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낙하산’은 알아서 짐 싸라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3.03.18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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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국정 철학 공유’ 강조하며 공공기관 물갈이 예고

“언제 부임하셨죠?” “별 일은 없으신가요?”

공공기관장들은 부처 인사 담당자로부터 이런 ‘문안 인사’ 전화를 받았거나 받게 될 것이다. 이어 감사·임원들도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받게 될 터이다.

상대의 세세한 이력은 물론 최근 동태까지 잘 정리된 파일을 손에 쥔 사람이 취임 시기를 묻는 이유는 빤하다. 한마디로 떠나라는 얘기다.

그러면 당사자들은 대개 곧바로 책상을 정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눈치 없이 임기를 들먹이는 이들도 간간이 있다. 이들에게는 관계 기관이 준비한 암행 감찰 내용이나 감사 결과가 즉각 제시된다. 기관 내 잡음에서 판공비 내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본인에게 이렇다 할 껄끄러운 사안이 없으면 부하 직원의 과실 등도 동원된다.

3월11일 청와대 세종실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과 정홍원 총리(맨 오른쪽). ⓒ 연합뉴스
‘낙하산’ 포함해 현직 상당수 교체될 듯

‘도부수(刀斧手)’ 역은 상대에 따라 다른데, 차관 혹은 인사 실무 책임자인 국·과장이 일반적이다. 사태 파악을 못 하고 고집을 부리는 상대에게는 강도 높은 존안 자료를 들이민다. 5년 전 국무총리실에서 이 임무를 맡았던 L씨는 “10명 중 8명은 운을 떼자 알아서 나가더라”고 했다.

대대적 물갈이가 이루어진 MB 집권 당시, 10개월 넘게 버틴 사람은 노조위원장 출신의 A감사를 비롯한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 MB 정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사퇴 종용에 맞서다 강제 해임되고 행정 소송까지 제기한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이나 취임 2개월 만에 기획재정부 고위 간부의 사퇴 압력을 받은 이정환 한국거래소 이사장 정도다. 맞서다가 “통치권에 도전하는 것이냐”는 호통을 들었던 이 이사장은 검찰 수사 등 전 방위 압박을 받고 이듬해 사임했다.

공공기관 물갈이는 5년 단임 대통령제가 도입된 이래 정도의 차이만 있을지언정 역대 정부마다 거듭해온 ‘행사’다.

일괄 물갈이는 공공기관 자리가 대선 전리품이라는 의식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노획물은 승자에 귀속된다’는 사고방식은 시대착오적 유물이다. 그런 낡은 발상의 산물인 엽관제(獵官制·spoil system)는 파기 대상이다. 하지만 이게 논공행상의 필요와 함께 지지자들로부터 충성을 끌어내기 위한 유효한 방편으로 활용됐다. 어느 정권도 예외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도 내세우는 명분에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박 대통령이 3월11일 국무회의에서 공공기관장 인사와 관련해 역설한 ‘국정 철학 공유’는 공공기관에 대한 대규모 물갈이를 예고하는 신호탄이다. “국정 철학을 공유한 사람이 임명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는 당부를 공개 석상에서 한 데는 당사자들이 알아서 떠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미 5배수쯤으로 추려졌고, 장관이 추천하는 약간을 추가해…”라는 관측이 지배적인 가운데서도 ‘행여’ 하며 기대했던 상당수 기관장들은 보따리 쌀 준비를 하고 있다. 대통령 발언에 이은 총리실의 ‘고강도 감찰’ 착수는 단순한 으름장이 아니다. 전문성과 기관 평가를 통해 임기와 상관없이 솎아내는 과정에서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칼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망신 안 당하려면 알아서 처신하라’는 경고다.

전문성과 평가 결과에 따라 유임 여부를 판가름한다지만 현직자들로서는 큰 기대를 않는 게 나을 듯하다. 사실 해임 혹은 기용 때 등장하는 ‘전문성’이라는 잣대는 인사권자가 자의대로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도구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된 K씨는 언론이 해수 업무와 무관함을 꼬집자 “생선회를 좋아한다”는 우스개로 넘기려다 호되게 얻어맞은 적이 있다.

대통령의 인사권이 미치는 자리는 3000개 정도다. 30개 공기업과 157개 준정부기관, 수출입은행·한국투자공사·강원랜드 등 178개 기타 공공기관의 사장·감사·임원 등등 대상은 널려 있다. 거기에 KB·우리·산은·농협 금융지주 및 기업은행·은행연합회·생명보험협회·여신금융협회 등 금융계, 포스코·KT 등 공공기관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정부의 입김이 작용하는 수백 곳도 있다.

이 가운데 대통령이 인사권을 직접 행사하는 117개 기관의 장이 1차 타깃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나머지도 예외가 아니다. 속도감 있게 이어질 물갈이 대상은 감사 임원을 포함해 2000자리다. 이 가운데 얼마가 유임 통보를 받을지는 속단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대폭’임은 분명하다.

이른바 ‘낙하산’으로 찍힌 경우 ‘전문성’ 기준에 따라 탈락할 소지는 다분하다. 여론 또한 이 대목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대규모 희생은 불가피하다.

당사자들은 (사장·감사·임원)추천위원회(추천위)의 심사를 거쳤다고 항변할지 모르나 김대중 정부 때 시작된 추천위가 ‘쇼’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사람을 미리 정해놓고 다른 2명을 들러리 세우는, 국민의 눈가림을 하느라 수개월의 시간과 3000만원의 예산만 낭비하는 것을 다 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한국영상자료원장을 공모하면서 청와대가 낙점한 연예인이 심사에서 탈락하자 문화부가 “타 후보들도 도덕적 결함이 있다”며 재공모를 밀어붙이는 소동도 있었다. 이런 해프닝도 있다. MB 정부 당시 한 공기업이 결원이 된 사외이사를 뽑기 위해 추천위를 구성했다. 그러나 신문에 공모 광고를 게재하기 직전 주무 부처가 ‘내정자’인 L차관 퇴임 때까지 기다리라며 급제동을 거는 바람에 모든 진행을 중단시키는 촌극이 벌어졌다.

순자산 가치 합계 200조원, 부채 합계 500조원에 이르는 공공기관에는 덩칫값도 못하는 무책임한 비효율 집단이라는 평가가 쏟아진다. ‘1등을 하는 유일한 부분은 최고 임금’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그런 공공기관을 향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제언은 편중 인사 지양, 논공행상을 위한 전용 금지, 국민을 기만하는 공모제 개선 등등이다.

‘자리 일부 집권측에 할애’가 현실적?

편중 인사 시비와 관련해 MB 정부가 그린 금융계 지도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돼 있다. 금융계의 핵심인 KB금융지주·우리금융지주·하나금융지주·농협금융지주·산은지주 회장이 하나같이 PK(부산·경남) 출신이다. 실제 운용 여부를 떠나 동일 지역 출신이 한국의 돈줄을 쥐락펴락하는 모양새는 국정 운영의 ABC를 몰각한 처사다. 아무리 ‘고소영’이 아니라고 한들 믿지 않는 것이다. “사외이사 자리도 영포(영일·포항)와 PK가 먹고 난 다음”이라는 냉소가 팽배하니 국민 화합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자리를 전리품으로 간주하지 말라고, 논공행상에 쓰지 말라고 주문하지만 얼마나 먹힐지 의문이다. 약속을 중시한다는 박근혜 정부이지만 벌써 위약 사례는 심심치 않다. 인수위 관계자의 내각과 청와대 입성은 없을 것이라는 선언, 현직 검사의 청와대 파견도 않겠다는 다짐 모두 식언으로 끝났다.

박근혜 정부의 공공기관 물갈이와 후속 인사도 결국은 ‘현실과 타협’한 모습을 취하리라는 전망은 그래서 나온다. 차라리 자리의 50%는 ‘국정 철학을 공유’한 이들에 대한 논공에 돌리고 나머지를 전문성 중심으로 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게 현실적 해결책이라는 해법 아닌 해법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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