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꿈은 사치 살아남기도 벅차다
  • 하재근│문화평론가 ()
  • 승인 2013.05.1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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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직장의 신>까지 드라마에 비친 직장 문화

요즘 가장 화제가 되는 드라마는 KBS 2TV <직장의 신>이다. 이 작품은 직장인의 애환을 그리는데, 그 내용이 살벌하다. 언제 잘릴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비정규직 사원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이들은 계약 기간이 다 되면 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부장과 면담한 후 재계약 여부를 통보받는다. 혹시라도 계약이 연장되지 않을까 봐 평소에도 온갖 눈치를 보며 회사 일을 해야 한다. 정규직이 술을 마시자고 하면 혹시 미운털이라도 박힐까 봐 2차, 3차까지 가준다.

직장인의 생명줄이 상시적으로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사람 자르는 것을 간단하게 ‘계약 해지’라고 부른다), 직장 안의 공기는 언제나 피 튀길 수밖에 없다. 똑같은 일을 해도 정규직은 300만원 이상, 비정규직은 200만원 미만을 받는데, 그것은 원초적인 위계와 애증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직장의 신>은 이런 광경을 실감나게 그려내 시청자의 뜨거운 공감을 받았다.

주연 김혜수·오지호(왼쪽부터). ⓒ KBS 제공
과거엔 지금처럼 살벌하지 않았다

과거 직장인 드라마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직장인 드라마로는 단연 <TV 손자병법>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방영된 드라마다. <TV 손자병법>도 물론 직장인의 애환을 그리고, 연민을 느끼게 하는 소시민의 아픔도 드러냈지만 <직장의 신>처럼 살벌하지는 않았다.

1987년이면 경제 분야에서 ‘한강의 기적’이 가시화되던 때로, 직장인들이 민주화 시위에 가담했을 무렵이다.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1958년 개띠들이 20대 시절을 산업 역군, 수출 전사로 보내고 30세를 맞이해 ‘독재 타도 넥타이 부대’로 활약했던 무렵이다. 이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당시 사회가 경제적으로 안정됐기 때문이다. 넥타이 부대로 나서도 회사에서 잘릴 걱정은 없었다.

당시 한국의 직장은 연공서열·종신고용 체제였다. 입사 기수 순서로 차례차례 승진하면서 큰일이 없는 한 정년까지 보장되는 분위기였다. 물론 당시에도 누군가는 출세 길이 막히면서 만년 과장 신세가 되고, 누군가는 영악한 동기에 치이면서 사는 서러움을 소주 한 잔으로 털어넣어야 했지만 지금처럼 벌벌 떨 정도의 공포는 없었다. <TV 손자병법>은 딱 그런 시절의 직장 분위기를 그렸다.

서러움을 겪는 만년 과장은 전설적인 명배우 오현경이다. 그는 영악하지 못해 출세 길을 놓치고 스트레스 속에 사는 캐릭터로 당시 많은 중년 직장인의 사랑을 받았다. 이후 오랫동안 투병과 요양 생활로 인해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젊은 세대에겐 익숙하지 않지만, 서민적 해학미가 느껴지는 연기로 일가를 이룬 배우다.

그 밑의 일반 사원은 여포·유비·조조 등 <삼국지>를 패러디한 인물들로 서인석, 김희라, 김성찬, 장용 등이 서민의 공감을 받았다. 김성찬은 이후 <도전 지구탐험대> 출연차 라오스에 갔다가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나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어쨌든 이들이 그려낸 직장은, 비록 설움도 있고 경쟁도 있지만 평생 고락을 함께할 동료들과 부대끼는 따뜻한 일터 같은 느낌이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드라마 속 직장은 판타지가 된다. 트렌디 멜로물의 엄습 때문이다. 당시엔 웬만한 직장마다 재벌 2~3세 실장님이 한 명씩 있어 여직원이 신데렐라로 신분이 상승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야망을 불태우며 일에 매진하는 팀장이라도 날마다 바에 가서 칵테일을 기울이며 사랑타령에 울고 웃을 시간이 있었다. 한마디로 턱없는 출세, 턱없는 연애. 그래서 판타지다.

최근 들어서는 전문직 드라마를 통해 직장 내부의 권력 투쟁이나 알력 관계를 아주 세밀하게 그리는 경향이 나타나 호평받았다. 대표적으로 <하얀거탑>과 <골든타임>을 꼽을 수 있겠다. <하얀거탑>은 대형 병원 과장이 되려는 어느 의사의 치열한 투쟁기다. 그 한 자리를 놓고 병원 이사, 기존 과장, 의사협회장, 제약회사, 동료 의사들, 후배 레지던트들이 서로 합종연횡하며 파워게임을 펼쳤다.

<골든타임>에서는 병원의 각 과장, 이사들 그리고 이사장과 레지던트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병원 생활을 하는 광경을 그렸다. 이런 작품들은 직장을 권력 투쟁의 장으로 그리면서, 일반 서민의 일상과는 거리가 멀어졌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살벌해진 직장 문화를 그린 것처럼 (아래)은 삭막한 학교의 실상을 담았다. ⓒ KBS 제공
현실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시대

그렇게 직장이 판타지와 ‘끗발 있는 사람들’ 사이의 권력 투쟁의 장으로 그려지는 사이에 한국 일반 직장인에겐 참혹한 현실이 닥쳤다. 무한 성과 경쟁, 조직 유연화, 정리해고에 대한 공포 그리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신분 분화였다. 한국의 직장은 더는 따뜻한 일터가 아니다. 출세하려고 권력 투쟁을 할 여유 따위는 없다. 그저 밥숟가락 하나 보존하는 것, 안 잘리고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가 지상 목표가 돼버렸다.

회사 동료는 가족이라고 하지만, 더는 가족이라고 느낄 수만은 없게 된 직장. 세상에 어느 가족이 툭하면 자른다고 협박하고, 성과가 안 나왔다고 신분을 갈라 차별한단 말인가? <직장의 신>은 그렇게 살벌해진 직장 문화를 다룬다.

이 작품에서 관리자들은 우린 가족이라며 가족으로서 봉사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김혜수는 회사란 가족이 아니고 밥벌이를 하는 일터에 불과하니 수당이나 잘 챙겨달라고 일갈했다. 이에 시청자의 찬사가 쏟아졌다. 이것은 이렇게 살벌해진 직장 문화로 인해 나타난 사태였다.

살벌해진 것은 직장만이 아니다. 드라마 속 학교도 그렇다. 옛날 드라마 속에서 그려진 건 따뜻한 공동체로서의 학교였다. 물론 그때도 여전히 누군가는 문제아였고, 학교폭력이라든가 입시 경쟁의 스트레스도 존재했지만 지금처럼 삭막하진 않았다.

최근에 호평받은 <학교 2013>에서 학교는 지옥이었다. 도무지 마음 붙일 곳 하나 없고, 언제나 살얼음 같은 긴장이 흐르는 수용소 같은 느낌. 교사, 학부모, 학생 할 것 없이 모두 비인간적으로 변해가는 참혹한 풍경. 학교를 그렇게 그리자 시청자의 공감과 찬사가 쏟아지며 흥행 면에서도 성공했다.

참혹하고 살벌하게 그려야 공감을 얻는 세상. 학교도 드라마 속에서 한동안 판타지 공간으로 그려졌다. <꽃보다 남자> <드림하이> <궁> <공부의 신> <장난스런 키스> 등 멜로와 신분 상승의 판타지였다. 하지만 현실은 도저히 그런 판타지를 마냥 즐길 수 없게 만들 만큼 살벌해졌고, 결국 드라마는 현실에 굴복했다.

직장인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직장 문화가 점점 참혹해지자 드라마는 더는 그것을 외면할 수가 없어졌다. 재벌 2세도 신데렐라도 없는,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신분 관계가 전면에 부각되는 <직장의 신>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드라마가 마침내 현실을 담아내기 시작한 것을 기뻐해야 할까, 그러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살벌해진 세상을 한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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