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상가상 그리스…‘탈세 명단’까지
  • 조명진│유럽연합집행이사회 안보자문역 ()
  • 승인 2012.11.1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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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알고도 방치” 주장하며 공개해 민심 폭발

그리스 주간지 의 바세바니스 편집장이 10월29일 아테네 법정에 출석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아래는 문제의 명단이 게재된 주간지 . ⓒ EPA 연합
유로 위기의 진원지인 그리스가 또 다른 위기에 처해 있다. 다름 아닌 2년 전 프랑스 정부가 그리스 정부에 넘긴, 탈세 의혹이 있는 그리스인 2천49명의 명단이 그리스 주간지 <핫 독(Hot Doc)>을 통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이 명단이 그리스 정부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 정부의 확연한 은폐 시도 때문이다.   

11월1일 문제의 명단을 공개한 주간지 <핫 독>의 편집장 바세바니스는 기소당했고, 스위스 계좌를 가지고 있다는 이들의 명단은 그리스 정계와 재계 지도층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라가르드 리스트(Lagard List)’로 알려진 이 명단은 2000년 8월 당시 프랑스 재무장관 크리스틴 라가르드가 그리스 재무장관에게 준 것이었다. 라가르드 전 장관은 현 IMF(국제통화기금) 총재직을 맡고 있다.

“2년 전 프랑스 정부가 그리스 정부에 준 것”

11월1일 BBC 인터뷰에서 바세바니스 편집장은, 자신이 명단을 공개한 이유는 프랑스 정부가 2년 전에 명단을 그리스 정부에 주었지만 전혀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리스 정치인들은 명단을 비밀로 지켜준 것에 대해서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리스 정부는 명단에 있는 사람들이 법을 어겼다는 증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바세바니스 편집장의 변호사는 주간지에서 명단을 공개한 것은 자료가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른 것이어서 공공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지난 2년간 여러 가지 억측에 의한 이름들이 쏟아져 나왔고, 가짜 명단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 가짜 명단에는 전체 그리스 국회의원 가운데 절반 정도의 이름이 거론되어 그리스 정계를 뒤흔들어놓기도 했었다. 이런 배경에서 진짜 명단이 공개된 것이다. 바세바니스 편집장은 사생활 침해에 대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무죄를 받았다. 

스위스 은행 계좌를 보유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더라도, 명단에 있는 그리스 사람들 일부가 탈세를 위한 목적으로 계좌를 개설했다는 의심이 크게 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그리스 언론들은 탈세 가능성이 있는 스위스 은행 계좌 소지자들에 대해 수사를 하지 않는 것은 부유층을 보호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막후 공작 때문이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의회의 한 위원회는 전 재무장관인 조오르게 파파콘스탄티오우 또는 그의 후임자인 에반젤로스 베니젤로스 재무장관이 이들에 대해 수사를 한 적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

두 재무장관은 이 자료가 검찰 담당 부서에 건네졌지만 명단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수사를 하거나 탈세에 대한 조사를 지시받은 바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스 당국은 지난 2년간 명단을 갖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에서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바세바니스 편집장은 11월2일자 영국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나의 무고함은 정치권에 맞서는 판사에 의해서 증명될 것이며, 탈세자 명단에 대한 조사를 멈추지 않겠다”라고 공언했다. 유럽연합(EU) 통계청에 따르면 그리스의 탈세 액수는 연간 5백억 유로에 달한다. 또 다른 그리스 일간지 나 테아(Na Tea) 또한 같은 명단을 공개하며, 2007년까지 스위스 은행 계좌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인들의 예금 액수는 20억 유로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들이 탈세를 했는지에 대한 증거는 없다고 강조했다.

바세바니스 편집장에 대한 공판으로 언론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참고로 전 세계 자유 언론인 모임인 ‘국경 없는 기자(Journalist without Borders)’가 발표한 2011~12년 언론 자유 지수에서 그리스는 EU 국가들 가운데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라가르드 명단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저명한 사람이 많다. 이들은 스위스에 있는 HSBC 계좌를 이용해서 탈세를 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그 명단의 출처는 HSBC 직원이 외부에 유출한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로 11월5일자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HSBC는 멕시코·이란·시리아·사우디아라비아의 돈세탁에 관련한 혐의로 미국 법원으로부터 15억 달러의 벌금형을 받은 영국 은행이다.

긴축 정책안 통과와 맞물려 격렬 시위 촉발

영국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은 11월2일자에서 ‘생각할수 없나? 코스타스 바세바니스, 그리스 최고의 세무공무원이 되다’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2010년에 프랑스 정부가 넘긴 명단을 그리스 정부는 방치하거나 덮어버리려고만 했다. 심지어 어떤 재무장관은 명단을 분실했다고 말한 적도 있고, 어떤 장관은 사라졌다고도 했다. 이것은 정치인들과 가까운 기업인들의 탈세 사실을 감추어주려는 그리스 정치 지도층의 의중을 보여주는 것이다.’

11월7일 그리스 의회는 EU로부터 구제금융을 얻기 위해 추가적인 긴축 정책안을 가까스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2013년 정부 예산에서 1백35억 유로를 삭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가 파산을 피하기 위해 IMF와 EU로부터 3백15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수혈받아 은행에 지원하고 대출금을 갚을 수 있게 된다.

이 법안 통과로 예상되는 감원에 반대하는 시위가 아테네에서 벌어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시위가 격렬했던 이유는 ‘라가르드 명단’의 공개와 거기에 대한 정부 수사가 미비한 것이 그리스 국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2014년이면 그리스의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1백90%로 늘어날 예정이다. 그리스의 재정 위기는 여전히 험난한 길을 앞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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