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는 왜 친중국 노선을 버렸나
  • 모종혁│중국 전문 자유기고가 ()
  • 승인 2012.08.26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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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속 심화와 반중국 정서 확산 따라 정부가 결단…개혁·개방 급물살

지난 2월 미트소네 댐 건설 예정지인 미얀마의 이라와디 강에서 한 어린이가 걸어가고 있다. ⓒ EPA 연합

지난해 9월 말 세인 미얀마 대통령은 미트소네 댐 건설을 중단했다. “댐 건설이 국민들의 의사에 반한다”라는 이유에서였다. 세인 대통령의 돌출 행동에 미얀마 보수 엘리트들과 중국 정부는 경악했다. 댐 건설은 미얀마와 중국의 우호 관계를 상징하는 대형 프로젝트였기 때문이었다. 미트소네 댐은 2001년에 사업 타당성 조사를 실시한 후 2010년 12월에 착공했다. 미얀마 전력부와 중국 전력투자집단공사가 합작한 형태였지만, 총 투자금 36억 달러의 대부분은 중국이 댔다.

본래 미얀마 민간 사회는 미트소네 댐 건설에 거세게 저항했다. 미트소네 댐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수력발전소로, 예상 생산 전력이 6천㎿에 가깝고 저수 면적은 싱가포르보다 큰 7백66㎢에 달한다. 미얀마는 생산될 전력의 90%를 중국에 저가로 송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수몰 예정지 주민에 대한 강제 이주와 지진 발생, 환경 파괴 등을 우려한 미얀마 정치·사회 단체가 일치단결해 댐 건설에 반대했다. 민주화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도 그중 한 명이었다. 특히 카친족 독립군(KIA)은 댐을 건설할 경우 내전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이런 격렬한 반발에도 미얀마 정부와 엘리트층은 댐 건설을 강행했다. 그런데 세인 대통령은 “더는 중국에 끌려가지 않겠다”라며 건설 중단을 선언했다. 그것도 우나 마웅 르윈 미얀마 외무장관이 미국 국무부를 방문한 다음 날이었다. 최근 들어 이 사건은 다시 대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중단 선언을 기점으로 미얀마 정부가 ‘제대로 된’ 개혁·개방 및 친(親)서방 정책의 급페달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미얀마의 ‘변심’에 중국 정부는 안달을 내고 있다. 미얀마는 무슨 이유로 오랜 친중 노선을 버리게 된 것일까.

미얀마인들에게 해 끼치는 최대 투자국

미얀마가 중국과 정상 관계를 맺은 것은 영국과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1948년부터다. 미얀마는 대내적으로 사회주의, 대외적으로 비동맹 중립주의를 채택해 중국과 긴밀한 친선 관계를 맺었다. 특히 1962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네윈은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적 정신 가치를 접목시킨 ‘버마식 사회주의’를 기본 체제로 해 친중 노선을 견고히 했다.

1988년 친위 쿠데타 이후 신군부 정권이 들어서고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경제 제재가 실시되자, 중국은 경제적 원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석유는 확인된 매장량만 34억 배럴에 달하고, 매장량 12조cf인 천연가스는 아시아에서 가장 많다. 여기에 석탄·우라늄·철광석·니켈 등 다양한 광물자원이 미얀마 전역에 산재한 데다 미개발 상태여서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다. 올해 3월까지 중국의 대미얀마 투자액은 1백39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전체 외국인 직접 투자의 34%로, 최대 투자국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대표적인 투자 프로젝트는 미얀마 서부 여카잉에서 윈난(雲南) 성 쿤밍(昆明)에 이르는 석유와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공사이다. 이 파이프라인이 내년에 완공되면 중국은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수입하는 석유 보급로를 3천㎞나 단축하고, 미국 해군의 영향력 아래 있는 말라카 해협에서 벗어나게 된다. 군사적 용도의 투자도 빼놓을 수 없다. 1992년부터 중국은 미얀마 항구를 사용하고자 해군기지 건설 장비를 무상 지원했다. 미얀마 서부 연안 도시인 시트웨를 기점으로 방글라데시(치타공)?모리셔스?몰디브?스리랑카(햄번토타)?파키스탄(과다르)을 잇는 ‘진주 목걸이 전략’도 수립했다. 이는 인도양의 해상권을 장악해 인도를 견제할 목적이다.

중국의 미얀마 사랑은 결실을 맺은 듯했다. 특히 1988년 이전 미얀마의 최대 투자국이었던 일본이 경제 제재 이후 퇴조하면서 중국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정치·경제적 후원의 대가로 중국은 엄청난 광산 개발권과 벌목권을 획득했다. 중국인의 미얀마 진출도 쓰나미 수준이었다. 미얀마 동북부 중심 도시인 만달레이에서 잘 엿볼 수 있다. 만달레이의 도심 건물 대부분은 중국인이 소유하고 있다. 현지에서 ‘중국인이 한꺼번에 침을 뱉으면 홍수가 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이다.

하지만 중국이 미얀마 ‘정부’에 들인 공은 되레 미얀마 ‘국민’의 반중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중국이 자국의 발전과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미얀마의 지역 사회 보존이나 일자리 창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국이 개발한 카친 주에 있는 금광은 심각한 하천 오염을 일으켰다. 미얀마 산림을 초토화해 얻은 목재는 곧바로 중국에 이송되었다. 이에 반해 중국이 투자한 모든 건설 현장에서는 현지인이 아닌 중국인을 데려와 고용했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균형 잡힌 관계 유지할 듯

독재 체제의 미얀마를 떠나 중국으로 이주한 미얀마인에 대한 차별도 반중 감정을 깊게 했다. 현재 중국 내에 거주하는 미얀마인은 10만명이 넘는다. 중국은 이들을 ‘특별 대우’하고 있지만, 갈수록 노동력 착취와 인신 매매의 대상으로 내몰고 있다. 2010년 11월 윈난 성에서 만난 재중 반미얀마 연합 지도자 미안 마오 씨는 “과거 중국은 미얀마인을 따뜻이 맞아주었지만 2008년 5월 사이클론 피해 이후 유입 인구가 늘어나면서 대접이 달라졌다”라고 말했다. 미얀마인은 중국인도 주저하는 3D 작업 현장에서 중국인 임금의 30~50%를 받으며 일하고 있다. 여성들은 중국 인신매매단의 표적이 되어 내륙 농촌으로 팔려나가고 있다.

정치·경제의 종속 심화와 팽배해져가는 반중 정서에 정권의 안위가 흔들릴 것을 우려한 미얀마 정부는 친중 노선을 버리고 과감한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지난해 11월 미얀마 정부는 민주화 투쟁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했다. 같은 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미얀마를 방문했다. 미국 국무장관이 미얀마를 찾은 것은 1955년 이래 처음이었다. 12월에는 소수 민족 반군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 반군에 대한 공격도 중단했다. 올 4월에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45개 선거구에서 보궐 선거가 치러져 수치 여사와 민족민주동맹이 승리했다.

미얀마의 ‘개과천선’이 탈(脫)중국화에 있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지난해 미얀마 고위 지도자들은 미국 언론과의 잇단 인터뷰에서 미얀마의 ‘지정학적 가치’를 유난히 강조했다. 수치 여사는 지난 3월 아세안 언론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미얀마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다. 다양한 지하자원을 활용해 균형 잡힌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미얀마 정치 엘리트들이 굴욕적인 외교 관계를 청산하고 중국·미국·인도 등 강대국의 갈등을 기회 삼아 권력 균형의 당사자가 되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아직까지 신중하다. 미트소네 댐 건설 중단으로 큰 손해를 보았지만 올해 들어서는 반발을 자제하고 있다. 지난 6월 중국을 방문한 우나 마웅 르윈 미얀마 외무장관에게 양국 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 촉진을 약속하면서 환대했다. 이는 석유와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프로젝트를 비롯한 풍부한 지하자원 개발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욱 큰 데다, 미얀마의 군사 전략적 가치가 갈수록 부각되기 때문이다.

우리 입장에서 미얀마의 탈중 노선과 개혁·개방을 주시해야 하는 이유는 경제 투자 진출뿐만 아니라 북한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서다. 과거 미얀마가 처했던 대내외적 환경과 상황은 현재 북한과 유사하다. 냉전 시기 북한은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면서 경제적 실리를 얻어냈다. 1990년대에는 개방과 수교 회담을 미끼로 미국과 일본의 원조를 받아냈다. 하지만 핵위기가 격화되면서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었고, 중국에 대한 경제적 종속이 심각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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