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정경 유착이 발목 잡았다
  • 강병구│인하대 경제학부 교수 ()
  • 승인 2013.02.19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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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권 지하경제 양성화 왜 실패했나

새 정부 출발을 앞두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 이행을 위한 재원 조달 방안이 정치권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박당선인은 대선 공약에서 향후 5년 동안 1백34조5천억원의 소요 예산 중 탈루 세금의 축소로 28조5천억원을 조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탈루 세금의 축소 가운데 체납 정리의 강화를 제외한 15조5천억원은 고소득 자영업자 및 대기업 탈루 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와 지하경제의 양성화를 통해 조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차명 계좌 개선 등 답보 상태

‘지하경제 양성화’는 박당선인이 처음 내건 정책 이슈는 아니다. 이미 1993년 김영삼 정부가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면서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제도적인 개혁에 첫발을 떼기도 했다. 또, 그동안 집권한 역대 정부들도 신용카드 활성화 대책이나 현금영수증 발급 제도, 전자 세금계산서 발급 의무화 등을 통해 탈루 소득의 축소에 상당히 기여하고, 세원을 투명하게 관리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여전히 고소득 자영업자, 개인 및 법인 사업자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탈루 소득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현행 금융실명제법(금융 실명 거래 및 비밀 보장에 관한 법률)에서는 차명 계좌를 만든 사람이나 명의를 빌려준 사람은 처벌하지 않기 때문에 차명 계좌는 고액 자산가와 기업의 비자금 조성, 경영권 불법 상속, 불법 로비, 주가 조작, 고소득 자영업자의 탈세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2008년 삼성특검에서 밝힌 1천1백99개의 차명 계좌에 분산된 4조원이 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명 자산, 새누리당 이상득 의원실 여직원의 계좌에서 발견된 7억원,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차명 계좌를 이용한 우회 증여 등등 그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물론 이와 같은 차명 계좌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다양한 방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18대 국회에서는 박선숙 민주당 의원이 차명 거래자에 대해 계좌 자산의 30%를 과징금으로 부과하거나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자는 방안을 발의했고, 주광덕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의원은 차명 계좌를 빌려주거나 알선한 사람에게 5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자는 방안을 발의했다. 또한 2010년 10월 기획재정부 국정감사에서 김성식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차명 계좌에 증여세를 부과하도록 의제해야 한다고 주문했고, 이에 대해 당시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은 금융실명제법 보완 등 관계 부처 간 협의를 통해 진전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이러한 발의와 주문은 부동산을 명의 신탁한 경우에 신탁자와 수탁자를 모두 처벌하는 부동산실명제에 비추어볼 때 공평하고도 합리적인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차명 계좌와 관련된 금융실명제법 조항은 개정이 유보되면서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차명 계좌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지대 추구 행위’(Rent Seeking: 자신의 이익을 위해 로비와 약탈·방어 등 비생산적 활동에 경쟁적으로 자원을 지나치게 소비하는 행위)와 개발 독재 시대부터 이어져온 정경 유착의 폐습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종종 정치인과 관료는 고비용의 정치 구조와 관료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규제와 권한을 이용하고, 기업은 독과점적 지배 구조의 유지와 노동 시장에 대한 통제를 위해 국가 권력의 지원을 필요로 하며, 이들의 이해관계는 불법으로 조성된 비자금을 매개로 연결된다. 특히 재벌 체제하에서는 경영권의 세습과 지배 구조의 유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비자금을 관리해야 한다.

2012년 11월16일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여의도 당사에서 경제 민주화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경제 민주화·정치 개혁·복지 확대가 핵심

그러면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은 고비용 정치 구조의 개혁과 경제 민주화를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지대 추구 행위를 근절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재벌 개혁과 금산(금융·산업) 분리의 강화, 그리고 저비용의 정치와 관료제의 개혁은 곧 지대 창출의 기반을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동시에 차명 계좌와 탈세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 사채 시장과 제도 금융권, 불법 자금 간의 연결 고리를 차단하고, 공정한 시장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1993년 8월12일 금융실명제 실시를 발표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 ⓒ 연합뉴스
핀란드에서처럼 국세청 내부에 ‘지하경제 조사국’을 설립하거나 과세 정보에 대한 접근을 확대해 지하경제 활동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다만, 납세자의 개인정보 보호와 국세청의 정치적 중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보완해서 국세청이 거대 권력화되는 것은 방지해야 한다. 또, 조세 정보의 투명한 공개도 납세자의 자발적 협력을 유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다.

다음으로 연매출액 2천4백만원인 부가가치세 납부 면제 기준 매출액을 높이고 간이 과세 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사업주의 성실 기장을 유도하는 방안을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지하경제 연구의 권위자인 오스트리아의 슈나이더 교수도 지적한 바와 같이 지하경제의 양성화에는 엄격한 제재 조치와 함께 적절한 인센티브가 요구된다.

한편, 지하경제의 활성화를 방지하기 위해 복지 제도를 확대할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사회안전망이 촘촘하게 구축된 사회에서는 시민들의 납세 의식이 높을 뿐만 아니라 지하경제에 의존할 확률도 낮아지기 때문이다. 채무 불이행자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취업하기조차 힘들고, 취업하더라도 그 순간부터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모든 혜택이 중단된다. 따라서 서민 금융에 대한 정책 지원과 취약 계층에 대한 금융기관의 신용 업무를 확대해 이들이 고리대금업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나아가 취약 계층에 대한 근로 장려 세제와 사회보험료 지원을 확대하고, 사회보험료 징수 업무와 국세청 소득 자료의 연계성을 키워 지하경제에서 활동하는 비공식 취업을 공식 부문으로 유인해야 한다.

지하경제의 확대는 거래 비용을 증가시키고, 분배 구조를 악화시키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약화시킨다. 박근혜 당선인은 대선 공약에서 경제 민주화와 부정부패 없는 깨끗한 정부, 생애 주기별 맞춤형 복지, 채무 불이행자의 신용 회복 지원과 서민의 과다 채무 해소를 위한 18조원 규모의 ‘국민행복기금’ 설립을 약속했다. 지하경제의 양성화를 통한 세입 증대는 복지 공약 이행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 민주화와 정치 개혁 그리고 복지 확대를 그 필요조건으로 한다. 따라서 지하경제의 양성화는 박근혜 정부의 성패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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