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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처에 가슴 시려 영화관에 간다

제주 4·3 사건 다룬 독립영화 <지슬> 10만 관객 돌파

이형석│헤럴드경제 기자 ㅣ 승인 2013.04.17(Wed) 15:4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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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가에 남도의 꽃소식과 함께 올라온 제주의 바람이 무섭다. 독립영화 <지슬>(감독 오멸)이 지난 3월1일 제주의 단관에서 상영을 시작해 2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개봉한 이후 소규모 개봉작으로는 이례적인 흥행세를 보이고 있다. <지슬>은 4월12일 관객 10만명을 돌파했다. ‘다양성 영화’는 전국적으로 많아야 수십 개관에서 상영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메이저 배급사의 일반 상업영화 수백만 명에 견줄 만한 성적이다.

‘다양성 영화’란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용어다. 소규모로 개봉하는 독립·저예산·예술 영화를 주로 가리키는 개념이다. 영진위가 운영하는 흥행 집계 시스템인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서도 상업영화와는 별도로 ‘다양성 영화’ 순위와 성적을 집계한다. 올해 다양성 영화 박스오피스 1위는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인 <실버라이트닝 플레이북>으로, 관객 수 12만명을 기록 중이다. <지슬>이 곧 이를 추월할 것으로 보인다.

   
<지슬>은 선댄스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았다. ⓒ 자파리필름 제공
선댄스영화제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대상 수상

<지슬>의 반란은 지난 2월 세계 독립영화의 최대 축제인 미국 선댄스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로는 최초로 대상을 받으면서 예고됐다. 한국 독립영화가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슬>은 국내 메이저 영화사는 물론이고 한국 독립영화계에서조차도 ‘주류’와 동떨어진 ‘제주에 의한, 제주를 위한, 제주의 영화’였다는 점에서 영화제 수상과 국내에서의 기록적인 흥행은 의미가 특별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지슬>이 일으킨 이변의 첫 번째 힘은 ‘콘텐츠의 힘’이다. 영화를 배급한 영화사 진진과 마케팅 및 상영을 전폭 지원하다시피 한 CJ CGV의 예술영화 전용관 무비꼴라쥬는 “관객들로부터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어낸 영화의 힘”을 흥행의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꼽았다.

<지슬>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 4·3 사건을 그린 영화다. 4·3 사건은 광복 후인 1948년 4월3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제주 민중들과 미군정·경찰·반공단체가 충돌해 유혈 사태로 번진 사건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제주 시민이 죽거나 다쳤는데, 4·3 사건은 아직까지도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미결의 비극사’로 남았다.

이 영화는 1948년 ‘해안선 5㎞ 밖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한다’는 미군정의 소개령을 듣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속으로 피신한 제주 섬 한 동네 주민들의 혹독한 겨울, 며칠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토벌대의 총칼을 앞에 두고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이웃집 노총각이 언제나 장가들까 넉살좋게 농담하는 여인, 짝사랑에 수줍어하는 청년, 마을에 두고 온 돼지 밥 줄 걱정뿐인 노인, 노모 모실 생각과 임신한 아내에 대한 애정이 지극한 가장 등 평범한 제주 주민들의 삶의 풍경이 비극 속에서도 때로는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토속적인 삶의 낙천성과 순진성·건강성이, 제복 입은 권력이 자행하는 금속성의 폭력과 시종 팽팽한 긴장을 이룬다. 겨울 바다의 파도, 살을 에는 겨울바람, 까마귀의 울음, 숲과 동굴 등은 오갈 데 없게 된 약자들을 따뜻하게 품는 모성적인 공간이자, 인간의 비극을 지켜보는 준엄한 관찰자이기도 하다.

제주 방언을 쓰는 제주 사람들이 만든 <지슬>은 매혹적인 영상과 강렬한 이야기로 영화를 ‘시적 리얼리즘’의 경지로 끌어올리며 한국 현대사의 ‘씻김굿’이자 ‘위령제’이며 ‘치유와 위안’의 작품이라는 평을 얻었다. 영화사 진진의 장선영 팀장은 “‘무겁고 어려운 영화일 줄 알았는데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대한민국에 이런 일이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는 젊은 관객들의 반응이 의외로 많았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SNS를 통해 입소문을 낸 것이 관람 열기를 이어가게 한 힘”이라고 말했다.

선댄스영화제 대상 수상은 영화팬들을 <지슬>이 가진 ‘영화의 힘’에 주목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다. 오멸 감독은 제주의 토속성에 기반을 둔 <뽕똘> <어이구 저 귓것> 등 전작을 연출했으나 대다수 국내 영화팬들에게는 무명에 가까웠다. 만일 선댄스영화제 수상이 없었다면 흥행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3월1일 <지슬>을 만든 오멸 감독(가운데)과 배우들이 개봉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산영화제 발굴·해외 초청’ 흥행 공식 밟아

이원재 CGV 프로그래머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발굴되고, 주요 해외 영화제에 초청되고, 수상을 통해 국내 영화팬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패턴이 독립영화 흥행의 ‘공식’처럼 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슬>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시민평론가상·한국영화감독조합상·CGV무비꼴라쥬상 등 4관왕을 차지하며 해외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주목을 받아 이후 유럽·아시아·북중미·남미 등의 영화제를 순례하기 시작했다.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 등이 모두 부산-해외 영화제 수상-국내 흥행의 ‘공식’을 밟은 한국의 독립영화다. 290만명이라는 전무후무한 독립영화 흥행 기록을 세운 <워낭소리>도 부산영화제 수상으로 첫 포문을 열었다.

작품을 만들어놓긴 했지만 개봉이나 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신인·무명 감독의 독립영화가 거의 유일하게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 영화제 출품이며, 부산은 말하자면 독립영화 엘리트 코스의 ‘출발’인 셈이다.

부산에서 이슈가 된 작품은 칸·베를린·베니스 등 세계 3대 영화제를 제외하고는 정상급 영화제로 꼽히는 로테르담·로카르노영화제 등의 호평이나 수상으로 이어진다. 그런 뒤 1~2년간 전 세계 영화제를 순례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선댄스국제영화제의 경우 미학적 혁신과 함께 ‘대중성’이 큰 작품이나 장르적 완성도에서 탁월한 작품이 초청작 및 수상작으로 선정된다.

예술영화 전용관이 잇달아 마련되면서 독립영화의 배급망이 확대되고, 다양성 영화의 고정적인 팬층이 형성된 것도 <지슬> 흥행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다양성 영화 관객 수는 해마다 부침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2004년 200만명 이하에서 지난해엔 300만명 수준까지 늘어났다. 이 중에서 한국 독립영화는 2009년 <워낭소리>를 제외하더라도 연간 40만명에 육박했다. 한국 독립영화 개봉 편수는 2004년 6개에 불과하던 것이 2011년엔 79개로 최고점을 찍었고 지난해에도 54편이나 관객을 만났다. 이를 포함한 다양성 영화도 2004년 30편에서 2010년 185편, 2011년 193편, 2012년 179편을 기록했다.

독립영화 전용관 현황을 보면 2007년 최초의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생긴 이래 인디플러스·아리랑시네센터·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가 잇따라 생겼다. 멀티플렉스의 다양성 영화 전문관은 2004년 CGV에서 처음 도입한 이래 지난 3월까지 10개관으로 유지되다 현재는 16개관으로 확대했다. 연내에 20개관까지 늘린다는 방침이다. <지슬>의 경우 전체 관객의 30%가 CGV 무비꼴라쥬관에서 본 것으로 집계됐다.

경기도에서는 4월11일 지자체와 경기영상위원회가 메가박스와 업무협력각서를 체결하고 수원 영통을 비롯한 경기 지역 메가박스 분점 6곳에 독립영화 전문관을 열기로 했다.

다양성 영화 개봉 편수가 늘어나고, 미국 및 유럽의 대형 흥행작들이 중소 규모 수입사에 의해 들어와 소규모로 개봉하는 ‘다양성 영화’ 대접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아 한국 독립영화로서는 여전히 배급·개봉에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흥행 가능성만큼은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CGV의 이원재 프로그래머는 “한국 독립영화 시장은 1만명이면 선전, 3만명이면 흥행, 7만~8만명이면 ‘대박’, 10만명이면 ‘대성공’”이라고 말했다.

‘감자’라는 뜻의 제목부터 모든 대사를 제주도 사투리로 쓴 <지슬>이 남도에서 올라온 흥행 전선을 언제까지 이어갈지 한국 영화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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