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식 준비할까 장례식 준비할까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3.01.2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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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병 악화로 리더십 흔들

베네수엘라 정부는 요즘 두 가지 일로 바쁘다. 와병 중인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취임식 준비를 다시 해야 하는 데다 혹시 생길지 모를 그의 장례식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14년째 베네수엘라를 통치하고 있는 차베스는 지난해 10월 6년 임기의 3선 대통령이 되었다. 원래 1월10일에 취임식이 예정되었지만 암 수술에 따른 후유증으로 아직 쿠바의 병실에 누워 있는 상태이다. 그는 2011년 6월 암 진단을 받고 쿠바에서 네 번의 수술을 받았다. 정부는 여러 차례 보도자료를 내며 그의 건강이 호전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30일 차베스가 암 수술 이후 합병증으로 중태에 빠져 취임식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아직 쿠바 수도 아바나의 병상에서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망설이 나돌 만큼 위급한 상태로 짐작된다.

베네수엘라 헌법은 차베스의 유고에 대비해 몇 가지 규정을 두고 있다. 차베스가 죽으면 대권은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에게 승계된다. 다만 권력을 이양받은 부통령은 30일 내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새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 차베스가 사망하지는 않았지만, 취임식을 열지 못할 경우 국회의장 디오스다도 카베요가 권력을 승계한다. 카베요는 임시 대통령으로 국정을 수행하면서 90일간 나라를 통치할 수 있다. 차베스의 회복이 늦어질 경우 임시 대통령의 재임 기간을 90일간 재연장할 수 있다. 차베스가 영구적으로 궐위(어떤 직위나 관직이 비는 일)되면 국회의장은 지체 없이 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해야 한다.

지금 베네수엘라를 관통하는 정치 이념은 ‘차비스모(Chavismo)’이다. 차베스가 주도해온 베네수엘라 개조 운동 또는 ‘차베스주의’로 풀이할 수 있다. 차베스가 취임식도 하지 못할 정도로 중태인데도 베네수엘라에는 차비스모 분위기가 넘친다. 그가 건강할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은 지지자가 수도 카라카스 거리를 가득 메운 채 차베스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에 대한 지지와 충성은, 빈곤을 절반으로 줄이고 빈부 격차를 좁힌 차베스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만든 결과물이다.

그는 대중 친화적인 지도자로 민중들에게 강하게 어필하면서 강력한 통치력을 구사했다. 석유 수출로 생긴 거대한 자본으로 베네수엘라는 강력한 오일 사회주의로 재탄생되었다. 이웃한 쿠바나 볼리비아가 베네수엘라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볼 정도였다. 정치적 미래도 대비했다. 차베스주의를 따르는 젊은 정치 지도자들을 대거 양성해 앞으로 베네수엘라를 이끌어갈 정치적 자산을 마련했다. 이 새로운 엘리트 그룹 때문에 차베스 이후에도 차베스주의를 꽃피울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고 있다.

그렇다면 차베스가 사라진 이후에도 이 모멘텀은 이어질 수 있을까? 차베스의 카리스마가 없는 ‘포스트 차베스’ 시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차베스는 지난해 10월 열린 대선에서 3선 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현재 이 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 지도자이다. 문제는 국민들이 차베스의 유산을 평생 수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다수 분석가는 차베스의 신화가 빠른 시간 내에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틴케르 살라스 라틴아메리카 대학 교수는 “차베스만이 향유한 개인적 카리스마를 다른 정치인이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은 베네수엘라의 비극이다”라고 말했다. 차베스는 극빈층 중심의 정책을 폈지만, 오히려 빈부 격차가 커졌고 계층 간 갈등이 깊어졌다는 평가가 따른다. 이 불평등감을 해소하는 것이 차비스모의 과제인데, 이 어려운 문제를 차베스 아닌 다른 인물이 풀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집권 4기 정부가 1월10일(현지 시각) 암 투병 중인 차베스 대통령의 취임선서 없이 출범했다. ⓒ AP 연합
남미 좌파 블록 위기로 확산될 수도

차베스는 네 번째 수술을 받기 위해 쿠바로 떠나기 전, 지지자들에게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경우 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를 지지해달라고 당부했다. 이 발언으로 마두로의 입지는 강화되었지만 동시에 당내 권력 투쟁의 불씨도 타올랐다. 차베스가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국회의장 디오스다도 카베요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부통령과 국회의장 간에 벌써부터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가 새나온다. 카베요는 벌써부터 대통령궁으로 이주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마두로와의 대립각을 세웠다. 마두로는 차베스의 신임에도 불구하고 당내 기반이 약해 권력 투쟁에서 밀리는 모습이다.

베네수엘라를 누가 장악할 것이냐를 둘러싼 정정 불안이 해소되려면 야당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야당이 세를 규합해 차베스 대체 세력으로 부상할 때까지 이 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거 차베스 집권 초기에 있었던 파업이나 쿠데타와 같은 사회 불안이 재연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반대로 차베스의 후광에 희망을 거는 국민도 공존하는 베네수엘라이다.

포스트 차베스를 열어젖힐 차기 지도자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은 지난해 10월 대선에서 차베스의 라이벌로 등장했던 엔리케 카프릴레스이다. 그는 차베스가 추진했던 사회 개혁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이 때문에 차베스 지지 세력으로부터도 좋은 점수를 얻고 있다. 물론 그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엔리케 드라이브’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국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세력이 친(親)차베스이기 때문이다.

차베스 유고는 베네수엘라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남미의 좌파 블록에도 변화가 올 수 있다. 차베스는 쿠바에 할인된 가격으로 석유를 공급하고 중남미의 좌파 정부들과 유대를 돈독히 해왔다. 하지만 볼리바르 동맹 등 미국에 대항하는 좌파 대중주의 정권들이 차베스가 제공하는 베네수엘라의 오일 달러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동맹의 구심력은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

차비스모의 미래는 앞으로 과도정부가 차베스의 용태 또는 그의 회복 여부에 관한 진실을 숨기거나, 부통령 마두로 체제가 잘못될 경우 가장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랜드연구소의 정치분석가 앤젤 라바사는 “베네수엘라의 장래는 국민들에게 얼마나 진실을 공개하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평가했다.

선거 실시를 둘러싼 논쟁도 차비스모의 미래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야당은 차베스가 가까운 장래에 직무에 복귀하지 못할 경우 대통령 선거를 즉각 실시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마두로 부통령측은 차베스가 죽지만 않는다면 쿠바의 병상까지 대법관들을 보내 병상 취임 선서를 해서라도 차베스 시대를 연장하려 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권력 공백기에 친차베스측이 어떤 카드를 꺼내드느냐에 따라 베네수엘라의 정치 지형은 다시 출렁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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