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상공에 사정 회오리 몰아친다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3.04.03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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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정 한파가 휘몰아쳤다. 박근혜 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1차 표적이 정·관계가 아닌 재계로 바뀌었을 뿐이다. 공정위·국세청·금융위 등 ‘경제 검찰’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곧 재벌 그룹의 부당 내부 거래에 대한 조사가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재벌들의 일감 몰아주기 행태도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재계도 정보팀 강화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사정 정국에 휩쓸릴 재벌 그룹은 어디일까. 

“새 정부가 들어서면 으레 사정기관을 앞세워 대기업을 압박하곤 했다. 올해는 분위기가 더한 것 같아 걱정이다.”(ㄱ그룹 임원)

“오죽하면 SI(시스템 통합) 업체가 물류나 중고차 매매 사업에까지 뛰어들었겠나. 사정기관의 표적이 되는 것만은 피하려는 고육책이었다.”(ㄴ그룹 임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반복돼온 대통령의 통치 행위가 있다. 바로 사정 정국이다. 정·관계는 물론 재계까지 사정 한파에 벌벌 떨어야만 했다.

2월25일 출범한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다. 다만 현 정부의 사정은 재계에 표적이 맞춰져 있다. 지난해 대선 정국에서 ‘경제 민주화’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예견된 수순이다. 촉각이 예민한 재계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다. 재계가 몸을 바짝 낮춘 것도 이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서슬 퍼런 칼날이 자신들을 겨눌까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한 그룹은 전담 대응팀까지 꾸렸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국세청 등 경제 사정기관은 재벌 기업의 부당 내부 거래 관행을 엄단할 준비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조직 개편이 마무리되는 대로 재계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원회 역시 금융사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TF(태스크포스)를 조만간 선보일 예정이다. 금융권에도 폭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전망이다.

재계에서 우선 주목하는 것은 ‘경제 검찰’로 불리는 공정위의 행보다. 공정위는 그동안 학계나 시민단체로부터 적지 않은 비난에 시달려왔다. 시장의 파수꾼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정위가 가진 권한(전속고발권)을 악용해 재계를 비호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공정위의 기조가 바뀌었다. 주요 그룹에 잇달아 ‘과징금 폭탄’을 날렸다. SK그룹은 계열사 부당 지원 혐의로 347억원의 과징금을 맞았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지시로 계열사인 롯데기공에 통행세를 챙겨준 롯데피에스넷도 철퇴를 맞았다. 지난해 공정위의 검찰 고발 건수는 44건으로 전년 38건에 비해 15.8%나 늘어났다.

새 정부가 들어선 올해 분위기는 더욱 흉흉하다. 재벌 그룹의 부당 내부 거래에 대한 조사가 조만간 시작될 것으로 관측된다. 예정대로라면 3월에 공정위원장이 선임되고, 내부 조직 개편이 마무리되는 4월이 ‘디데이’였다. 하지만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내정자의 낙마로 일정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재계 일각에서는 공정위 조사가 상당 기간 지연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공정위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공정위가 최근 의료기기업체인 GE·필립스·지멘스·삼성메디슨 등에 대한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제약사 리베이트 조사가 의료기기업계로 확산되는 것은 아닌지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정위의 제약사 리베이트 조사로 재계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4월3일로 예정된 청와대 업무보고 역시 무기한 연기된 터여서 재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 일러스트 오상민
대기업 부당 내부 거래 조사가 신호탄

이와 관련해 사정기관의 다른 관계자는 “재벌의 부당 내부 거래 조사는 차려놓은 밥상이다”라고 공정위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공정위는 우선적으로 4대 그룹부터 조사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삼성·현대차·SK·LG 등 4대 그룹의 내부 거래 금액은 2011년 말 기준 117조1000억원에 달한다. 46개 대기업집단의 내부 거래 금액(186조3000억원)의 60%에 달한다. 특히 비상장사의 내부 거래 비율은 40%를 넘어서고 있다. 대부분 오너 일가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시간이 조금 지연되더라도 조사에는 문제가 없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앞서 언급한 공정위에 정통한 관계자는 “공정위는 우선적으로 4대 그룹을 조사한 뒤 10대 그룹, 30대 그룹으로 범위를 확대할 예정이다. 시장감시국 차원에서 예비조사를 마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주요 대상은 내부 거래 물량이 많고, 오너 일가가 지분을 보유한 SI와 물류, 광고, 건설 계열사다. 조경 및 캐더링(급식) 사업에 대한 조사도 추가할지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우찬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행법상 부당 내부 거래의 과징금 액수는 매출의 2~5% 선이다. 거래 규모나 중대성 정도에 따라 가중치가 부여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대 수천억 원의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공정위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내부 정보팀과 대관(對官)팀을 총동원하고 있다. 일부 그룹의 경우 관련 인력을 대폭 보강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재계 관계자는 “새 정부의 의지가 강해 막을 수는 없다. 공정위에서 잘못 이해한 것이 없는지를 파악한 후 적극적으로 설명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새로 진급하는 직원이나 경력 입사자의 경우 의무적으로 공정거래법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나머지 회사 역시 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불가피한 물량은 제외하더라도 해소 가능한 부분을 터는 작업에 들어갔다. 한 재계 관계자는 “내부 거래 물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파이를 키워야 한다. 신사업 진출과 함께 해외 바이어 확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김덕중 신임 국세청장(왼쪽 사진)이 3월25일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강도 높은 대기업 세무조사를 시사했다. 오른쪽은 신제윤 신임 금융위원장. ⓒ 연합뉴스, ⓒ 시사저널 박은숙
재계, 전담 대응팀 구성해 대비

실제로 삼성SDS는 삼성전자·삼성디스플레이 등 계열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물류 사업에 진출했다. 그동안 삼성전자 등은 물류 전문 업체와 직접 계약을 맺었다. 올해부터는 삼성SDS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물류 컨설팅과 소프트웨어를 제공한다는 명목이었다. 삼성전자의 매출 규모를 감안할 때 새로 파생되는 매출만 15조원 이상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삼성SDS측은 “고순동 대표 취임 후 새로운 먹거리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해외 IT 물류 사업을 강화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삼성SDS의 경우 계열사와 물류 전문 업체 사이에서 중개 역할만을 하고 있다. 때문에 “기존의 내부 거래 물량을 줄이기 위해 편법을 동원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의 글로비스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글로비스는 사업 초창기부터 계열사 물량 몰아주기를 통해 급성장했다. 2011년 전체 매출 7조5478억원 가운데 내부 거래가 6조5514억원(86.8%)에 달한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현재 31.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유탄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내부 거래 물량을 줄여야 한다. 글로비스는 최근 현대중공업 계열인 현대오일뱅크와 원유 수송 계약을 체결했다. 10년간 거래 규모가 1조원을 넘어선다. 대신 글로비스는 현대중공업 계열 하이투자증권이 운용하는 선박펀드를 통해 유조선 4척을 발주했다.

SK그룹의 SK C&C는 최근 계열 회사인 엔카와의 합병을 통해 중고차 매매 사업에 진출했다. 이 회사 역시 최태원 회장이 38%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내부 거래 물량은 2011년 말 60%대에 달했지만, 중고차 매매 사업과 해외 거래선 확대를 통해 최소 10% 이상 내부 거래 물량이 줄어들 것으로 추정된다.

재계에서 우려하고 있는 곳은 공정위뿐만이 아니다. 공정위 조사 이후 진행될 국세청의 일감 몰아주기 증여세 부과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기업 경영 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에 따르면 올해 국내 30대 그룹이 물어야 할 증여세 총액은 757억원 정도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과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각각 139억원, 97억원의 세금을 내야 할 전망이다. 정몽구 회장은 7% 지분을 보유한 현대모비스를 통해 59억원의 세금이 부과되고, 정의선 부회장이 31.9% 지분을 가진 현대글로비스에 64억원의 세금이 부과될 것으로 관측된다. 뒤를 이어 강덕수 STX 회장이 117억원의 세금 폭탄을 맞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강 회장이 보유한 글로벌오션인베스트(100%)와 포스텍(69.4%) 지분 때문이다. 그 밖에도 최태원 SK 회장은 114억원의 증여세를 물 것으로 예상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등도 에버랜드와 삼성SDS 지분과 관련해 105억원의 과세가 예상된다. 박주근 CEO스코어 대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증여세 총액이 예상보다 낮게 나왔다. 국세청의 증여세 과세 제도는 실질적인 효과보다 상징적인 것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박 대표의 주장처럼 국세청의 과세 규모가 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세청 내부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국세청은 현재 재벌 계열사들과 금융권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다. 국민은행·교보증권·KT&G·롯데호텔·E1·동아제약 등 업종 구분도 없다. 이렇게 한꺼번에 대규모로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재벌 3세에 거액의 증여세 부과 가능성도

국세청은 그동안 내부 경쟁을 통해 과세 규모를 키워왔다. 2011년 삼성전자 세무조사 때도 두 팀으로 나눠 경쟁을 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국세청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지난해의 경우 세원 정보 부서의 평가가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국세청 내부 경쟁이 가속화되는 만큼 조사가 유야무야 끝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김덕중 국세청장도 3월25일 진행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예고했다. 그는 “대기업에 대한 세무조사 건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사실”이라며 대기업의 부당 내부 거래 조사를 시사했다.

금융위원회도 뒤질세라 사정 정국에 합류했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금융권도 바짝 긴장하긴 마찬가지다. 주요 금융지주사의 회장들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기 때문이다. 요즘을 일컬어 “금융권 인사 태풍의 전야”라는 말까지 나온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2012년 3월 일찌감치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나머지 ‘3대 천왕’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면서 거취를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신제윤 금융위원장 후보자가 3월19일 “금융권 공공기관장의 잔여 임기가 남아 있어도 필요하다면 교체를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이 3월28일 사퇴를 표명했다. 강 회장은 이명박 정부의 실세였다. 이명박 정부의 초대 기획재정부장관을 지냈고, 2011년 3월에는 산은금융지주회장에 취임했다. 강 회장이 전격적으로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나머지 금융권 수장들의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대표적인 ‘MB 인사’로 불리는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과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포함해 금융기관 26곳 가운데 19곳의 기관장을 전 정권 및 정부 출신 인사가 맡았다. 금융권 관계자는 “오는 7월 임기가 만료되는 어윤대 회장이나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은 물러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하지만 내년까지 임기가 남아 있는 인사들에게는 상당한 압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는 현재 금융사 지배구조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을 준비 중이다. 조만간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TF를 띄울 예정이다. 금융위는 이 TF에서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개선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마무리되면 금융지주사에 대한 강도 높은 감독과 후속 조치가 몰아칠 것으로 관측된다. 신제윤 금융위원장도 3월22일 취임사에서 “금융지주회사 제도가 도입된 지 1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면서 “지배구조 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금융계를 비롯한 재계에 전 방위로 사정 칼날이 내려치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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