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며느리 봤더니 시애비를 동무라 하네”
  • 김연갑│(사)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
  • 승인 2013.01.15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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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 ‘본조 아리랑’을 아시나요

<아리랑>은 부르는 사람, 향수하는 사람들에 의한 진실의 음역(音域)으로, 한국인에 의해 민족적 정조(情調)를 표현하는 노래로 불려 세계에 한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그래서 ‘<아리랑>은 또 하나의 한국(Arirang, the name of Korea)’으로 표현된다. 이 <아리랑>이 세계로부터 인정받았다. 지난해 12월5일, 프랑스 유네스코 본부에서 개최된 제7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40여 개국 위원들이 다음과 같은 평가로 아리랑을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한 것이다.

베트남 호치민 국립대학교 한국어과 학생들이 아리랑 교육을 받고 자신이 쓴 문구를 자랑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근현대사 기록하듯 재창조된 노랫말

“<아리랑>은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되었다.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여 주고, 사회적 단결을 제고하는 역할을 해왔다. (중략) 아리랑의 다양성이 이번 등재에 따라 무형 유산 전반의 가시성 향상과 대화 증진, 문화 다양성 및 인간 창의성의 제고로 이어질 것이다.”

유네스코의 이 심의 평가는 우리 <아리랑>의 속성을 잘 파악한 결과로, 특히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지속적 재창조’라는 표현은 어느 나라 어떤 노래와도 변별되는 특징을 짚어낸 탁견이다. <아리랑>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격동의 순간마다 시대의 노래로서 저항하고, 때로는 비아냥거리고, 또 때로는 상생을 부르짖으며 불린 노래라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적으로 거칠게 배열한 다음의 사설을 통해 확인된다. ‘1894년 정월 고종이 민비와 창덕궁에서 <아리랑>을 즐겼다(<매천야록>)’라는 기록으로부터, 1935년 조선총독부가 <아리랑>을 훼절시키기 위해 전국적으로 조사해 발행한 <조선민요> 그리고 광복 이후 1990년대까지의 각 <아리랑>에 관한 사설들은 <아리랑>이 곧 한국 근현대사의 기록으로서 지속되었다는 실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저항과 대동과 상생을 지향하며 부른 창조적인 노래임을 알 수 있게 한다.

● 1890~1920년대 <아리랑>

문경 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문경 아리랑)

인천 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 왜인 등살에 나는 못살겠네(조선 유행 아리랑)

구약통 납날개 양총을 메고 / 벌업산 대전에 승전을 했네(의병 아리랑)

할미성 꼭대기 진(陣)을 치고 / 왜병정(倭兵丁) 오기만 기다린다

한일 간 협약이 누구 탓이냐 / 우리네 동포의 미개 때문 아닌가


● 1930~1945년 <아리랑>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 백두산 고개를 넘어간다(북간도 아리랑)

문경 새재는 몇 구비냐 /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진도 아리랑)

우리네 부모가 날 찾으시던 / 광복군 갔다고 말 전해 주소(광복군 아리랑)

광풍이 불어요 광풍이 불어요 / 삼천만 가심에 광풍이 불어요(밀양 아리랑)


● 1945~1950년대 <아리랑>

36년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꽃은 / 을유년 8월15일 만발했네(정선 아리랑)

진보 민주주의라고 며느리 봤더니 / 시애비 보고서 동무라 하네(본조 아리랑)

사발그릇이 깨어지면 두세 조각이 나는데 / 38선이 깨어지면 한 덩어리

된다네(정선 아리랑)

우리나 님은요 날 그려 울고 / 전쟁판 요내들 임 그려 운다(음탄(音彈) 아리랑)


● 1960~1990년대 <아리랑>

공장이 공단이 인천이 들썩 / 노동자 단결하니 전국이 들썩(노동자 이리랑)

땅을 울려라 하늘을 울려라 / 해방의 밝은 빛 비추어내라(해방의 아리랑)

산이 막혔나 물이 막혔나 / 천년을 같이 살 백성인데   

복된 내일을 기약하며 / 칠천만 하나로 뭉쳐 보세(남북 신아리랑)

모였네 모였네 여기 다 모였네 / 우리는 통일둥이 모두가 하나라네(통일 아리랑)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 <아리랑>은 우리 근현대사와 함께한 역사의 증언자이다. 그런데 <아리랑>의 이러한 지속과 변이의 추동력은 1926년 10월1일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된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에서 확보된 것이다. 영화 <아리랑>은 국경 지역 회령에서 태어난 나운규가 남쪽에서 품팔이 온 철도 노동자들의 참상을 보고, 일제와 지주로부터 논 잃고 밭 잃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넘어가는 민족적 모순을 가슴에 담고,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옥살이했던 투혼의 결정체이다. 구한말로부터 누적된 내적 모순과 극도의 착취를 자행한 일제로부터 살길을 찾아 고향 산천을 떠나는 참상을 그린 내용과 그 주제가 <아리랑>으로 하여금 개봉 이후 5년여 동안 전국을 몇 바퀴나 돌고, 일본과 중국의 동포들을 웃기고 울리게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1952년 한국전쟁 중 대구 만경관 극장 상영을 끝으로 그 존재를 감추었다. 그런데 전쟁의 상흔일까? 영화 <아리랑>은 필름도, 포스터도, 시나리오도 남기지 않았다. 다만 나운규 생존 당시인 1930년에 출간된 <영화 소설 아리랑>이 남아 있을 뿐이다.


1926년 10월1일 서울 단성사 개봉 영화 의 성공에 힘입어 (박문서관, 문일 편)이 발행되었다. 한국 문학사에서 영화소설이라는 장르의 첫 작품은 이 (제1편)이다. 이 책에는 스틸컷 7편과 주제가 악보가 수록되었다. 영화 제2편(1929년 개봉)도 영화소설로 발행되었다. 2편의 주제가도 같은 선율이다. ⓒ 김연갑 제공
지난해 12월6일 뉴스를 통해 명창 이춘희 선생이 유네스코 총회장에서 등재가 확정된 <아리랑>을 불러 격찬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로 그 <아리랑>이 본조 아리랑이다. 그런데 등재 이후 여론에서 거론되는 것은 정선·밀양·진도·문경 아리랑이고, 이 본조 아리랑은 빠져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동안 가깝게 있고 흔하다고 방치했다가 중국이 <아리랑>을 자국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사태로 인해 이번 인류문화유산 등재에 이르기는 했지만, 이 본조 아리랑을 계속 방치한다면 중국에 자국 문화재 지정의 명분을 강화시켜주거나 그 활용도를 높여주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중국이 2009년에 일반 아리랑을 ‘성급(省級)’으로 지정했고, 2011년에 이 본조 아리랑을 ‘국가급’으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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