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스런 금융사들 “우린 아직 배고프다”
  • 조명진│유럽연합집행이사회 안보자문역 ()
  • 승인 2013.01.29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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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클레이스·HSBC·AIG 등 줄줄이 돈세탁 혐의

2008년 금융 위기에서 천문학적 손실을 내고도 운 좋게 구제된 금융회사들, 이들의 파행과 전횡이 도를 넘고 있다. 금융 위기를 초래한 미국 금융기관에 뒤질세라 영국에서는 바클레이스 은행이 금리 조작 추문에 휩싸이더니 이번에는 유럽 최대의 은행인 HSBC가 도마에 올랐다. HSBC는 검은돈을 세탁해준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해 7월 미국 상원 보고서는 “HSBC가 멕시코, 이란, 케이먼 군도,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등으로부터 불법적인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 자금을 이동시켜주었다”라고 비판했다. 이 보고서는 HSBC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드러난 사실도 있었다. HSBC 멕시코 지사는 2007~08년 70억 달러의 자금을 미국 지점으로 옮겼다. 그 자금들 중에는 마약 거래 대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해 12월12일 래니 브루어 미국 법무부 차관보가 돈세탁 혐의를 받고 있는 HSBC의 벌금형에 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AP연합
처벌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HSBC

HSBC는 돈세탁을 금지하는 미국 연방법을 위반한 혐의로 벌금뿐만 아니라 형사처분까지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런데 검찰과 HSBC가 정식 고소를 피하는 기소유예(deferred prosecution) 방식으로 처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시가총액 기준으로 볼 때 유럽 최대 은행인 HSBC는 지난해 12월11일 미국 뉴욕 법원에서 위반 사실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 등의 의무를 이행하는 조건으로 기소유예를 받기로 했다. 기소유예를 받게 되면 기소에 따른 영업정지의 리스크 없이 벌금형으로만 해결이 가능하다.

스튜어트 걸리버 HSBC 최고경영자는 “미국 상원의 보고서는 HSBC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고, 영업 실적에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타격을 주었다”라고 말했다. HSBC는 최근 수많은 직원이 회사를 떠나야 했는데 그 원인 제공자로 정부를 에둘러 지목하는 발언도 걸리버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로이터 통신은 “HSBC 내에서는 여전히 돈세탁이 지속되고 있고, 은행 간부들은 문제를 찾아내기보다 돈세탁 관련 서류들을 없애는 데 더 신경을 쓰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거대 은행들의 위반 행위가 속속 발견되지만 이럴수록 처벌하는 쪽도 골치가 아프다. 최근 미국 은행들의 경우 돈세탁과 관련해 위반하더라도 해외 은행들에 비교하면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있다. 부과되는 벌금부터가 다르다. 자국 은행과 해외 은행을 재는 미국 사법부의 ‘정의의 추’는 지금 고무줄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자본 전략가인 샤 질라니 씨는 미국 투자 정보 매체 <머니 모닝>에 ‘너무 커서 감옥에 보낼 수 없다(too big to jail)’라는 글을 기고했다. 미국 연방정부가 HSBC를 기소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은행 규제 기관들이나, 법의 집행에서는 서슬 퍼렇다는 미국 법무부조차 유럽 최대 은행을 기소하는 데 주저했다. 파급 효과를 두려워해 스스로 형사 처벌하는 것을 거부했다.

HSBC는 벌금 19억 달러를 내게 되었다. 책임자들의 형사처분은 없다. 이제 HSBC는 불법적인 자금 세탁에 대한 죗값 치르기를 마무리한 셈이다. 이번 HSBC 사건은 ‘너무 커서 망하지 않는다’는 미국 금융기관들의 생리를 파헤친 앤드류 소르킨의 대마불사 주장이 사실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 질라니 씨 역시 “세계 대형 금융기관들은 한마디로 너무 막강하다. 커넥션도 좋고 조직력도 강하고 돈이 많아 함부로 도전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라고 지적했다.

모리스 그린버그 전 AIG CEO는 2008년 구제금융 조건이 부당했다며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 AP연합
목숨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AIG

HSBC의 벌금 액수는 기록을 갱신했다. 지난해 6월 ING 은행이 제재 대상인 쿠바와 이란 은행들을 대신해 불법적으로 자금을 이동시킨 혐의로 벌금 6억1천9백만 달러를 낸 적이 있다. 바클레이스가 런던 은행 간 거래 금리(Libor)를 조작해 벌금 4억5천만 달러를 낸 데 이어 이번 HSBC 벌금 부과는 영국 은행의 명성에 또 한 번 먹칠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게다가 탈세자로 여겨지는 그리스인 2천여 명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라가르드 명단(스위스 거액 예금자 명단)의 출처도 스위스의 HSBC 지점이었다.

미국 보험사 AIG도 도마 위에 올랐다. 1천8백2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은 AIG는 최근 미국 정부와 소송을 벌이려고 하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취소했다. 계열사인 스타인터내셔널(Starr International)의 구조조정에 대해 정부가 고리의 금리를 적용해 2백50억 달러의 피해를 입었으니 보상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금융 위기 당시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인 AIG에게는 단 한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파산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예산, 즉 납세자들의 세금으로 구제받은 AIG가 이제는 정부를 상대로 법정 소송을 벌였다는 점을 두고 언론과 여론은 맹공을 퍼부었다.

사건은 이랬다. 스타인터내셔널은 AIG의 창업자인 전 CEO 행크 그린버그가 소유하고 있다. 모리스 그린버그가 운영하는 스타인터내셔널은 정부가 구제금융에 대해 높은 이자를 부과했고 아울러 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 회사 지분 80%를 취득한 것은 사유재산권 침해라는 이유로 2백50억 달러의 배상을 요구했다. 그린버그는 AIG가 스타인터내셔널의 소송에 동참할 것을 원했는데, AIG도 실익을 저울질하고 있었지만 결국 비난의 십자포화를 맞고 물러서야 했다.

AIG가 구제를 받은 덕분에 재미를 본 금융기관들은 도이치뱅크를 포함한 대형 외국 은행들과 미국의 JP 모간체이스, 뱅크 오브 어메리카 그리고 골드만삭스였다. 특히 골드만삭스는 미국증권감독원(SEC)으로부터 사기 혐의로 기소된 적이 있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고, 그리스 정부의 회계 분식을 도와준 전력이 있는데도 아무런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HSBC·AIG와 같은 대형 금융기관들의 전횡과 탈법에 대해 벌금만 때리는 미온적인 처벌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 대학 교수는 금융 위기를 두고 “경제는 시장과 정부의 역할 사이에 균형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함께 균형을 잃었다”고 진단했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타개하는 것은 바로 이 균형을 찾는 작업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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