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든 민주당이든 낡은 틀을 깨뜨려라”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3.05.14 15:1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론조사에 나타난 호남 민심의 유연성

‘호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황색’이다. “호남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출마해도 황색 깃발을 꽂지 않으면 당선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동안 호남은 민주당에 헌신적인 지지를 보내왔다. 그래서 호남 하면 ‘진보’와 ‘좌파’라는 이미지도 따라붙는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견해는 다르다. 민주당에 대한 호남의 무한 지지는 새누리당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 때문일 뿐이라는 것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그 어느 지역보다 호남은 경직되지 않고 유연하다. 이념에 얽매이는 낡은 틀을 싫어한다. 그래서 호남을 여론의 바로미터라고 한다”고 밝혔다.

호남에 대한 오해, 그리고 호남의 변화는 <시사저널>이 5월8일 여론조사 전문 기관인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호남 지역 주민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잘 나타난다.

2006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영접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제공
‘중도층 끌어안기’ 등 탈이념화 요구

유연한 호남 민심이 탈(脫)이념화를 지지하는 것은 안철수 무소속 의원에 대한 지지 성향에서 잘 반영된다. ‘향후 민주당의 당 운영 방향’을 묻는 질문에서 전체 응답자의 45.1%는 ‘안철수 세력과 합해서 중도·보수층을 강화해야 한다’고 답했다. 반면 ‘진보 정당과 연대해서 진보층을 강화해야 한다’는 응답은 10.7%에 그쳤다. 진보에 쏠려 이념 논쟁에 매몰되기보다는 민생에 좀 더 전념해달라는 요구인 셈이다.

‘현재 민주당의 가장 큰 문제점’을 묻는 질문에서는 전체 응답자의 21.9%가 ‘친노와 비노 등의 계파 갈등’을, 17.3%는 ‘제1야당으로서 정부·여당 견제 부족’ 등을 꼽아 각각 1, 2위에 올랐다. ‘지나친 중도주의 강화로 진보 성향 약화’를 꼽은 이들은 15.1%로 3위에 머물렀다. 2순위까지 중복 응답을 허용한 질문에서도 ‘진보 성향 약화’의 문제점을 꼽은 응답자는 22.6%로 4위에 그쳤다. 1~3위는 ‘계파 갈등’(33.3%), ‘대권 주자 및 지도자급 인물 부족’(33.1%), ‘지역주의에 안주하는 무사 안일주의’(28.3%) 순이었다. 지금의 호남 민심은 민주당의 ‘좌클릭’보다는 오히려 ‘우클릭’을 더 요구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탈이념화는 진보 정당과 민주당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호남 민심의 또 다른 단면이다. ‘진보 정당 세력의 향후 행보’를 묻는 항목에서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 진보신당 등 분열된 ‘진보 정당들이 모두 민주당과 한데 힘을 합쳐야 한다’는 응답률은 28.8%로 집계됐다. 이는 ‘진보 정당이 모두 합쳐 통합된 진보 정당을 만들어 민주당과 경쟁해야 한다’(28.9%)는 응답과 엇비슷한 비율이다. 반면 ‘진보 정당이 분열해 독자적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은 2.9%로 미미했다.

‘안철수 신당행’이 점쳐지는 강동원 의원(전북 남원·순창)의 진보정의당 탈당에 대해서도 호남 민심은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강 의원의 탈당이 ‘바람직하다’고 한 응답률이 43.0%로, ‘부적절하다’(27.5%)보다 15.5%포인트나 높게 나타났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제 더는 특정 정당에만 치우치지 않으려는 호남 민심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민주당 지지에 대한 입장’을 묻는 항목에서 응답자의 52.9%가 ‘현재는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향후 바뀔 수도 있다’고 답했다. 반면 ‘현재는 지지하지 않지만 향후 바뀔 수도 있다’는 응답은 18.3%로 나타났다. 민주당 지지자든 아니든, 전체 응답자의 71.2%, 즉 10명 중 7명꼴로 향후 지지 정당을 바꿀 수 있다고 답한 것이다.

“박근혜, 예상보다 잘한다” 35.9%

‘호남을 가장 대표하는 정치인’을 묻는 항목에서도 호남 민심의 유연성은 감지됐다. 호남은 지난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호남 출신 후보를 버리고, 영남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을 선택한 바 있다. ‘현재 호남을 가장 대표하는 정치인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서 1~5위에 오른 5명의 정치인 중 호남 출신은 정동영(3.6%), 박지원(3.2%), 정세균(2.2%) 등 세 명이지만, 영남 출신 안철수(3.5%), 문재인(2.4%)도 포함돼 있다. 호남이든 비호남이든 가릴 것 없이 마음에만 들면, 지역을 대변할 정치인으로 지지할 것이라는 호남 민심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물론 전체 응답자의 73.5%(없다 42.3%+모름·무응답 31.2%)가 호남을 대표할 인물을 꼽지 못할 정도로 인물난으로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출신지보다는 인물 중심으로 지역을 대변할 정치인과 정치 세력을 선택하겠다는 호남의 실용적인 노선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정 수행 지지도 조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호남은 지난해 12월 대선에서 박 대통령에게 단 10.5%의 지지율을 보냈다. 그만큼 고질적인 지역 차별과 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을 겪었던 지역의 아픔 때문에 새누리당 정권에 대한 앙금이 크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번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호남 민심은 박 대통령을 향한 마음의 빗장을 다소 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 수행 능력에 대해, 조사 응답자의 49.5%가 ‘잘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에 반해 ‘잘못하고 있다’는 평가는 35.3%였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의 국정 수행 능력을 당초 부정적으로 예상했던 조사 응답자들(50.5%)의 변화된 모습이 눈길을 끈다. 이들 중 35.9%가 ‘예상보다 잘하고 있다’고 답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어느 정도 기대를 했지만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은 20.7%에 머물렀다. 결국 박 대통령의 국정 수행 능력에 대해 부정적으로 돌아선 지지층보다, 긍정적으로 변화된 비(非)지지층 응답률이 15.2%포인트 많았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기대대로 잘하고 있다’는 응답과 ‘예상했던 대로 잘못하고 있다’는 상반된 응답은 각각 13.6%, 14.6%로 조사됐다. 물론 이는 5월10일 ‘윤창중 성추행 파문’이 불거지기 전에 나온 조사 결과라서 이는 반영되지 않았다. 이번 여론조사는 RDD 방식을 이용한 전화 면접 조사로 이뤄졌고, 95% 신뢰 수준에 오차 범위는 ±4.4%포인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