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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에 쏠렸던 관객 마음 ‘오락’으로 훔치는 시대

1천만 관객 작품 <도둑들>이 보여준 한국 영화의 새로운 흥행 경향

이형석│헤럴드경제 기자 ㅣ 승인 2012.08.19(Sun) 14:2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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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13일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1층 광장에서 영화 <도둑들>의 ‘1000만 카운트다운 특별 이벤트’가 열렸다. ⓒ 시사저널 최준필

“이번 영화의 흥행은 정말 새롭다. 누구도 이렇게까지 잘될 줄 몰랐다. 사회적인 메시지가 있는 작품이 아니라 그냥 오락적인 가치에만 집중한, ‘펀(fun)’한 영화가 천만까지 간 것은 처음이다.” 영화 <도둑들>의 영화 홍보마케팅회사 퍼스트룩의 이은정 대표의 말이다.

제작사 케이퍼필름의 안수현 대표는 “처음에는 <도둑들>이 1천만명까지 동원할 작품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제까지 관객 1천만 흥행작을 보면, 개봉 후반부에는 반드시 사회적인 이슈가 있었고 신드롬이 불어 새로운 동력이 되었다. 이번 작품은 예외적이다”라고 분석했다. <도둑들>의 투자배급사인 쇼박스의 마케팅 관계자는 “최근 한국 영화에서는 ‘캐릭터 무비’의 강세가 계속되고 있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최익현(최민식 분), <건축학개론>의 납뜩이(조정석 분),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성기(류승룡 분)를 포함해 이번 영화까지 개성이 뚜렷하고 완성도가 높은 인물이 대중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최동훈 감독은 “한국 영화나 문학에서는 리얼리즘의 전통이 너무 강하다. 전작인 <전우치>나 <도둑들>은 모두 순수하게 영화적 재미만을 추구한 영화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영화 <도둑들>이 지난 7월25일 개봉해 22일 만인 15일 관객 1천만명을 돌파했다. 한국 영화로는 역대 6번째, 외화를 포함한 국내 개봉작 중에서는 사상 7번째 대기록이다. <아바타>(2010년, 1천3백60만명)와 <괴물>(2006, 1천3백2만), <왕의 남자>(2005, 1천2백30만), <태극기 휘날리며>(2004, 1천1백74만), <해운대>(2009, 1천1백45만), <실미도>(2003, 1천1백8만)에 이어 ‘천만 클럽’에 가입한 <도둑들>은 흥행 속도도 폭발적이다. <괴물>의 역대 최단기간 1천만 관객 돌파 기록(21일)보다 딱 하루 늦었고, <아바타>의 38일보다는 무려 16일이나 앞섰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영화, 전형적인 흥행 공식 뒤집어

   
‘1000만 카운트다운 특별 이벤트’에서 한 남자 팬과 포옹하는 배우 김혜수씨. ⓒ 시사저널 최준필
이처럼 기록적인 흥행 행진을 하고 있는 <도둑들>은 한국 영화의 전형적인 흥행 공식을 뒤집으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과거 오락성과 상업성에 집중한 장르 영화는 최대 몇백만 명은 들 수 있어도 천만명까지 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그만큼 이제까지 천만 관객 영화는 예외없이 사회적인 이슈나 역사적인 맥락과 접점을 가지고 있었고 흥행의 발화점 구실을 했다. <괴물>은 주한 미군의 한강 독극물 방류를 소재로 했고,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는 분단이 낳은 비극을 그렸다. <왕의 남자>는 조선 연산군 이야기에 뿌리를 대고 있었고, <해운대>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출몰하는 이상 기후 현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들 흥행작은 공통적으로 연예 영화 정보 프로그램에 앞서 ‘9시 뉴스’나 시사 다큐멘터리, 일간지의 사회 섹션을 통해 소개되곤 했다. <실미도>는 북파 공작원의 진실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고 <태극기 휘날리며>의 개봉 무렵에 한국전쟁 희생자 유골 발굴이 주요 시사 보도 프로그램의 의제에 오른 것이 대표적이다. 이에 비하면 <도둑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영화였던 셈이다.

최근 대작 한국 영화의 성패는 달라진 흥행 지형도를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비극적인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마이웨이>는 장동건과 오다기리 죠라는 한국과 일본의 걸출한 톱스타를 캐스팅하고 3백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제작비를 들여 완성도 높은 영상을 만들어냈음에도 흥행에 실패했다. 1990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의 남북 단일팀 우승을 다루며 다시 한번 분단의 상처를 어루만진 <코리아>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반면 8월 들어 개봉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도둑들>의 흥행 바통을 이어받아 개봉 8일 만인 지난 8월15일 관객 2백만명을 돌파하며 흥행 1위에 나섰다. 이 영화는 조선조 서빙고의 얼음을 터는 도둑 이야기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흥행은 광복절에 개봉한 정지훈(비) 주연의 <알투비: 리턴 투 베이스>가 4~5위권으로 출발부터 성적이 저조했던 것과 대조된다. <알투비>는 공군 전투비행단 파일럿을 주인공으로 한 비행 액션영화로 서울 상공에 나타난 북한 전투기의 ‘도발’을 막는 과정을 그렸다. 스타 캐스팅, 화려한 비주얼, 분단 소재 등 과거 흥행작의 ‘공식’을 따르고 있으나 결과는 기대를 저버렸다.

<도둑들>이 한국 영화의 ‘계몽주의’와 ‘엄숙주의’ 시대가 완전히 종언을 고했음을 확증하는 작품이라는 데 평론가들도 일치된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이는 가요계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일으킨 신드롬과도 맥락이 닿는 현상이다. 대중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영화나 가요 생산자도 평단에서 좋아할 만한 ‘사회적 주제’를 더 이상 양념처럼 끼워넣지 않는다. <도둑들>의 대규모 흥행은 대중이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메시지나 사회적 교훈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재미’나 ‘오락적 가치’의 소비를 더 우위에 놓고 있다는 방증이다”라고 말했다.

<도둑들>은 이른바 ‘하이스트 필름’이나 ‘케이퍼 무비’로 불리는 할리우드의 전통적인 장르에 뿌리를 대고 있는 작품이다. 이는 떼도둑이나 일군의 사기꾼이 모여 거액의 돈이나 물건을 훔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장르로, <스팅>이나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여기에 최동훈 감독은 독창적이고 한국적인 이야기를 덧입혔다. 최고수의 도둑이 모여 마카오 카지노에 숨겨져 있는 다이아몬드를 훔친 뒤 경찰의 추적 속에서도 서로 속고 속이며 빼앗고 뺏긴다는 장르의 공식을 지키면서도 남녀 도둑 간의 로맨스와 신파적 정서를 불어넣었다. 물론 김윤석, 김혜수, 전지현, 이정재, 김해숙, 오달수, 김수현 등 20대에서 50대까지 각 연령을 대표하는 ‘슈퍼스타급’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한 것도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40대 이후 세대도 ‘재미’에 맛들린 것으로 보여져

<도둑들>은 사회·역사적 이슈는 물론이거니와 우정이나 사랑, 가족애, 인간 승리 같은 주제 의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액션과 유머, 배우의 연기,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배신하며 이루어내는 플롯(서사 구조)의 묘미라는 영화적인 쾌감에 집중한 영화이다. <도둑들>에서 40~50대가 개봉 초반부터 일찌감치 관람 열풍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건축학개론>이나 <내 아내의 모든 것> 등에서 보듯 40대 이후의 연령대가 극장가 흥행 주도층으로 등장한 최근 흐름을 반영했다.

이 영화의 홍보·마케팅 역시 과거 천만 관객 영화의 공식을 뒤집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쇼박스의 마케팅 관계자는 “<도둑들>은 총 제작비가 1백60억원에 이르러 한국 영화 최고 수준의 규모를 자랑하지만 광고나 홍보에서 ‘대작’임을 강조하지 않았다. 과거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작품과는 차별을 두려는 의도였다”라고 밝혔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다시 끌어오자면 그 핵심적인 정서는 ‘유희’이다.

<도둑들>의 키워드는 영화의 ‘오락적 가치’이다. 이는 집회도 놀이로 생각하고, 정치적인 의사 표현을 ‘유희의 일종’으로 경험하는 새로운 세대의 자유분방한 감성에 기반하고 있다. 기성세대조차도 지난 시대로부터 강요받았던 ‘엄숙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유행에 동참하며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다. <도둑들>과 <강남스타일>은 한국 대중문화의 새로운 준거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펀(fun)’, 즉 ‘재미’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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