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결혼식까지 며칠만이라도 더 살고 싶소”
  • 노진섭·엄민우 기자·유호 인턴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3.02.05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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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환자부터 사지 마비 발레리나까지…그들이 그토록 잡고 싶어 하는 삶의 자락

독자들이 이 기사를 접할 즈음 장성국씨(가명·61)는 이 세상에 없을지 모른다. 그는 일주일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서울시북부병원의 임종 병동(호스피스 병동)에 누워 있는 그는 깡말랐다.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지 1년도 안 되는 병치레 기간에 80kg이던 몸무게가 60kg대로 줄었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은 황달기가 짙어 누런빛이었고, 복수가 찬 배는 불룩했다. 입으로 음식을 넘기지 못해 혈관주사로 영양분을 섭취하며 연명했다. 소화 기능이 떨어진 탓인지 그 영양분마저 게워냈다.

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이따금 정신이 혼미해진다. 장씨는 대화 도중에 가끔 정신을 잃어 자리에 누웠다가 일어나 앉기를 반복했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구걸해서라도 조금만 더 살고 싶어 했다. 장씨는 “며칠만 더 살고 싶소. 이번 주말에 큰아들이 결혼하는데 그때까지만이라도…”라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 곁에 있던 아내에게 아들과 예비 며느리의 사진을 달라고 했다. 사진을 보는 그의 표정은 밝았지만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2011년 말 장씨는 동네 병원을 찾았다. 평소보다 피곤하고 낯빛이 검게 변한 것이 몇 달째 마음에 걸렸었다. 의사는 간수치가 높게 나타나니 대학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급한 일을 처리하고 지난해 4월 서울에 있는 한 대학병원에 갔다.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그는 “그저 피곤할 뿐 전혀 아프지 않았다. 얼굴이 검게 변한 것은 주로 야외에서 일하느라 볕에 그을린 탓으로 알았다. 그런데 진단을 받고 보니 손톱만큼만 뺀 나머지 간에 암세포가 퍼져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수개월 동안 일곱 차례에 걸쳐 항암 치료를 받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뾰족한 방법이 없는 그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루하루 다가오는 죽음을 맞는 일뿐이다.

평생 서울 외곽에서 가축 농장을 운영하며 식솔을 먹였다. 그 지역이 주택개발지로 묶이면서 장씨는 2년 전 그 농장을 지방으로 옮겼다. 1년 동안 축사를 직접 만들었고, 염소 50마리를 사다 키웠다. 몇 달 만에 구제역이 돌아 전부 땅에 묻었다. 다시 한두 마리씩 키워 50마리로 늘렸다. 그는 “아들만 둘인데, 그 애들은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 아내와 함께 서울에 남았다. 나만 지방에 가서 농장을 시작했다. 농장이 자리 잡으면 식구 모두 농장으로 옮겨 함께 살 계획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염소를 치면서 자투리 텃밭에 주말농장을 꾸몄다. 하루 30만~40만원 벌이였다. 그 돈의 일부를 주변 독거노인을 위해 쓸 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 자신의 처지도 넉넉하지 않으면서 늘 베풀었다. 아내가 못마땅해 하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천성이었다. 겨우 자리를 잡아가자 덜컥 병에 걸렸다. 그 무렵 큰아들이 신붓감을 데리고 집에 왔다.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서둘러 결혼을 치르려고 잡은 날이 올 2월 초이다. 장씨는 그 결혼식에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참석하고 싶다. 그의 병실에는 예비 며느리가 장만해준 새 양복이 걸려 있다. 그렇지만 몰골은 하루가 다르게 앙상해지고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통증이 심해졌다. 그럼에도 삶의 자락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장씨는 “며칠 후면 큰아들이 결혼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 결혼식을 보고 싶다. 그런데 내 상태가 좋지 않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하곤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건강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심정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온다고 해서 거창한 삶의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족들이 모여 오순도순 살고 싶을 뿐이다. 그 소박한 소망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안다. 장씨는 아들을 포함한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생을 살면서 타인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남을 미워하면 할수록 그것이 나를 평생 쫓아다닌다”라고 짧게 말을 뱉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또 “함께 좋은 추억을 만들지 못해 안타깝다”는 말을 예비 며느리에게 남겼다.

아들과 예비 며느리의 사진을 보는 호스피스 병실의 환자는 며칠 남은 아들의 결혼식 날까지만이라도 살기를 바랐다. ⓒ 서울시북부병원
“살고 싶은 사람에게 자살은 사치”

지긋지긋한 삶을 팽개치고 싶은 심정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지만 억울해서라도 살겠다고 이를 악문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어마어마한 영화를 보자는 것이 아니다. 장씨처럼 사소한 것에 희망을 품고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자살이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최근 14세 소녀가 가정불화에 염증을 느껴 목을 맸고, 부모가 성전환 수술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집에 불을 질러 자살을 시도했던 대학생도 있다. 하루 평균 40명 이상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나라, 한국의 자살 사망자는 1만5천명을 넘었다.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의 사망 원인 1위(32%)가 자살이라는 통계는 부끄럽다.

오죽하면 스스로 삶의 자락을 놓을까? 그렇지만 일각에서는 생명 경시 풍조를 우려한다. 중장년층은 물론, 젊은 층의 자살도 증가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1년 한국의 사망 원인 통계를 보면, 10~20대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 10대에서는 학교 성적과 진학 문제가, 20대에서는 경제적 이유가 자살의 첫 번째 원인으로 꼽힌다. 그런데 돈이 많은 사람의 자살 시도도 매년 늘어났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소득 상위 10%에 해당하는 사람의 자살 시도 건수는 2011년 기준 4백7건으로 2008년의 2백93건에 비해 3년 새 38.9%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인의 자살도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얼마 전 야구선수 출신 조성민씨가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그의 전 아내였던 고 최진실씨와 그녀의 남동생 죽음에 이은 비보였다. 어린 자녀 둘만 남았다. 이 소식을 접한 대다수 일반인의 반응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는 일’이라는 것으로 모아졌다. 지난 몇 년간에 걸쳐 기업의 총수와 유명인들이 스스로 삶을 버렸다. 세간에는 ‘돈도 명예도 있는 사람이 왜 그랬을까’라는 반응이 저절로 나왔다.

자살한 사람으로서는 나름으로 말 못할 속사정이 있겠지만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서 고민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 주변에는 팍팍한 삶을 떼지 못하고 모질게 목숨을 이어가는 서민이 많다. 한때 자살을 시도했던 이 아무개씨는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목숨을 버리려고 했던 내가 부끄럽다. 돈 몇백만 원이 없어서 대학에 못 가는 일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50년을 살면서 나는, 어려움을 견디면서 잡초처럼 풀뿌리처럼 사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의 자살 충동은 사치로 보였을 것이다”라며 삶의 의미를 되새겼다.

두 번의 심장 수술을 받은 후,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여생을 보낼 것이라는 김기호씨가 손으로 몸을 짚어가며 수술받을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 시사저널 전영기
세 번째 심장으로 사는 70대 노인의 희망

한 번도 견디기 어려운 심장 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면서도 삶을 이어가는 70대 노인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행동을 더욱 이해하지 못한다. 부산에 사는 김기호씨(79)는 1994년 어느 날 오른손이 조금 떨렸다. 날이 갈수록 증세가 심해져서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가슴 통증도 찾아왔다. 그러나 아들 결혼식을 치러야 했고, 하던 일을 마무리 짓느라 수술 시기를 놓쳤다. 2000년 숨 쉬기가 곤란해 잠을 설칠 정도로 악화된 후에야 부산대병원을 찾았다. 김씨는 “심장이 고장 났는데, 지방 병원에서는 고칠 수 없으니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답을 들었다. 에둘러 한 말이지만, 결국 가망 없다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보라는 지인의 권유를 받고 서울로 향했다. 그 병원에서도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약 5년간 약물 치료를 받았지만 심부전증은 말기로 치달았다. 그러나 김씨는 삶을 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그에게 병원은 인공 심장 보조 장치 수술을 제안했다. 그 기계는 혈액을 뿜어내는 심장의 역할 일부를 대신할 ‘인공 펌프’이다. 김씨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수술 아니라 더한 것도 할 판이었다. 그래서 국내 최초로 그 기계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이 잘못되면 의대에 시신을 기증할 생각까지 했다”고 당시의 절박했던 심정을 털어놓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 기계를 달고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언제든지 고장 날 수 있는 기계라는 한계가 있고, 몸에 배터리를 휴대하고 다녀야 하는 등 생활 자체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기계로 생명을 오래 유지하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남은 방법은 다른 사람의 심장을 이식받는 일이었다. 심장 이식을 신청했지만, 심장 이식 대기자만 수백 명이었다. 1년 반을 기다린 끝에 대구에 있는 영남대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뇌출혈로 뇌사 판정을 받은 40대 여성의 심장이 김씨에게 적합하다는 판정이 나왔다는 것이다. 2001년 11월 김씨는 수술을 받았다. 그는 “두 번의 심장 수술을 받았으니 세 번째 심장으로 세 번째 인생을 사는 셈이다. 자식들을 모두 시집·장가 보내서 손주까지 보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다. 죽을 때까지 남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이 많다”라고 말했다.

2003년 부산심장장애인협회를 만들어 심장병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시작했다. 2006년에는 보건복지부를 찾아가 심장질환 예방 대책을 마련하라며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뇌경색이 찾아왔다. 약물 치료를 받고 많이 좋아졌지만 그의 다리와 팔에 마비 증세가 남아 있다. 허리는 꼿꼿하지만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오래 걸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일주일에 몇 번씩 사무실로 출퇴근한다. 장애인고용증진협회 회장으로서 심장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주는 일을 한다. 그런 노력에 대한 평가를 받은 그는, 지난해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하루에도 한 움큼의 약을 먹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3개월에 한 번씩 서울에 올라와 병원 검사도 받아야 한다. 그의 심장을 두 차례 수술했던 장병철 세브란스병원 심장외과 교수는 “삶의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면 심장 보조 장치의 전기선을 빼거나 약을 먹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씨는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운동도 하고, 식사도 예전보다 잘 하면서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해서 지금까지 10여 년 동안 건강하게 살고 있다. 사실 심장 이식을 받은 사람의 절반은 10년 이내에 이런저런 이유로 사망한다”라고 설명했다.

교통사고로 사지 마비 상태가 된 무용가 출신 김형희씨는 미술치료사가 된 후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웃음을 잃지 않는다. ⓒ 시사저널 이종현
노숙자에서 기부하는 삶 찾은 트럭 운전사

한번 노숙 생활에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다. 삶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동기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재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화물차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김기수씨(가명·51)는 노숙 생활 5년 만에 자립에 성공했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고, 서울의 한 4년제 대학을 졸업해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운수업, 학원, 호텔까지 확장할 정도로 사업 수완이 좋았다. 사업에 욕심이 과했던 탓일까? 사업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고, 아내와 이혼하는 시련을 겪었다. 그 여파는 10년 동안 그를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했다. 친인척마저 등을 돌리자 그는 지하철과 한강에서 몸을 던지는 등 대여섯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끈질긴 운명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자 자포자기 심정으로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노숙하면서도 먹기 위해 일감을 찾았지만, 삶의 희망과 동기가 없으니 진중하게 일하지는 못했다. 서울역 광장에서 술로 허송세월하는 날이 늘었다. 활발한 성격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바뀌었다. 어느 날 다른 사람과 싸우면서 병원에 입원까지 했는데, 그때 노숙자자활센터를 소개받았다. 김씨는 “노숙 생활 5년을 마감하고 지난해 11월부터 센터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 센터가 삶의 동기가 되었다. 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사람을 나무라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늘 용기를 주려고 했다. 사람으로서 인정받는 느낌을 받았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술을 끊었고 안정을 되찾았다. 다시 일자리를 찾은 것이 지금의 화물차 운전이다”라고 말했다.

열심히 일해서 받은 첫 월급의 절반을 센터에 기부했다. 또 회사에서 모범사원으로 선정되어 받은 상금과 상품도 센터에 주었다. 그는 “돈 때문에 가족과 친구 모두를 잃은 나로서는, 돈을 또 모으고 싶지 않다. 일하기 싫어했던 나는 ‘물질이 없어 고통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는 한 신부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세상에 미련이나 욕심이 없다. 힘든 시간을 거쳤고, 지금은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되찾은 것에 만족한다. 내가 필요한 곳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인생에는 혼자가 아닌 ‘우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라며 사는 의미를 강조했다.

“중증 장애인 시설에서 하루만 지내보라”

교통사고로 사지 마비가 된 여대생이 미술치료사가 되어 제2의 삶을 산다. 그 여대생의 이야기는 그의 나이 스물셋이던 1992년 어느 날부터 시작된다. 김형희씨(41)는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다. 무용과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당시 성균관대 무용과 4학년이던 그는 친구가 차로 집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해서 그 차에 올랐다. 운전면허를 딴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친구의 운전 솜씨는 불안했다. 언덕 넘어 내리막길에서 차가 흔들렸고, 당황한 친구는 브레이크를 밟는다는 것이 실수로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는 중앙분리대를 넘어 공중으로 치솟았다. 정신을 잃었고, 정신을 차린 후에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길을 지나던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 목뼈가 손상되어 얼굴 외에는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11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걸을 수 없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겹쳐서 다가온 악재는 절망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항생제 부작용으로 몸에 물집이 생겼다. 사망률이 60%까지 이르는 스티브존슨병이었다. 등에서 시작한 물집은 온몸으로 퍼졌다. 감각이 없는 몸이 느낄 정도로 통증은 대단했다.

오랜 치료로 조금씩 호전되었다. 어느 날 그는 폐를 촬영하는 기계의 렌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의사는 그의 부모에게 거울을 보여주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사고 후 자신의 모습은 무용과 여대생이 아니었다. 화상을 입은 듯 검은 몸과 빡빡 민 머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퇴원하고 집으로 왔다. 지체장애 1급이라는 장애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종일 누워서 숨만 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자신이 서러웠다. 부모 앞에서는 차마 눈물을 보일 수 없어 밤마다 천장을 보고 울었다.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김씨는 “솔직히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방법이 없었다. 죽으려면 누군가 휠체어를 계단이나 내리막길에서 밀어주거나 약을 사다 줘야 했기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며칠을 계속 울고 나니 오기가 생겼다. 병원에서 알게 된 지인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을 움직이는 훈련 삼아 한 것이다. 그는 “우울하고 힘들 때 도화지에 무용수를 그리기 시작했다. 팔 힘을 키운다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집중하다 보니 2~3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그전에는 우울함이 가득했지만 그림을 그린 이후로는 우울하지도 않았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림을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당시 PC통신 동호회를 통해 그림을 가르쳐줄 사람을 만났다. 그 친구를 일주일에 한 번 만나 그림을 배우고, 전시회도 구경했다. 걷지는 못하지만 손을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부터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그의 그림 실력이 쌓였다. 처음에는 붓을 손에 묶어 훈련했던 그는 개인전을 두 번이나 연 전문 화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기로 했다. 그림을 그리며 스스로 심리 치료의 효과를 본 그는 미술치료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미술치료를 공부했고, 차의과대학교 임상미술치료전공 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조기 졸업했다. 전문 미술치료사가 된 김씨는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를 만들어 힘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김씨는 “나는 장애인이라는 생각에 다른 사람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다른 장애인들도 마찬가지다. 신체장애가 존재감까지 떨어뜨린 것이다. 장애인은 존재감이 약해 표현을 잘 못하고 불이익도 많이 당하는데, 그림 치료로 존재감을 회복시켜줄 수 있다. 이는 비장애인도 마찬가지다”라고 그림 치료의 효과를 설명했다.

발레리나에서 미술치료사가 된 김씨의 삶은 영웅담이 아니다. 평범한 여대생이 어떻게 고난을 딛고 자신의 삶을 개척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김씨는 “자신이 너무 불행하고 희망이 없어서 삶을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중증 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시설에서 단 하루만 지내볼 것을 권하고 싶다. 꼼짝도 하지 못하는 신체를 가졌지만 그들이 저마다 마음속에 꿈이나 희망을 하나씩 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제안했다.

자동차 디자이너 꿈 품은 10대 암 투병 소년

중학교 3학년인 오정석군(15)의 가정은 가난하다.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와 군 복무 중인 형이 가족의 전부이다. 어머니가 유통업체 판매 계약직으로 일해서 겨우 입에 풀칠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군은 지난해 11월 말기 암(림프종)에 걸렸다. 림프절은 면역기관의 일종으로 전신에 분포하나 겨드랑이, 사타구니, 목, 가슴 등에 많이 모여 있다. 오군은 어느 날 목 아랫부분에 멍울이 만져져서 동네 병원을 찾았다.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을 듣고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암담했다. 목뿐만 아니라 가슴 안쪽에도 커다란 암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주치의인 유철주 세브란스병원 혈액종양학과 교수는 “다행히 골수나 뼈로는 전이되지 않았다. 정석이의 암은 항암 치료 등으로 80~90% 치료된다. 정석이는 이미 두 차례 항암제를 맞았고, 경과가 좋은 편이다.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오군의 어머니는 아들 생각에 목이 멘다. 아들이 병에 걸린 것이 자신의 탓 같아 눈물이 난다. 오군의 어머니는 “내가 일을 마치고 밤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때까지 정석이는 혼자 저녁밥을 차려 먹고 외로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석이는 내색하지 않았다. 병에 걸려 아파도 티를 내지 않는다. 아들이 또래보다 생각이 깊어서 엄마가 힘들게 산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해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억지로 퇴원했다. 하루하루 불어나는 병원비도 무섭지만, 학교를 더 빠질 수 없었다. 항암 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졌고, 메슥거리고 토하기 일쑤이고, 면역력이 크게 떨어져 감염 위험도 있지만, 마스크를 착용하고 등교한다. 오군은 “아프지만 학교에 가야 고등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고 나중에 자동차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현재 치료받는 것이 고통스럽다. 그래도 참고 이겨내서 다시 건강해지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아들의 병 수발을 위해 오군의 어머니는 몇 푼 벌기 위해 일하던 직장마저 그만두어야 했다. 돈이 없어 간병인을 쓸 수 없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어미의 선택이었다. 게다가 11평짜리 집을 빼앗길 처지에 놓였다. 집을 담보로 얻은 은행 대출과 이자가 2억원으로 불었다. 갚을 길이 묘연하자 은행은 그 집을 경매에 넘기기로 했다. 오군의 어머니는 “집이 경매로 처분되면 길거리에 나앉을 형편이다. 옛날에 들어둔 보험으로 받은 몇천만 원을 아들 치료비로 쓰면 사실상 전세도 얻을 수 없다. 내가 고정 수입이 없으니 월세는 더욱 어렵다.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신청을 해서 임대아파트라도 들어가려고 하는데, 심사가 까다로워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오군 가족들이 찢어지는 가난과 오랜 병치레를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마음을 품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웃이 많다. 하지만 오군과 어머니는 오히려 끈질기게 살고 싶어 한다. 그들이 갈망하는 삶은, 부자이거나 명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보통 사람처럼 큰 걱정 없이 사는 평범한 생이다. 오군의 어머니는 “극단적인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석이를 도와준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아들이 다니는 중암중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이 지난해 성금 1천만원을 모아서 전달해주었다. 일반인보다 더 열심히 살아서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평범한 삶을 되찾는 모습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또 삶의 구석에 몰린 사람들에게 ‘사정이 그렇게 어려운 정석이네도 사는데…’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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