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행차 돌아오는 길에 회한 풀듯 시 한 수 겨우 남기다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3.03.06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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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① / 반정으로 등극 후 파란 많은 궁중 생활

조선 제11대 군주 중종은 이름이 역(?)이고, 자는 낙천(樂天)이다.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1488년(성종 19년) 3월5일에 태어났다. 곧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처음에는 진성대군으로 봉해졌다가 1506년 9월에 즉위해 1544년 11월에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창경궁에서 승하했다. 재위 39년이요, 향년 57세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폭정을 보다 못한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이 일으킨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정국은 출발부터 불안했다. 성희안은 과단성은 있었으나 공부가 부족했고, 유순정은 천성이 나약해 집념이 없었으며, 박원종은 거칠고 식견이 없었다. 그들은 충성과 절의에 북받쳐 공을 이루었으나 일처리는 마땅치 않았다. 그들은 전부터 교분이 있던 유자광을 용납해 뒷날의 화를 열어놓고 인척들에게까지 모두 철권(공신녹권)을 주고 뇌물에 따라 훈공의 등급을 정했다. 하지만 유자광은 역적으로 몰려 쫓겨나 죽는다.

ⓒ 일러스트 유환영
왕도 정치 주장한 조광조 점점 멀리해

중종은 연산군 때의 정치를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몇 차례 사화를 겪으면서 화를 당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연산군 때 폐지된 성균관을 다시 복구했다. 또한 사화 때 귀양을 갔던 유숭조(柳崇祖)를 중용했다.

젊어서부터 마음 다스리는 공부를 중시한 중종은, 재위 10년(1515년)에 조광조 등 신진 사류를 중용한 이후 더욱 그 공부를 중시했다. 중종은 조광조 등이 표방하는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고 했으나, 그들이 말한 왕도 정치는 국왕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조광조는 대사헌이 되어 입대(入對: 임금을 알현하던 일)할 때마다 선례를 이끌어 와서 정치의 도리에 대해 개진하고 의리를 깨우쳤다. 특히 성(性)과 정(情), 선(善)과 악(惡), 의(義)와 이(利)의 분별에서부터 천(天)과 인(人), 왕(王)과 패(覇), 정(正)과 사(邪)의 구분에 이르기까지 개진했다. 아주 추운 날이나 몹시 더운 여름이라도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언론을 그치지 않았으므로, 입시한 다른 신하들이 이것을 괴롭게 여겨 모두 싫어했다.

그러다가 1519년 조광조가 훈구대신의 공격을 받을 무렵, 중종은 마음 공부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조광조는 중종의 인정을 받아 성대한 치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왕실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그러자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그를 미워해 백방으로 헐뜯었다. 중종 14년인 1519년 10월 조광조 등은 반정 공신 중 작호가 부당하게 부여된 자 76명에 대해 그 공훈을 삭제하라고 청했다. 중종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결국 2, 3등 가운데 녹공이 잘못된 자는 뽑아서 삭제하고, 4등은 모두 삭제하게 했다. 이 무렵 지진이 발생해 소란스러웠는데, 남곤과 심정은 권세 있는 신하가 모반을 일으키려 해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간언했다. 또 남곤 등은 중종의 귀인인 홍경주의 딸을 통해 비밀리에 아뢰기를, “조정 인사들 가운데 불순한 생각을 품은 자들의 마음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가므로, 하루아침에 황포(黃袍)를 조광조에게 입히게 될지 모릅니다”라고 했다. 중종은 홍경주에게 명해 남곤과 심정을 밤중에 신무문 밖에 나오도록 했다. 남곤, 심정 등은 조광조 등을 명패로 부르고 사류의 사람들을 철퇴로 쳐 죽이려 했다. 정광필이 이 소식을 듣고 읍간했으므로, 중종은 격살하지 말게 하고, 조광조 등을 옥(獄)에 가두었다가 외방에 나누어 유배했다. 이항 등이 끝내 조광조 등을 사사할 것을 청했으므로, 조광조 이하 70여 명이 귀양을 갔다가 모두 사약을 받고 죽었다.

신하 마음 얻지 못한 채 내우외환 겹쳐

그 후 정치는 더 나아지지 않았다. 1521년에는 신사무옥이 일어나고, 1525년에는 유세창의 모역 사건이 일어났다. 1527년 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연성위(김희)가 세자(훗날의 인종)의 생일에 쥐를 잡아 저주하는 변고가 일어나, 경빈 박씨와 그 아들 복성군을 서인으로 만든 뒤 귀양을 보냈다가 사사했으며, 당성위 홍려로 하여금 곤장을 맞다 죽게 만들었다. 중종은 형제간의 우애, 부부의 정, 부자의 은의를 어그러뜨린 셈이다. 게다가 대신을 많이 죽여 군신의 은의도 야박하게 되었다.

또한 외환도 그치지 않았다. 이미 재위 5년인 1510년 삼포 왜란이 나더니, 1522년 동래 염장에서 왜변이 일어나고, 1524년 야인이 침입했으며, 1525년 왜구가 날뛰었다. 재위 30년(1535년) 9월 중종은 개성에 행차해 닷새를 머물렀다. 귀로에 오른 9월19일, 어가가 천수정(天壽亭)에 이르렀을 때 중종은 영의정 김근사와 좌의정 김안로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옛날부터 군주와 신하가 서로 시를 지어 주고받는 일은 그르다고 했다. 그러나 옛날에도 어제시가 있었으니, 조정 대관들이 어찌 그것을 보지 못했겠는가. 내가 평소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으나 천재일우로 이 고도에 행차하게 되었고 제릉 참배를 끝내고 오늘 환궁하게 되어 너무도 기쁘다. 이곳에 이르러 좌우의 벽에 비(飛)자로 운을 달아 지은 시를 많이 써놓은 것을 보고, 그 운에 따라 나도 시를 지어 회포를 보이고자 한다.”

당시 중종이 지은 시는 이러하다.

 

천봉만학은 구름이 나는 듯하여라

송경에서 닷새 묵고

오늘에야 돌아가네

산을 멀리 바라보니

비단 요 깔아놓은 듯해라

경치는 그대로인데

사람은 옛사람 아니로다

 

千峯萬壑似雲飛(천봉만학사운비) 

五宿松京今日歸(오숙송경금일귀)

望遠山光鋪錦褥(망원산광포금욕)

觀光皆是古人非(관광개시고인비)

 

김근사 등은 중종의 이 시를 받들어 읽고, “무사히 능침을 참배하고 옛 도읍을 순행하셨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기뻐합니다. 오늘 환궁하시게 되어 성상의 마음이 즐거우셔서 친히 시를 지어 보여주시니 신들의 기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중종은 조광조가 정치를 보좌할 때는 신하들에게 어제시를 내리지 않았다. 조광조가 실각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시를 짓지 않았다. 그러다가 재위 30년 개성에 행차했을 때는 체증이 사라지는 듯 시원함을 느껴, 이렇게 시도 한 수 지어 보였다.

역대의 국왕들 가운데 중종만큼 엄숙주의를 고수한 국왕도 드물다. 하지만 신하들은 심복하지는 않았다. 신하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국왕 자신의 마음이 먼저 화평해야 했다.

재위 30년의 이 개성 행차 때 중종의 마음이 진심으로 화평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이미 김안로는 좌의정으로서 권력을 재차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 후 문정왕후를 배경으로 윤원로·원형 형제가 등장해서 1537년(중종 32년) 김안로를 숙청했다. 그리고 윤원형 일당이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종은 개성에 행차해 어제시를 지으면서 실로 잠깐의 행복을 맛보았던 듯하다.  

참고 :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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