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보다 식량” 약발 먹힐까
  •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 승인 2012.08.19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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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경제 개혁·개방 추진 배경과 현황 / 북·중 경협 따른 대중국 의존 심화 우려도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부인 리설주와 함께 평양의 능라인민유원지 준공식에 참석했다고, 지난 7월26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 AP 연합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직후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은 공개 활동의 대부분을 군 부대 시찰에 할애하는 등 아버지 김정일의 선군정치 노선을 그대로 계승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김정은은 경제 분야에서 김정일 시대에는 보기 어려웠던 실용주의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김정일이 사망한 후 4일밖에 지나지 않은 2011년 12월21일 북한은 ‘국상(國喪)’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7개의 외국인 투자 관련 법령을 정비했다. 그리고 김정일의 사망으로 인해 생산 활동에 큰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민들에게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꾸어 강성 국가 건설에서 비약을 일으킬 것”을 강조하는 등 김정은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 애도에만 집착했던 김정일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올해 1월16일에는 양형섭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AP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정은 위원장이 지식 기반 경제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중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의 경제 개혁 사례를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정일 시대에는 금기시되었던 ‘경제 개혁’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김정은이 경제 분야에서 실용주의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의 장기간 해외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88년부터 2001년까지 북한에 체류하면서 ‘김정일의 요리사’로서 김정은 위원장과 여러 차례 만날 수 있었던 후지모토 겐지 씨는 그의 저서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에서 2000년 8월에 있었던 김정은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소개하고 있다.

“후지모토, 위(김정일)에서 들은 이야기이지만, 지금 중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성공하고 있는 것 같아. 공업이나 상업, 호텔, 농업 등 모든 것이 잘나가고 있다고 위에서 얘기하더군. … 우리나라 인구는 2천3백만명인데, 중국은 13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를 가졌는데도 통제가 잘되고 있다는 게 대단한 것 같아. 전력 보급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13억명의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는 농업의 힘도 대단하고, 식량 수출도 성공적이라고 하더군.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가 본보기로 삼지 않으면 안 되겠지?”

2000년 8월은 김정일이 17년 만에 중국을 다시 방문해 장쩌민(江澤民)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정상회담을 개최한 지 3개월 지난 시점이다. 당시 김정은은 김정일로부터 중국의 발전된 모습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리고 김정은은 그날 저녁 11시경부터 다음 날 오전 4시경까지 후지모토 겐지와 북한의 현실 및 장래에 대한 불안감 등에 대해 무려 다섯 시간이나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런 김정은에게서 일본인 요리사는 ‘그가 북한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중국의 방식을 본보기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 같았다’고 적고 있다.

김정은은 후지모토 겐지에게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비해 공업기술이 한참 뒤떨어져. 우리나라에서 내세울 것이라곤 지하자원인 우라늄 광석 정도일 거야. 초대소에서도 자주 정전이 되고 전력 부족이 심각해 보여”라고도 말했다. 이처럼 김정은이 북한 경제의 낙후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은 어린 시기에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유럽 및 일본에도 여행을 함으로써 북한과 외부 세계를 비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은 김정일 사망 이전까지만 해도 주로 김정일의 현지 지도를 준비하고 엘리트 인사에 관여하며 군부 장악에 집중함으로써 일반 주민들의 경제 생활 실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김정일 사후 현지 지도를 실시하면서 북한 경제의 실상을 직접 목도하고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파격적 현지 지도, 주민들의 기대감 높여”

능라인민유원지 준공식에 참석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놀이기구를 타고 있다. ⓒ 연합뉴스

함경남도 주민 곽 아무개씨는 최근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대담에서 “과거 김정일의 현지 지도는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각본대로 완벽하게 준비된 것들만 둘러보는 형태였는 데 반해, 김정은은 정해진 코스를 이탈해 파격적으로 현지 지도를 진행하면서 그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곽씨는 “예를 들자면 황해도의 한 부대를 시찰하는 과정에서 부대장이 인도해주는 코스를 마다하고 엉뚱한 막사에 들어갔는데 하필 그곳이 허약자들(영양실조 환자)만 모아놓은 곳이었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허약자들의 실태를 본 김정은이 대노해서 부대장을 징계하고 허약자들을 전원 평양의 병원으로 후송토록 조치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함흥시를 시찰하러 가는 도중에 차를 세우도록 지시하고 인근의 민가를 불시에 방문했는데, 마침 식구들의 저녁 식사로 차려놓은 강냉이 몇 알이 들어간 시래기 죽사발이 여과 없이 그대로 김정은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곽씨는 “그 후 그 지역 책임자에게 어떤 조치가 내려졌는지에 대한 소식은 알려진 것이 없지만 항상 거짓 보고만 올리던 간부들이 크게 징계를 받았을 것은 분명하고, 주민들은 새 장군님이 뭔가 다른 것 같다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함경남도 주민 곽씨의 이야기는 김정은이 주민들의 심각한 식량 사정을 올해 초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과 늦게나마 그같은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2월 중순경에 열린 최고위층 핵심 간부 회의에서 “지금은 총알보다 식량이 더 중요하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은의 이같은 발언은 그가 현재 북한의 식량 사정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식량보다 ‘총알’을 더 중시했던 김정일과는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최근 자유아시아방송은 양강도 소식통을 인용해 지난 8월6일부터 각 근로단체 조직들과 인민반, 공장기업소들을 상대로 ‘새 경제 관리 체계’와 관련한 강연회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방송은 ‘새 경제 관리 체계’의 내용에 대해 국가가 따로 생산 품목이나 계획을 정해주지 않고 공장기업소들이 독자적으로 생산하고 생산물의 가격과 판매 방법도 자체로 정해서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이는 공장기업소에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배급제·국가 생산 계획 등에도 큰 변화

평양 능라인민유원지를 둘러보고 있는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 연합뉴스
이 방송은 또한 함경북도 소식통을 인용해 “‘새 경제 관리 체계’에 따라 생산과 판매, 수익과 분배를 공장기업소들이 자체로 결정하게 되었다”라며 “국가 기관 사무원들과 교육, 의료 부분 직원들에 한해서만 기존과 같이 국가가 배급을 주고 기타 근로자들의 배급제는 폐지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배급제를 완전히 폐지하는 것은 아니고, 국가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는 공무원과 공적 부문에 대해서만 배급제를 유지하며 사적 부문에 대해서는 배급제를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조치가 정착되면 북한 경제에서 그동안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공적 부문과 사적 부문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경제가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농업 부문에서는 올해 가을부터 기존의 국가 생산 계획에 따라 생산물을 거두어가던 방식에서 국가 생산 계획과는 관계없이 전체 수확량에서 70%는 당국이, 나머지 30%는 농민들이 가지도록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매우 파격적인 조치로 농민들이 자연재해로 계획 달성이 불가능할 경우 열심히 일하지 않아 식량 생산이 더욱 감소하게 되었던 기존 방식의 한계를 과감하게 시정한 것이다.

리영호 전 총참모장이 경제 활동 주도권을 군에서 내각으로 이관하는 데 대해 반발하다가 지난 7월 중순 해임된 사실은 경제와 관련된 권한을 내각에 집중시키려는 김정은 위원장의 의지가 그만큼 확고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정원은 최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북한이 김정은의 지시로 경제 관리 방식 개편 태스크포스를 운영하면서 당과 군의 경제 사업을 내각으로 이관하고, 협동농장의 분조 인원을 축소하며, 기업의 경영 자율권을 확대하고, 근로자 임금 인상 등을 추진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동아일보도 최근 김정은의 특별 지시에 따라 올해 초 내각 산하에 ‘경제 관리 방식 개선을 준비하는 소조’가 꾸려졌고, 로두철 부총리가 소조의 조장을 맡고 있으며, ‘북한 내부에서는 이르면 8, 9월에 경제 개혁 방안이 나온다는 기대가 높다’라고 보도했다. 로두철 부총리는 2006년 1월 김정일의 방중에 수행했고, 2010년 11월과 2011년 9월 최영림 총리의 방중에 수행하는 등 북·중 경제 협력을 주도해온 인물이다. 로두철은 2009년부터 국가계획위원장이라는 경제 분야의 중책을 맡고 있고,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당내 고위직도 맡고 있어 현재 북한에서 경제 계획을 주도하기에 최적임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최근 북한의 핵심 실세 중 한 명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은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측과 라선 경제무역지대와 황금평 경제구 ‘관리위원회’ 설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라선 지대는 앞으로 원재료 공업, 장비 공업, 하이테크 신기술 산업, 경공업, 서비스업, 고효율의 현대 농업 등을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북한의 선진 제조업 기지로 육성하고, 황금평·위화도는 정보 산업, 여행·문화·창의 산업, 현대 농업, 의류 가공업을 중심으로 개발해 점진적으로 지식 집약형 신흥 경제 지구로 육성하기로 중국측과 합의했다. 이같은 북·중 간의 전략적 경협이 진전되면 북한은 경제 회복의 계기를 확보할 수 있겠지만, 남북 경협이 위축된 가운데 이루어지는 북·중 경협 확대는 북한 경제의 대중(對中) 의존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커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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