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내 굴삭기 사 무너진 뒷산 복구하며 삽니다”
  • 경남 사천·조해수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3.01.1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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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에서 농부로 돌아온 ‘호통기갑’

‘강달프’ ‘호통기갑’ ‘공중부양’ ‘단식 전문 의원’…. 강기갑 전 통합진보당(통진당) 대표가 9년 의정 생활을 통해 얻은 별명은 그의 ‘투사’적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그가 2012년 9월10일, 눈물의 기자회견을 가졌다. 통진당 분당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표직 사퇴와 탈당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진보 정당 역사에 죄인이 된 저는 속죄의 길을 가고자 한다. 이제 흙과 가족이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고향의 품으로 돌아간다”라고 밝혔다. 정계 일선에서 물러나, 본연의 자리인 농군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강 전 대표가 낙향의 뜻을 밝힌 후 지난 4개월 동안 통진당 탈당파가 주축이 된 ‘진보정의당’이 창당되며 진보 진영이 분열되었고, 대선에서는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승리했다. 그런데 새해 들어 정치권에서 강 전 대표의 이름이 다시 거론된 것은 뜻밖에도 야권이 아닌 여권에서였다. 박근혜 당선인 주변에서 “대탕평 차원에서 새 정부의 첫 농수산부장관으로 강기갑 전 대표가 거론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렸다.

기자는 이를 확인하고자 1월4일 강 전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강 전 대표는 “고향에 20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지금 눈을 치우기 위해 트랙터를 모느라 바쁘다”라면서 웃을 뿐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기자가 1월8일 서울에서 차로 4시간30분 거리에 있는 경남 사천시 사천읍 장전리를 찾았을 때 강 전 대표는 그의 말처럼 한 명의 완벽한 농군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 시사저널 전영기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지난해 9월 초, (통진당 분당을 막기 위해) 물과 소금까지 끊고 5일간 완전 단식에 들어갔었다. 이때 간이 크게 상했다. (기자회견 후) 두 달여 동안 강원도 등지에서 요양 생활을 해야 했다. 지금은 노동하고 농사짓는 맛에 편안히 지내고 있다. 새벽 3~4시에 일어나 1시간 정도 묵상한 후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한다. (의정 생활) 9년 동안 농사일을 돌보지 못해 손 갈 곳이 많다.

통진당이 결국 분당되었고, 이 책임을 지고 낙향했다. 당시 통진당 사태 때 어떤 심정이었나?

‘진보’라는 이념은 더 큰 공동의 선을 위해서 비록 자기에게는 득이 될지라도 자신이 가진 것을 놓고, 깨고, 부수고, 허물고, 그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즉, 희생과 헌신이다. 그런데 (통진당) 중앙위 폭력 사태를 보면서 정말 부끄러웠다. 내가 국회에서 싸우고 ‘공중부양’까지 했을 때, (폭력 사태에 대해) 국민들에게는 사과했지만 새누리당에는 사과하지 않았다. 그런데 중앙위 폭력 사태를 보고 어떤 이유에서라도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나의) 의정 9년 세월이 다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엄청나게 울었다. 기자들에게 사진 찍힐까 봐 목욕탕 가서 울었다. 강기갑 하면 ‘호통’이었는데, 지금은 누구를 비판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당시 통진당 대표로 추대되면서 분당 사태를 막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는데.

‘경기동부’ 등 이런 정파들이 강자의 행패를 부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정파의 이익만을 위해 주먹을 움켜쥐고, 주먹 안에 있는 쌀 몇 톨을 놓지 않으려고 싸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12년) 8월15일 명동성당에서 묵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갑자기 ‘(경기동부가) 강자가 아니구나. 겉으로는 강자인 것처럼 맞섰지만 아니었구나’라는 깨달음이 왔다. 당시 전 국민이 경기동부를 ‘마귀 집단’ ‘종북 집단’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들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계속 나왔다. ‘(내가) 그들의 아픔과 외로움을 끌어안고 같이 눈물 흘리면서 당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는데’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 다음부터) 그들하고 대화하고 전화도 하고 했는데…. (그들의) 나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컸고, 탈당 엑소더스가 일어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분당 선언을 해야 하는 최고위원회 때 차마 분당 선언을 못 하겠더라.

진보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가 크다.

진보정의당이 창당되면서, 분당이 된 것이다. 많은 농민, 노동자들이 다시 (두 정당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과거에 대한 반성, 성찰 이런 게 전혀 없다. 진보의 궁극적 목표는 상생의 세상을 여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사람만 챙기고 있다. 진보는 분열한다는 역사적 명제를 (우리가) 두세 번 각인시킨 꼴이다. 그 책임 때문에 (나는) 여기(통진당)도 남아있을 수 없고 저기(진보정의당)도 들어갈 수 없다. (나는 정치에서) 내 역할을 했고, 이제 내 역할이 없으니까 고향으로 돌아와서 농민이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파란만장한 의정 생활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17대 국회 때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들어간 것도 기적이었다. 당시 농민운동을 하다가 집행유예를 받았다. 동지들은 모두 항소했는데, 나는 다른 투쟁을 하다가 항소 기일을 놓쳐서 1심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사면을 단행했고, 형이 확정되었던 나만 복권될 수 있었다. (2004년) 3월 초에 복권된 후 3월 말에 (비례대표로) 등록해 국회에 입성했다. 국회에 들어가자마자 단식 농성을 했다. 쌀 시장 개방 문제, 이라크 파병 문제로 (국회의원이 된 후) 처음으로 13일 동안 단식했다. 외통위에서 날치기 통과를 할 때 31일 동안 단식했다. 17대 때 단식일을 계산해보니까 80일이 넘더라.

이명박 정권 때 일명 ‘공중부양’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 상황이 어땠나?

2009년 1월, 미디어법·부자 감세·금산분리 완화 등 이른바 MB 악법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때 민주당이 우리(민노당)하고 같이 막았지만, 농성을 풀 때 우리하고 상의 한마디 없었다. 원혜영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가 박계동 당시 사무총장과 말을 다 맞추어놓고 농성을 풀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더라. 그래서 (국회 경위들과) 몸싸움이 일어난 거지. 이 와중에 사무총장실을 찾아가 ‘공중부양’이 나온거고. (몸싸움을 하다가) 손가락(오른손 중지)이 세 조각으로 부러졌다. 당시 깁스를 하고 싸웠다. 아직도 손가락이 시큰거린다.

이명박 정부를 평가한다면?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때 (국회 본청)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단식하고 있었다. 국회 경위들이 나를 들어서 (원내대표실로) 옮겨놓더라. 이대통령이 취임사를 할 때 훌륭한 대통령, 서민을 위한 대통령이 되어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다. (18대 때) 당선되고 나서도 마음이 어두웠다. 18대 국회는 17대보다 보수적으로 구성되었다. ‘17대에도 단식하면서 겨우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18대에는 죽는 일만 남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 직후 감사 인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새벽 5시30분쯤 라디오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뉴스가 나오더라. 차를 세워보니 삼천포 성당이었다. 성당에서 1시간 묵상을 하고, 바로 청와대로 올라가 단식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단식을 하면 ‘굶어 죽어버려라’ 하는 식이었다. 이때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는 단식을 하지 않겠다. 투쟁만이 살길이다’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명박 정부는 부자도 아닌 ‘재벌’을 위한 정부였다. 재벌 공화국을 만든 것이다. 이 정부는 ‘양극화’라는 불이 붙은 집에 기름을, 그것도 휘발유를 끼얹는 정치를 했다.

박근혜 새 정부에게 바라는 점은?

기본적으로 이명박 정권의 기조와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 대선에서 국민들이 이명박 정부의 책임을 박당선인에게 묻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선에서 이겼다. 그러나 대선 결과를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심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 현 정부에 대한 평가는 형편없다. 박근혜 새 정부의 최대 화두는 ‘양극화 해소’이다. (나의) 아버지는 아홉 살 때부터 머슴살이를 했지만 8남매를 전부 교육시켰다. 지금은 2~3명만 낳아도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에 해당하는 교육·의료·일자리 등의 분야에서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박당선인이 재벌 간담회 등에서 한 발언을 보면 ‘우선은 제대로 하지 않겠느냐’라는 기대를 해본다.

박당선인 주변에서는 ‘강기갑 농수산부장관설’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웃음)박당선인측에서 이와 관련해서 접촉해온 사실이 전혀 없다. (내가) 평생을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고, 이 분야를 잘 아는 것은 맞다. 그러나 (내가) 농업 분야와 관련해서는 강성 노선인 사람인데 여권에서 나를 찾겠나. 얼마 전 폭설로 마을 뒷산이 무너졌다. 이것을 복구하기 위해 빚을 내서 포클레인을 샀다. 당분간은 농사일에 전념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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