸心日夜齋(청심일야재)
黃花臨井水(황화임정수)
白露浸階苔(백로침계태)
獻壽祈何切(헌수기하절)
明星應自排(명성응자배)
春秋期不失(춘추기불실)
聖德亦懷哉(성덕역회재)

둘째
외람되이 왕명을 입어 이 궁에 이르니
시야에 가득한 가을 산이 붉은 비단이로군.
소나무 빗긴 창가에 고요히 앉았노라니
둥두렷이 달빛이 참성단 동쪽에 올라오네.

侍王命到玆宮(닐시왕명도자궁)
滿眼秋山錦?紅(만안추산금수홍)
斂坐松窓無一事(렴좌송창무일사)
溶溶月色塹城東(용용월색참성동)

태종이 마리산 제단에서 지은 시에는 반역의 뜻이 일절 없다. 군주에 대한 충성의 뜻이 짙다. 새벽의 명성을 바라보면서 속마음에 품었을 별도의 생각은 시어로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이때 태종은 참성단 동쪽에 둥두렷한 달을 바라보면서 원대한 뜻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 3대 왕인 태종 이방원과 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들이 군신과 붕우의 관계를 집에서의 부자·형제의 관계와 같이 충신성각으로써 할 것을 다짐한 군신회맹문.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훗날 어세겸이 칠언절구에 대해 ‘갱재’

1389년 11월 이성계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왕으로 세웠다. 12월에는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이색 부자를 파면하는 한편, 관제를 개혁했다. 1390년 정월 조민수와 권근을 유배 가게 만들었다. 이 숨 가쁜 시기, 아마도 공양왕 2년(1390년)경 이방원은 왕명을 받아 마리산에 오른 기회에, 혁명의 일정을 모두 구상했을 것이다. 1391년 정월 이성계는 삼군도총제사에 올랐다. 1392년 4월 이방원은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했다. 7월17일 이성계는 배극겸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고, 공양왕을 원주로 귀양 보냈다. 이듬해인 1393년 2월15일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으로 고치고 4월에는 공양왕 등 왕씨 일족을 모두 살해했다.

어세겸은 태종이 마리산 제산에서 지은 두 시 가운데 칠언절구에 대해 갱재(?載)했다. 갱재란, 국왕의 시를 보고 그 운자를 사용해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차운이나 화운과 같되 대상이 국왕이기 때문에 특별히 달리 부르는 것이다. 아마도 세조 때나 성종 때에 마리산 제단에 봉심하러 갔다가 그곳의 벽이나 바위에 새겨져 있는 태종의 시를 보고 지은 듯하다.

잠룡께서 지난날 법궁에 내려오시자
하룻밤 별자리는 온통
자색 기운이 붉었으리라
억만년 왕국의 큰 계책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니
희화씨 모는 수레(태양)가
하늘 동쪽에 오르는 것을 함께 보노라. 

潛龍昔日下琳宮(잠룡석일하임궁)
一夜星?紫氣紅(일야성전자기홍)
億載鴻圖從此始(억재홍도종차시)
共看羲御上天東(공간희어상천동)

어세겸은 동료와 함께 마리산 제단에서 아침 해를 바라보며, 지난날 태종이 잠룡으로 있었던 때 이미 조선의 왕업을 세운 것을 감격스레 회고했다.

태종은 신의왕후 한씨 소생으로 함흥부 후주에서 태어났다. 1400년 11월 정종으로부터 선양을 받고 다음 해 명나라 건문제로부터 고명을 받았다. 재위 5년(1405년)에는 개경에서 다시 한양으로 천도했다. 재위 18년(1418년) 6월에는 세자 제(?)가 패덕하다 해 폐한 뒤 양녕대군으로 삼고 충녕대군이 총명하고 효성스러우며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해 그를 세자로 책봉했다. 그해 8월에 선위했다. 세종 4년 1422년 5월(병인) 56세로 서거했으니 왕으로 지낸 기간은 19년이었다.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려 말 민심이 귀속할 곳을 살펴 새 왕조의 장구한 기초를 열었던 것은 바로 그였다. 그래서인지 시호는 성덕신공문무광효(聖德神功文武光孝)이다. 시호만 보면 덕이 높고 공이 많으며 학문이나 무예가 모두 출중해서 국가를 빛내고 효성이 극진했던 왕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태종은 국가의 장래를 관료제와 문치에 두어 관료와 문임을 우대하는 적절한 방법을 고전에서 찾아서 시행했다. 문치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금속활자를 이용해서 책을 인쇄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것도 그가 처음이다.

조선의 건국은 성공한 혁명으로서 평가되고, 태종의 공적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정치에 견주어졌다. 세종 때 정인지 등이 편찬한 <용비어천가>는 태종의 일화를 반복해서 당 태종의 일화와 비교했다. 하지만 그로써 정인지 등은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태종의 살육 행위를 환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 문제를 거론할 수 없었다. 어세겸의 갱운을 보면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조선 숙종 때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당 태종이 정관(貞觀)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해서 형제들을 살육하고 천자의 자리를 강탈한 사실을 엄폐할 수는 없다고 논하였다. 이것은 당 태종에 대한 종래의 평가를 뒤집은 언설일 뿐 아니라 조선 태종의 공적을 재평가하도록 촉구하는 위험한 논리였다.  

참고: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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