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이여, 빚 좀 나눠 갖자”
  • 조명진│유럽연합집행이사회 안보자문역 ()
  • 승인 2013.01.15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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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유로존 은행연합 창설에 팔 걷고 나서

유로존 남쪽에 위치한 대다수 국가의 올해 경제 전망은 여전히 어둡다. 하지만 서쪽에는 서광이 비치고 있다. 주인공은 아일랜드이다. 아일랜드가 연말쯤에는 구제 금융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남쪽 유럽 국가들과 달리 아일랜드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아일랜드는 지난해 다른 국가들과 달리 경기 침체에 빠지지 않았다. 노동 단가가 현저하게 낮아지면서 국제 경쟁력을 되찾았다. 이것은 외국 제조 기업과 서비스업체를 자국으로 유치하는 데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경제가 시나브로 회복하게 될 경우 아일랜드는 추가 구제 금융 없이 자생할 수 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함께한다. 영국 종합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러한 아일랜드의 희망사항은 쉽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아일랜드가 외국 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경제적·재정적으로 취약함을 드러낼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세계 경제 성장이 올해 주춤하게 된다면 수출 비중이 큰 아일랜드는 직격탄을 맞게 된다. 어떤 형태로든 경제적 후퇴가 생기면 긴축 정책을 펼치며 국채를 줄이려는 아일랜드의 목표 달성은 어렵게 된다.

또 다른 문제는 상황이 아일랜드의 계획대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2007년 아일랜드 국내총생산(GDP)의 25%에 불과했던 공공 부채가 올해는 1백20%를 상회할 것이 유력하다는 사실이다. 낮은 세율을 적용받는 다국적기업들이 GDP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공공 부채는 1백40%에 달한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아일랜드 정부의 계획이 어긋나게 되면 부채 부담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달할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유럽으로부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유이다. 게다가 국내 여론도 좋지 않다. 공적 부채의 3분의 1이 은행들을 구제하면서 발생했기 때문에 납세자들은 심기가 편할 리 없다. 부실 은행 문제에 대해서 아일랜드 정부도 ‘꿀 먹은 벙어리’나 다름없다. 2008년 금융 위기가 절정이던 시점에 은행 채권자들에게 무조건 워런티(보증서)를 발행했기 때문이다.

엔다 케니 아일랜드 총리(오른쪽 두 번째)가 1월8일 독일 기사당을 방문해 환담하고 있다. 무표정 정치인으로 유명한 케니 총리는 독일 방문 동안 미소를 짓고 다녀 아일랜드 국민을 놀라게 했다. ⓒ DPA 연합
메르켈 “아일랜드를 봐! 내 말이 맞잖아”

아일랜드의 경제 회복은 아일랜드만의 기쁨이 아니다. 유럽연합(EU)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도 정치적인 희소식이다. 구제 금융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제시한 긴축 재정과 구조조정이라는 처방전이 제대로 들어맞고 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사례는 올해 9월 총선을 앞둔 독일 유권자들에게 자신들의 세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다는 점을 확신시켜줄 수 있는 고무적인 사례이다.

기분 좋은 메르켈 총리가 아일랜드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그중 하나는 2010년에 아일랜드 정부가 자국 은행들의 자금을 보충하기 위해 사용한 채권(IOU)의 조건들을 완화해주는 것이다. 더 효과적인 조치도 있다. 유로존의 영구 구제 펀드인 ‘유럽 안정 메커니즘(ESM)’이 아일랜드 은행의 주식을 매입하도록 허용하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아일랜드의 국채 일부가 탕감되고, 은행의 잘못으로 인해 계속될지도 모를 공적 자금의 추가 지원도 피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들은 지난해 6월 유럽 지도자들이 은행과 정부 사이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합의한 사안의 구체적 실행 방법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이는 유로존 회복에도 도움을 주게 된다.

독일·핀란드 등 유로존 채권 국가 재무장관들은 그동안 “ESM은 새로운 구제 대상 국가가 나올 때만 가동할 수 있다”라고 말해왔다. 따라서 메르켈 총리가 선거를 앞둔 시점에 아일랜드를 위해서만 ESM 가동 원칙을 바꾸기는 어렵다. 다만, 유럽의 기관들은 아일랜드가 구제 금융을 위한 조건들을 성실히 이행하고 있기 때문에 선처를 베풀 수도 있다. 아일랜드 구제책이 실제 효과를 거두면서 독일과 유럽 경제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메르켈 총리가 모종의 대책을 취할 가능성이 작지 않은 이유이다. 유로존이 아직도 경기 침체에 허덕이는 상황인 만큼 긍정적인 소식은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에 배당된 6백80억 유로의 구제 금융은 2013년 말까지 주어진다. 물론 아일랜드는 2차 구제 금융을 받지 않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엔다 케니 아일랜드 총리는 자기네 부채의 4분의 1을 유럽연합이 맡아주기를 원하고 있다. 케니는 지난해 성탄절을 앞두고 “유럽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우리는 6월까지 문제 은행의 해결 과정에서 아일랜드 납세자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협상에 동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호재는 1월1일부터 유럽이사회 의장직을 아일랜드 총리가 맡게 되었다는 점이다. 유럽이사회 의장의 임기는 6개월이며 유럽연합(EU) 회원국이 돌아가며 맡는다. 케니는 의장직을 맡는 동안 EU 27개 회원 국가들 사이에 중요한 타협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의장직을 맡으며 아일랜드의 문제를 부각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2010년에 EU 회원국이 중앙은행들로부터 빌린 3백10억 유로를 상환하는 일이다. 아일랜드는 이 대출 비용을 10년간에 걸쳐 할부로 갚을 계획이다.

단기적으로는 서광이 보였지만 멀리 내다보면 그늘이 더 짙다. 올해부터 아일랜드 정부는 국영화된 은행들의 부채를 떠맡게 된다. 아일랜드는 바라는 것이 많다. 부채 상환 기간을 연장해주고, 이자율도 낮춰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중앙은행(ECB)은 반대하고 있다. ECB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는 케니가 지난해 EU 정상회담 석상에서 이 주제를 거론할 때마다 무시하는 반응을 보였다. ECB로서는 “문제가 있는 유로존 회원국에 직접적인 재정 지원을 한다”는 비난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ECB가 바라는 해결책은 7천억 유로 규모의 펀드인 ESM이 아일랜드의 부채를 인도받는 것이다. ESM이 아일랜드 금융 부문의 모든 부채와 관련된 리스크를 떠맡는다는 것은 결국 유럽의 납세자들이 위험을 함께 지는 것을 뜻한다.

케니는 짧은 6개월의 의장 임기 동안 ‘유로존 은행연합(Banking Union)’ 출범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입장이다. 은행연합이 출범해 유로존 은행들에 대한 공동 감독 제도가 도입되면 구제 금융 펀드인 ESM과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을 통해 역내 부실 은행에 대한 직접 지원이 가능해진다. 여기에는 메르켈 총리와 독일 의회의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독일이 거절한다면, 아일랜드는 올가을에 두 번째 구제 금융을 받아야 할 상황에 놓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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