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빚어 도자기 만들기 8대째 ‘뚜벅뚜벅’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3.03.06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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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공예가 김영식씨

우리나라에서는 가업 계승이 3대만 이어져도 화제가 된다. 벼슬을 제외한 다른 직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 기록을 남기는 데 인색했던 데다 식민 시대와 분단, 전쟁을 거치면서 기존 사회의 틀이 모두 깨져버려서 기업 전통도, 가업 계승도 길어야 3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8대에 걸쳐서 흙을 빚어 도자기를 만들어왔다는 것도, 그 사실이 이런저런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문경의 도자공예가 김영식씨(45·조선요 대표)는 9대조 어른이 문경에 터를 잡은 뒤 8대조(김취정)가 충북 단양에서 가마를 열었고, 7대조(김광표)가 경북 상주에서, 6대조(김영수)가 문경에 다시 돌아와 1843년에 축조한 망댕이가마(경북 민속자료 135호)를 문경읍 관음리에 쌓았다. 이 가문의 장손 김영식씨는 망댕이가마 옆에 새 가마를 쌓고 8대째 물레를 차고 있다.

개인전 ‘조선백자의 미’(롯데갤러리 본점)를 위해 서울 나들이를 한 그를 만났다. 집안 내력을 묻자 그는 할아버지(김교수) 이야기부터 꺼냈다.

ⓒ 시사저널 이종현
“할아버지가 광주 분원에서 19세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증조부(김운희, 1860~1929년)가 왕실에 도자기를 공급하던 광주 분원에 발탁되셔서 관요 생활을 하셨기 때문이다. 증조부가 관요에서 일했다는 것은 구전으로만 알았는데, 이번에 ‘망댕이요 박물관’을 만들면서 자료를 찾다가 당시 하급 관리가 일기식으로 쓴 ‘하재일기’라는 기록을 찾았다. 관요에 대한 기록인데, 거기에 증조부가 가마 만들던 기술이 대단해서 문경 출신이라고 ‘김문경’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문경의 망댕이가마는 문경군지(郡誌)에 김운희 어른의 할아버지인 김영수 어른이 만드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 집안의 역사가 문경군지와 광주 분요의 기록에 등장하는 만큼 이 집안이 대대로 이름난 도자공 집안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김씨 집안의 어른들은 왜 문경에 정착했을까. “예전에는 흙 따라, 나무 따라 가마가 갔다. 문경에는 백자 만드는 흙이 풍부했고 땔감도 많다. 광복 전후부터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까지가 전성기였다. 당시 36개의 가마가 문경에 있었다. 그러다 양은그릇이 나오면서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확 줄었다.

8대째 도자기 맥을 이어온 조선요의 김영식씨가 롯데백화점 갤러리에서 전시회(사진)를 열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선택의 여지없이 찾아온 도공의 길

1960년대 출생인 그의 성장기는 도자기의 쇠퇴기였다. 그 역시 젊은 날 도자공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을 벗어나 큰 곳으로 나가고 싶었다. 군 입대 전까지 아버지 옆에서 일을 도왔다. 군 복무 중이던 1989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991년 제대를 하고 나니 먹고살 길은 막막했고 결국 물레를 차게 되었다. 하다 보니까 이 길을 택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안의 가업을 잇는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김운희 어른이 만든 망댕이가마는 1999년부터 사용하지 않고 있다. 사용하면 자꾸 뜯어고쳐야 하기에 원형을 살리기 위해서 그대로 놓아두고 그곳에서 5백m 떨어진 곳에 그가 직접 가마를 새로 쌓았다. “가마를 만들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경사도이다. 12~15도 정도의 경사를 잡고 한 칸, 두 칸, 세 칸 이어간다. 그 칸의 비율과 크기 조절도 중요하다.” 그렇게 만든 새 가마도 한 달에 한 번 불을 땔 때 1t 트럭 두 대분 이상의 나무가 들어간다. 불을 땔 때 가마 속 온도는 1천3백℃까지 올라가고, 그래야만 불의 기운이 제대로 도자기에 새겨진다.

“도자기는 한 달 농사이다. 한 달 작업해서 가마에 불을 땐다. 늘 하는 작업이지만 불을 지폈을 때 마음에 드는 작품보다는 그렇지 않은 작품이 나오는 경우가 더 많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지만 장작 가마에서 성공작이 나오는 데는 한계가 있다. 100%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올 가능성은 100% 없다.(웃음) 50%만 되어도 성공이다. 그래서 이 일은 남들에게서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받는 직업이다. 늘 기대는 하는데, (가마에서) 꺼내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못하다. 허탈해진다. 내가 한심스럽기도 하고, 그래도 20년쯤 했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기도 하고….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해야지 하고 다잡는 수밖에 없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온 적이 별로 없다”는 그에게 그의 가마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전보다 작품이 좋아졌다” “많이 발전되었다”라는 말을 해주면 위안이 된다고 한다.

“조상 맥 이어 9대 도공 배출하겠다”

그가 최근에 공을 많이 들이는 분야는 조선 다기와 다완의 재현이다. 조선 백자의 명맥은 이어지고 있지만, 다완은 맥이 끊긴 것. “백자에 대해 애착이 크지만, 다완에 대한 불만족도 크다. 다완은 어떤 흙으로 빚고, 어떤 유약을 발라 어떻게 구웠는지 기록이 없다. 그래서 이런저런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김영식씨는 최근 몇 년간 ‘망댕이요 박물관’ 개관에 정성을 쏟았다. 직접 사비를 털어 문경에 전통 한옥으로 지은 망댕이요 박물관을 세워 할아버지 때부터의 작품을 모아놓고 있다. 우리나라 공예품에 지워진 작품 제작자의 실명이 복원된 첫 전통 공예 박물관이 등장하는 것이다. “8대라는 역사를 이어온 종가임에도 찾아오신 손님에게 보여드릴 것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내 힘으로 전시 공간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다. 할아버지 작품부터 아버지의 작업과 내 작업까지 모아서 보여드릴 것이다. 집안 어른이 광주 분원에서 일했던 백자 가문이다 보니, 관요 백자와 문경 백자를 비교해 감상할 수 있게끔 관요 백자도 여러 점 구입해놓았다. 올해 사설 박물관 등록을 마치고 정식으로 공개할 것이다.”

8대는 9대로 이어질 수 있을까. “내가 3남 4녀 중 장남이다. 막내 동생(김윤식)도 도공의 길을 걷고 있다. 4년 전에 가마를 지어주고 장가를 들여 분가시켰다. 내 밑으로 2남 1녀가 있다. 큰 딸이 고3, 둘째 아들이 중2이고, 막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다. 그 애들 중 누군가가 이 일을 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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