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연예 인물] PSY, 대중음악의 성공 방식을 바꾸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2.12.24 16:2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방에서 한국식 팝으로 세계를 뒤흔든 싸이

2012년은 ‘국제 가수’ 싸이의 해로 기록될 것이다.

싸이의 국제적 성공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그는 나라별로 대륙별로 기득권을 쥐고 있는 방송 시스템이나 음반 산업의 헤게모니가 무의미해졌음을 보여주었다. 대중음악의 성공 경로를 바꿔놓았고 인터넷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이기도 하다. 물론 인터넷이라는 미디어 혁명이 배경이 되었다. 무선 광통신망의 속도가 좀 더 빨라진다면 나라별 방송사나 케이블 방송 같은 미디어 플랫폼이 완전히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보다 더 직접적인 싸이의 성공 의미는 아시안 파워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이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영대씨는 “싸이의 성공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미국 대중문화계에서 ‘아시안 인베이전’의 신호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그동안 아시아 문화 콘텐츠가 서구 사회에서 간간이 인기를 모은 적은 있지만 대부분 오리엔탈리즘에 기댄 1회성 현상이었다.

하지만 싸이의 콘텐츠는 지금 서구 사회에서 소비되고 있는 동시대 트렌드의 최신 버전인 데다 미국 내 아시안 커뮤니티라는 확실한 충성층(소비층)을 확보했고, 이를 넘어서 다양한 인종으로 확산되고 있기에 과거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비틀스, 라틴 음악 이어 미국 상륙

미국 입장에서 외부의 대중문화가 집단적으로 유입된 첫 번째 사례는 비틀즈였다.

1964년 비틀스가 미국의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하면서 비틀스는 스탠더드 팝이 판을 치던 미국 시장을 평정했고, 롤링스톤즈 등 일군의 영국 밴드들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두 번째는 1990년대에 불붙은 라틴 음악 붐이다. 미국에서 라티노는 카리브 해를 건넌 난민(마이애미)이거나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온 불법 월경자들(뉴멕시코나 LA)로 싼 노동력의 대명사로 통했다.

하지만 미국에 정착한 이들의 2세와 3세들이 교육을 받고 인구 수를 늘려가면서 1980년대 말부터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나 음악이 시장을 휩쓸었다. 영화 <라밤바> (1988년)와 <이스트 LA 스토리>(1993년)가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고, 이 무렵 <타임>에서 히스패닉 붐을 커버 기사로 올리기도 했다. 1999년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리키 마틴이 <Livin’ la Vida Loca>를 발표하면서 라틴 붐은 절정에 달했다. 이 앨범이 나온 지 2주 뒤에 <타임>이 마틴을 표지 인물로 내세우고 ‘Latin Music Goes Pop!(라틴 뮤직 폭발하다)’이라는 제목을 걸었다. 이런 변화의 뒤에는 미국 내 라티노 인구의 증가가 있었다.

미국 인구 통계 조사에 의하면 백인 인구 비율은 1980년대 79.6%에서 2000년대 69.1%로 10% 이상 낮아졌다. 흑인 비율은 같은 기간 11.7%에서 12.3%로 별 차이가 없다. 반면 라티노 비율은 6.4%에서 12.5%로 상승했고, 2010년대에는 16.3%를 기록했다. 이런 라티노의 인구 증가와 맞물리면서 1990년대부터 미국 대중문화에 라틴 붐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의 파워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과 재선에서 확인되기도 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최근 미국 내 아시안 인구의 증가 속도가 라티노의 증가 속도와 맞먹는다는 점이다. 미국 인구 통계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미국 내 아시아계 인구의 성장 속도가 흑인 인구 성장 속도를 앞섰다고 한다. 2010년 미국 내 아시아 인구는 4.8%이지만 2050년에는 그 두 배인 9%를 차지할 것이라는 통계가 나와 있다.

라티노 인구 수 증가가 라틴 음악 붐을 일으켰다면 아시아계의 증가는 아시아 음악의 소비와 맞물리는 것이 당연하다. 인종 커뮤니티에 기반한 아시아계가 미국 음악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대표적 사례로 파이스트무브먼트(FME)를 들 수 있다. 2005년 인디레이블을 통해 데뷔한 FME는 2010년 발표한 <라이크 어 지 식스>로 빌보드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 뮤직비디오에는 한인 타운 유흥가와 소주, 한글 등 한국적인 코드가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FME의 멤버 네 명 중 두 명이 한국계이고, 나머지 두 명도 아시아계이다. 흑인이나 백인의 전유물로 알려진 랩을 하면서 FME는 아시안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했고, 그것이 아시안 커뮤니티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형국이 되었다.  

2012년 싸이라는 가수가 등장해 한국말로 부른 노래로 미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았다. 미국 워싱턴 주립대에서 음악인류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대중음악 평론가 김영대씨는 “미국 스타일의 대중음악으로 프로야구나 골프 같은 인기 스포츠 장르도 이미 아시안에게 개방되었지만 유독 미국 대중음악계는 아시안에게 문턱이 높았다. 싸이나 FME가 그 벽을 깨뜨린 것이다”라고 평했다.

그는 최근 미국 내에서 소비되는 K팝의 소비 루트를 간단히 정리했다. “초반에는 스스로를 마이너리티라고 여기는 아시안계나 라틴계가 먼저 받아들였다. 이게 또래의 백인 친구에게 옮겨붙는 형태이다. 라티노이든 백인이든 K팝의 절대 소비층인 10~20대에서 K팝은 월드뮤직이 아니다. SPA에 걸려 있는 옷의 원산지에 무관심한 것처럼 트렌디한 대중음악일 뿐이다. 유튜브로 뮤직비디오를 접하고 MP3로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빅뱅이나 싸이는 음악 그 자체로 즐기는 대상이지 피부색과 인종적 배경을 따지지 않는다. 과거 미국이나 일본의 거대 음반사에서 아시안계 슈퍼스타를 키우기 위해 코코 리나 우타다 히카루 같은 가수를 미국적인 느낌을 잔뜩 붙여서 미국 대중음악계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 반면 K팝 붐은 미국의 방송·음반·연예 시스템의 도움 없이 마이너리티 커뮤니티의 절대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시작했다. FME는 아시안 커뮤니티의 자랑 같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인종적 배경에 솔직했고, 싸이도 솔직했다.”

다만 아시아 국가 중, 인구 수나 경제력이 한국을 앞서는 중국이나 일본, 인도를 제치고 왜 K팝이 아시안 컬처 중에서 선두에 설 수 있었는지는 연구 대상이다. 한류로 인해 아시아 전체가 K팝의 논리와 형식에 익숙해져 있고, 늘 본국에 접점을 가지고 있는 아시안 커뮤니티에 한류 붐이 쉽게 옮겨붙었다는 추론은 가능하다.  

“K팝의 완성도나 아이돌 그룹이라는 형태가 미국에서는 신기하고 재미있게 보이기도 한다”(김영대)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국력이나 인구에 비해 미국 대중문화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계의 활약이 ‘지나칠 정도로’ 두드러지고 있는 점은 1회성 이벤트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아시아계가 많이 살고 있는 미국 서부 지역의 로컬 방송 앵커 자리에 한국계가 한 명씩은 꼭 들어 있고, 미국에서 인기 있는 연속극이었던 <로스트>나 <그레이 아나토미>에 한국계 김윤진과 산드라 오가 주연 자리를 꿰찬 것에 비해 다른 아시아계의 활약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 11월5일 프랑스 파리에서 싸이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플래시몹에서 2만여 명의 팬이 손을 흔들어 환호하며 싸이의 말춤에 열광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아시안 파워 선두 주자는 한류

언제부터인가 아시안계의 대명사가 한국인이 된 것이다. 할리우드 자본이 아시아 현지 흥행을 고려했다면 당연히 인구가 많고 시장이 더 큰 인도나 중국계 또는 일본계 배우를 캐스팅했겠지만, 최근의 블록버스터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배두나)나 <G.I.조>(이병헌), <스타트렉>(존조)에서는 한국계를 선택했다. 미국 대중문화 산업의 논리에서 ‘미국 대중이 원하는 것’이 1순위라는 점을 보면 ‘지금 미국에서 한국적인, 또는 한국계가 통한다’라는 1차원적인 답변 외에는 딱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한국산 스마트폰이나 TV, 자동차가 ‘쌔끈하다(HOT)’라는 이미지가 미국에 널리 확산되는 것과 맞물려 있을 수도 있다. 

문화 교역이라는 측면에서 지금까지 미국이라는 서구 문화의 아이콘은 일방적으로 아시아로 수출되기만 했다. 하지만 싸이 현상은 그 반대의 경우가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례이다. 제2, 제3의 싸이가 한국에서 나올 수도 있고, 중국이나 일본에서 나올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아시안 컬처가 점증하는 미국 내 아시안 파워에 발맞춰 미국 대중문화의 변방에서 주류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위터 통해 시작, 전 세계로 확산 유튜브 조회 수 10억 돌파 눈앞 

 2012년 대중음악계 결산에서 싸이를 빠뜨릴 수 없다. ‘올해의 음악인’이나 ‘올해의 노래’ 부문에 싸이와 <강남스타일>이 자주 거론되는 것은 필연에 가까워 보인다. 그만큼 싸이의 열풍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미국 빌보드 핫100 차트에서 7주 연속 2위를 기록했다. 물론 1위를 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이다. 또 영국 차트에서는 1위를 했고, 40여 개 나라에서 아이튠스 음원 다운로드 정상에 올랐다. 유튜브상의 지표도 놀랍다. <강남스타일>은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의 <Baby>가 1년여 만에 달성한 1위 기록을 단 3개월 만에 갈아치웠고, 현재는 조회 수 10억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 밖에도 싸이는 마돈나의 무대에 오르는 한편,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는 MC 해머와 공연하는 등 한국 음악 팬들이 그동안 꿈꾸기만 하던 풍경을 현실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한국 음악 시장보다 더 넓고 대체로 더 선진화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곳에서의 이런 엄청난 선전은 확실히 높게 평가할 만하다.

<강남스타일>의 성공을 둘러싸고 ‘노래’임에도 오히려 ‘음악’에 대한 분석보다는 ‘현상’에 대한 다양한 층위의 분석이 펼쳐졌다. <강남스타일> 열풍 속에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악 자체가 핵심은 아니라는 무언의 합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열풍의 한가운데에는 ‘뮤직비디오’의 시각적 재미와 그에 따른 카타르시스가 자리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노장 래퍼는 싸이를 가리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래퍼일 뿐”이라고 폄하했지만, 어떤 이는 “그 ‘우스꽝스러움’이야말로 미국이 발명해내 전 세계로 퍼뜨린 B급 코미디의 전형”이라고 말했다. “미국 대중문화의 축을 이루는 두 핵심 코드인 ‘코미디’와 ‘춤’을 싸이가 정확히 파고들었다”는 분석도 있었다. 단순히 재미있어서, 혹은 우연이나 운이 터진 것이 전부가 아니라 미국 시장과 통하는 어떤 ‘코드’가 작용했다는 이야기이다.

또 <강남스타일>을 통해 새로운 마케팅 경로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강남스타일> 열풍은 트위터를 통해 시작되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저스틴 비버를 발굴한 인물이자 싸이의 현 미국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프로모터 스쿠터 브라운이 처음 싸이의 존재를 발견하고 뮤직비디오를 링크한 곳도 바로 트위터였다. 이렇듯 <강남스타일>은 해외의 각종 음악 사이트와 셀레브리티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트위터와 유튜브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뉴미디어 통해 ‘강제 해외 진출’당한 첫 사례

이는 기존의 전형적인 마케팅 경로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흥미와 관심을 자아내는 코믹한 뮤직비디오 한 편이 소셜 미디어의 자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고, 그 호응은 곧바로 음원의 소비로 이어졌다. 아마추어 뮤지션에게는 큰 자본 없이도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음악으로 앞길을 개척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사례이기도 했다.

그러나 싸이의 성공이 모든 한국 뮤지션의 성공을 구조적으로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싸이의 성공은 K팝 열풍과도 큰 관련이 없었다. 다시 말해 <강남스타일> 열풍은 K팝이 만들어놓은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같은 국적’인 싸이가 자신의 재기 어린 뮤직비디오와 코믹한 춤으로 적절한 미디어 시스템의 수혜를 입은 다음, 그 위에 일정한 운과 타이밍이 더해져 완성된 ‘개인적 성공’에 가깝다는 것이 가장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박은석 평론가는 이와 관련해 “우연히 터진 히트곡 하나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여론의 호들갑이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편 싸이의 성공은 본의 아니게 한국 대중음악 시장의 음원 구조 문제를 다시 한번 들추어내기도 했다. <강남스타일>이 한국에서 3백60만 다운로드로 6천5백만원의 수익을 올렸는데 외국에서 2백90만 다운로드로 28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같은 엄청난 금액 차이가 한국의 턱없이 낮은 음원료 때문이라는 사실이 회자되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게 흘러나왔다. 이미 ‘스탑덤핑뮤직’ 운동을 비롯해 국내의 많은 뮤지션이 목소리를 내어왔으나 ‘월드스타’ 싸이의 사례가 그 모든 움직임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다. 

평론가 나도원씨의 말이다. “병역 문제로 공적이 되어 두 번이나 군대를 다녀와야 했던 싸이는 돌연 영웅이 되어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초대받더니 결국 훈장까지 받았다. 노래와 뮤직비디오보다 이 ‘한국적 현상’이 더 우습지 않은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