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자의 자리 ‘오일 파워’로 못 메운다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3.03.1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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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차베스 사후, 미국과 중남미의 복잡한 셈법

3월5일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다음 날인 6일부터 베네수엘라는 일주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에 들어갔다. 수도 카라카스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베네수엘라 국기를 두른 관 속 지도자에게 작별을 고했다.

카라카스의 군중들만큼이나 주변국들도 슬픔과 위기감에 빠져들고 있다. 차베스가 공급해온 석유는, 이들 국가에는 생명줄이었다. 차베스의 ‘오일 파워’는 카리브 해의 작은 섬부터 중남미의 빈국 니카라과, 인접한 에콰도르와 볼리비아, 심지어 대국인 브라질·아르헨티나에 이르기까지 중남미 전체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미국 애머스트 대학 정치학자인 하비에르 코랄레스 교수는 “차베스는 오일 머니로 모두와 좋은 관계를 쌓았다”며 “베네수엘라는 중남미 지역의 수입 대국이고 무역 면에서도 중요한 파트너이기 때문에 외교 관계는 좋은 편이었다”고 말했다.

2012년 3월6일 한 베네수엘라 여성이 전날 사망한 차베스 대통령의 사진을 들고 슬퍼하고 있다. ⓒ AP연합
당장 쿠바·니카라과 재정 상태 ‘흔들’

2005~11년 차베스 정권은 세계 40여 개국에 약 8백20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적 지원을 했다. 차베스 이후의 삶이 당장 팍팍해질 것이 불을 보듯 빤한 곳은 니카라과와 쿠바다. 니카라과 중앙은행 자료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2년 1분기까지 베네수엘라의 재정 지원이 24억 달러(약 2조6천억원)에 달했다. 차베스 정부가 니카라과에 지원한 액수를 다 합치면 100억 달러(10조8천5백억원)에 이른다. 2011년 니카라과 국민총생산이 73억 달러(7조9천2백억원) 정도이니 베네수엘라의 지원은 실로 엄청난 액수다.

쿠바는 의료인 등 약 4만5천명을 베네수엘라에 파견하는 대신 수입 석유의 3분의 2를 베네수엘라에서 반값으로 공급받았다. 오일 외의 지원까지 합하면 차베스 정부가 쿠바를 위해 해준 경제적 지원은 약 2백85억 달러(30조9천3백억원)로 추산된다.

차베스 없는 베네수엘라의 대외적인 위상 역시 변할 가능성이 크다. 1기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방부 차관보를 지낸 프랭크 모라는 “차베스는 ALBA(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에서 리더였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악화될 때는 ALBA도 함께 쇠퇴했다”고 말했다.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같은 인물이 반미를 내건 볼리바르 동맹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는 믿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정치 아닌 경제로 접근하려는 미국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차베스의 유지를 이어받을 것으로 보이는 마두로 부통령이 유리하다. 베네수엘라 여론조사업체인 ‘Hinterlaces’가 지난 1월30일~2월9일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마두로는 50%의 지지율로, 36%를 기록한 야권 통합연대(MUD)의 엔리케 카프릴레스를 앞섰다. 마두로가 당선된다면 차베스만큼은 아닐지라도 해외 지원 프로그램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상대 후보로 지목되는 카프릴레스의 승리는 주변국에겐 최악의 시나리오다. 지난해 10월 대선에서 차베스에게 패한 그는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다른 나라에 주는 데 반대했다.

볼리바르 동맹의 힘이 약해지기를 기다리는 미국의 전략에도 변화가 엿보인다. 지난 1기 오바마 정부는 차베스에게 세게 한 방 맞았다. 콜롬비아 카르타헤나에서 열린 제6차 미주기구(OAS) 정상회의에 차베스가 불참하면서 카스트로 의장과 코레아 대통령 등 ‘반미 3축’이 모두 결석했다. ‘미국 중심의 중남미 질서 형성’을 위해 정치적 화해를 해보려던 목표가 시작부터 무시당한 것이다.

2기 오바마 정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정치가 아닌 ‘경제 우선’으로 방법을 바꾸고 있다. 그 축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다. 미국 입장에서 TPP는 캐나다·멕시코·미국 3개국으로 구성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칠레와 페루 등 남미 2개국을 추가하는 성격을 띤다. 미국 외교관계협의회의 새넌 오닐 연구원은 “이것이 실현된다면 중남미 지역의 정치·경제를 바꾸고, 남미 맹주를 노리는 브라질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차베스의 부재로 이데올로기적 구심점이 사라진 중남미를 다시 규합할 존재로는 경제적 영향력이 큰 브라질이 꼽힌다.

미국이 ‘경제’를 고리로 중남미와 관계 개선을 서두르는 것은 ‘브라질 견제’ 측면도 있지만, 중남미 경제의 약진이라는 미국의 이해가 걸려 있어서다. 미국 의회 조사국 보고서에 따르면 1998~2009년 미국과 중남미의 무역 규모는 82%가 증가해 같은 기간 아시아 무역 증가율(72%)이나 유럽연합(EU) 무역 증가율(51%)을 앞섰다.

이처럼 차베스의 석유가 만들어낸 중남미 질서가 재편되는 것은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베네수엘라 경제는 그동안 희생을 강요당했다.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인 PDVSA 자료를 보면 2010년까지 약 43%의 원유와 석유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동안 베네수엘라 정부의 재정 적자는 확대됐고 달러화가 바닥나면서 수입에 의존하던 생필품이 부족해지자 베네수엘라는 공식 통화인 볼리바르화의 평가절하를 연속 단행했다. 베네수엘라는 지난 2월 2003년 고정 환율 제도를 도입한 이후 5번째 평가절하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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