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 세워 공을 기록한다”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2.12.04 14: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종 / 남이 장군 죽인 유자광에게 내린 교서

경기도 가평 남이섬에 있는 남이 장군 묘. ⓒ 뉴스뱅크이미지
예종은 즉위 원년인 1469년 음력 5월20일(계묘)에 경복궁 경회루에 나아가서 익대공신들에게 교서를 내리고, 이어서 술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내전에 돌아와 환관 전균으로 해금 궁온을 가지고 가서 이들에게 베풀게 했다. 또 잘산군(훗날의 성종)에게 명해 이화주 한 단지를 가지고 가서 내려주게 했다.

익대공신이란, 1468년 남이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을 말한다. 유자광이 당연히 일등 공신이었다.

1등 수충보사 병기정난 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 : 유자광·신숙주·한명회·신운·한계순 등 5명

2등 수충보사정난 익대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 : 밀성군 침(琛)·덕원군 서(曙)·영순군 보(溥)·구성군 준(浚)·심회·박원형·이복·이극증·정현조·박지번 등 10명

3등 추충정난 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 정인지·정창손·조석문·한백륜·노사신·박중선·홍응·강곤·조득림·신승선·권감·어세겸·윤계겸·정효상·권찬·조익정·안중경·서경생·김효강·이존명·유한·한계희 등 22명

실제로 비석을 세웠는지는 의문

익대공신은 처음에 37명이었으나, 이듬해 윤흠·강희맹·이존을 추가해 모두 40명이 되었다. 이들에게는 좌익공신의 예를 따라 포상하도록 했다. 좌익공신이란, 세조 즉위년인 1455년에 공을 세워 공신첩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을 말한다. 익대공신에게 하사한 물품의 내역은 어마어마했다. ‘수충보사 병기정난 익대공신 자헌대부 무령군’ 유자광에게 하교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우리 부자가 서로 계승함을 생각건대, 오직 경의 형제를 이에 의지했으니, 막대한 공을 갚고자 하는데, 어찌 비상한 은전을 거행하지 않겠는가? 이에 경을 익대 일등 공신으로 책훈해, 각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한다.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3계급을 뛰어올리게 했으며, 적자와 장자는 세습해 그 녹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해, ‘익대 일등 공신 유자광의 후손’이라 했다. 비록 죄를 범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 사면)가 영구히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10인, 노비 13구, 구사(丘史) 7명, 전지 150결, 은 50냥, 표리 1투, 내구마 1필을 하사하고, 별도로 노비 7구와 전지 50결과 표리 1투를 주니, 이르러 가거든 수령하라.

아아! 일월과 성신이 밝게 펴져 있으니, 감히 성한 공훈을 잊겠는가? 산하대려(山河帶礪)처럼 면면히 길이 함께 후손을 보전할지어다.

 

산하대려라는 표현은 한나라 고조 유방이 공신들에게 각 나라를 봉해주면서 맹세하기를, “황하가 띠같이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같이 작아지도록 그대들의 나라가 영구히 존속하게 하고 그것이 후손들에게 미치도록 하리라”라고 했던 말에서 나왔다.

교서에 ‘각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하라’라는 내용이 있다. 각을 세워 형상을 그리는 것은 한나라 선제가 미앙궁의 기린각에 중흥 공신 11인의 초상을 그 안에 그려두었던 일을 본뜬 것이다. 조선에서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한 일로는 태종 때 태조의 건원릉 신도비를 세우면서 비음(비의 뒷면)에 개국·좌명·정사공신의 명단을 적어 준 일이 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들의 개별 공신비를 세워주지 않았다. 조선 초의 개국 공신들에게 내린 녹권 가운데 현전하는 몇몇 예들을 보면, 비를 세워주라는 왕명이 있으나 실제로 비를 세워준 것 같지는 않다. 건원릉 신도비의 비음에 공신의 명단을 기록한 것은 아주 이례적이다.

예종은 1469년 5월에 익대공신들에게 내린 교서에서 공신비를 세워주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수사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익대공신들에게 내린 공신비는 발견된 것이 없다.

남이는 정선공주의 아들로, 무예가 출중하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할 때 유자광과 함께 공적을 세워 적개공신 1등에 등록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런데 세조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예종은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자광은 평소 남이에게 질투를 느껴왔기 때문에, 남이가 역모를 획책한다고 무고했다. 즉, 예종 즉위년인 1468년 10월24일(경술), 병조참지 유자광은 어두울 때 승정원에 나아가 입직 승지 이극증과 한계순에게 급히 계달할 일이 있다고 했다. 이극증 등은 유자광과 함께 합문 밖에 나가서 승전 환관 안중경을 통해 용무를 아뢰게 했다. 예종이 유자광을 불러서 보자, 남이가 김국광과 노사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밀고했다. 이때 유자광은 남이가 젊어서 지은 시의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이란 구절에서 ‘미평국’을 ‘미득국(未得國)’으로 고쳐서 그것을 역모의 증거로 고발했다.

유자광 등은 당시 영의정이던 강순을 연루시켜 죄목을 조작했고, 무려 25명의 인사를 처형했다. 실은 남이와 강순 등 신진 세력은 이시애의 난 이후에 정치적 세력을 키워나가서 한명회·김국광·노사신 등 훈구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때 유자광은 그들이 훈구 세력을 제거하려 한다고 모함해서 거꾸로 그들을 죽게 한 것이다. 한명회 등은 신진 공신 세력을 부담스럽게 여겨왔기 때문에 옥사를 방관했다.

경복궁 경회루. ⓒ 시사저널 이종현
예종, 유자광 중용해 조정 불안 키워

유자광은 처음에 갑사에 소속되어 건춘문 파직문지기가 되었다가, 세조 13년(1467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 때 자진해서 출전했다. 이시애의 난이 평정된 뒤 정5품 병조정랑이 되었다. 또 세조의 명으로 온양에서 치러진 별시 문과에 응시해 장원으로 급제했다. 본래 그의 답안은 낙제 판정을 받았으나, 세조가 찾아오게 해서 급제시킨 것이라고 전한다. 이듬해 세조가 승하하면서 기세가 꺾이는 듯했지만, 유자광은 남이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상황을 일변시켰다.

유자광은 남이 옥사 이후 예종 원년 5월에 있게 되는 포상 때 익대공신 1등에 책록되고 1품계로 뛰어올라 무령군에 봉해졌다. 그는 남이의 옥사 이후에 호걸이자 선비를 자처했다. 반대 세력이 보기에, 유자광은 성품이 음흉해 사람을 잘 해쳤다. 특히 은총이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모함했다고 한다. 성종 때는 한명회의 집이 귀하고 성하게 되는 것을 시기해, 성종 7년(1476년)에 한명회가 제멋대로 날뛰려는 뜻이 있다고 상소했다. 이때 성종은 한명회에게 죄를 주지는 않았다. 뒤에 유자광은 임사홍·박효원 등과 모의해서 현석규를 배제하려다가 오히려 패해 동래로 귀양 갔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성종 8년(1477년)에 유자광은 다시 도총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대간의 논핵이 끊이지 않았다. 이듬해 유자광은 조정을 문란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가산이 몰수되고 공신의 훈적이 삭탈되었다가 성종 12년(1481년)에 훈적을 다시 찾았다. 그 뒤 몇 차례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성종 22년(1491년)에는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성종은 유자광이 정치를 어지럽게 할 부류인 것을 알고, 공훈은 인정했어도 정치적 권한은 주지 않았다. 유자광은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이극돈 형제가 조정에서 권세를 잡자 그들에게 아부했다. 김종직은 이미 죽은 뒤였으나 성종은 김종직 일파를 비롯한 영남 유림들을 대거 기용했다. 김종직에게 수업한 김일손은 헌납으로 있으면서, 이극돈과 성준이 장차 당파를 이루려 한다고 상소했다. 연산군 4년(1498년)에  <성종실록>
을 편찬하는 사국을 열자, 이극돈은 당상관으로 있으면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았는데, 그 글에 자신의 허물이 실려 있는 것을 알고 원한을 갚으려고 생각했다. 이때 유자광은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것을 기화로 삼아, 이는 세조가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유한 것이라고 연산군을 충동해 마침내 사화를 일으켰다. 무오년에 사초 때문에 일어난 화라고 해 이 사화를 무오사화라 한다.

성종부터 연산군 때까지 유자광이 조정 인사들을 모함하고 정국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은, 예종이 유자광의 모함을 받아들여 남이 옥사를 성립시켰을 때 이미 화태를 배태했다. 예종은 왜 그렇게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했단 말인가.  

참고 :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