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수 안 쓰면 바보 된다
  • 이규대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3.05.2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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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베스트셀러 만들기’ 실태…인터넷 서점 등장 후 격화

출판계에 대형 악재가 닥쳤다. 출판사 자음과모음이 책 3종을 사재기해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갓 출간한 책을 자사의 돈으로 대량 매수해 판매 부수를 조작하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해당 출판사만의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후폭풍이 업계 전체를 덮쳤다. 그동안 쉬쉬했을 뿐 ‘사재기 베스트셀러’ 수법은 출판계에서 공공연한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만드는 일은 여타 사업과 다르다. 사회적 공공재라 할 수 있는 지식 및 담론 영역과 관련된 탓이다. 이른바 ‘출판 윤리’에 대한 요구가 강하다. 마치 교육자가 추문의 주인공일 때 강도 높은 비판이 쏟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출판계를 향해 사회적 비난의 목소리가 들끓는 이유다.

이번 사태의 책임을 각 사업자의 윤리 의식 결여로만 돌릴 수 있을까. 출판계 관계자들은 ‘사재기 베스트셀러’ 관행이 최근 10여 년 동안 출판 시장이 급속히 왜곡되면서 만연하게 된 구조적 해악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사재기를 하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분위기다” “정도를 걷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사재기의 유혹을 벗어나기 정말 힘들다”고 말한다. 출판사가 불법적인 꼼수를 쓰는 근본 원인은 시장의 구조 자체에 있다. 그 속에서 곪아온 고름덩이가 이번에 터졌다는 것이다.

5월17일 서울의 한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책이 진열돼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출간 후 일주일’에 운명 갈린다

책 사재기의 역사는 길다. 이미 1990년대 초에도 서울 주요 서점을 돌며 신간을 사들이는 이들이 있었다. 출판사에서 고용한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사재기가 업계 전반을 잠식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 변화는 2000년대 들어 찾아왔다. 인터넷 서점의 등장과 함께였다. “출판계에서는 (이번 책 사재기 파문이)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다들 해왔고 알고 있던 것이 이제야 수면 위에 드러났을 뿐이다.” 2003년부터 올해 초까지 10년간 여러 중소 규모 출판사 영업직을 거친 배 아무개씨(41)의 말이다.

배씨가 처음 업계에 발을 디뎠을 때 인터넷 서점은 태동 단계였다. 인터넷 서점이 소규모 출판사에 직접 연락해 책을 달라며 부탁하던 시절이다. 그런데 불과 수년 만에 전세가 역전됐다. 저렴한 가격과 간편한 배송 시스템으로 무장한 인터넷 서점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시장의 ‘갑’으로 자리매김했다.

인터넷 서점의 성공은 책을 사고파는 과정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각 책의 실시간 판매 부수, 주요 베스트셀러 목록, 추천 도서 목록, 구매자 후기 등의 정보가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통됐다. 이에 대해 20여 년간 출판계에서 일해온 한 출판업자는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책을 고를 때 상대적으로 주관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책을 실제로 넘겨보면서 자신이 읽고 싶은 것을 고른다. 반면 온라인 서점에서는 홈페이지에 콘텐츠가 어떻게 편집되어 있는지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인터넷 서점은 동네 서점 상권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온라인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대형 오프라인 서점도 전국 각지에 점포를 늘려나갔다. 이는 독자가 책을 구매하는 플랫폼을 단순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온라인 서점이나 대형 오프라인 서점에서 구매자 서평, 판매 부수, 베스트셀러 순위 등을 참고하며 책을 사는 문화가 확산됐다.

그 결과 ‘노출’이 생명이 됐다. 책을 구매하는 경로가 단순화·표준화되면서, 새로 나온 책이 핵심 플랫폼을 통해 얼마나 자주 노출되는지가 중요해진 것이다. 출판 시장에서 입소문이나 베스트셀러의 위력이 한층 막강해진 배경이다. 베스트셀러 순위는 주간 단위로 집계된다. 출간 후 첫 주 안에 어떻게든 순위권 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매주 쏟아지는 신간 사이에서 내용만으로 주목받기란 쉽지 않다. 무슨 수를 쓰든 신간의 대중 노출 빈도를 높여야 한다.

수백만 원만 들여도 홍보 효과 커

배씨는 신간이 주목받는 과정을 ‘눈덩이 굴리기’에 비유했다. 어떻게든 노출 빈도를 높여 이목을 끌고 나면 판매량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을 갖추는 것은 필수 전제다. 내용과 노출량 모두를 확보하지 못한 책은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어떤 수단으로든 출간 직후에 책을 좀 팔아야 인터넷 서점 귀퉁이에라도 나갈 수 있다. 대형 서점에서도 판매량이 저조하면 판매대 위 자리가 금세 없어진다.”

주요 판매 플랫폼에서의 노출량이 중요해지면서 이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출판사 직원이나 소수의 아르바이트생을 통해 이루어지던 사재기가 좀 더 조직화된 형태로 발전했다.

배씨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출판계 사정에 밝은 이들이 관련 대행사를 설립하면서 흐름이 본격화됐다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효과를 반신반의하던 업자들도 금방 사재기의 위력을 확인하게 됐다. “사재기로 책이 좀 나가니까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 메인에 책이 뜨더라. ‘뜨고 안 뜨고’가 (판매량에서는) 천지 차이다. 한 번 겪고 나면 중독이 되는 거지. 그래서 나중엔 아예 자기가 나서 사재기를 본격적으로 하는 식이었다.”

배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업직원으로 일하는 동안 업계에 알려진 갖가지 수법을 총동원했다. 인터넷 서점을 통한 사재기가 가장 간편한 방법으로 꼽힌다. 출판사 직원들이 주변 지인들에게 아이디를 빌려 사재기한다. 좀 더 계획적으로 나선다면 ‘차명 아이디’를 구할 수도 있다. 인터넷 카페 등에서 ‘공짜로 책을 보내준다’며 아이디를 수집해 사재기하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1000만원 상당의 책을 산다. 서점은 정가의 약 40%를 이윤으로 챙기고, 나머지는 출판사로 다시 돌아온다. 결국 수백만 원만 들이면 인터넷 서점 등에서의 노출량을 크게 늘릴 수 있다.

대형 오프라인 서점에서의 사재기는 사람을 통한다. 아르바이트생에게 서울 시내 주요 서점별로 기간 및 구매 부수를 할당해 직접 사재기한다. 다만 이 방법은 온라인에 비해 인력 관리 및 구매 절차가 번거롭다. 사재기 행위가 적발될 위험도 상대적으로 크다.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 방식이 선호되는 이유다. 다만 온라인 매출과 오프라인 매출 사이에 편차가 크면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오프라인 사재기 역시 어느 정도 수준은 필요하다.

작가 황석영씨는 소설 에 대한 사재기 의혹이 제기되자 절판을 선언했다. ⓒ 연합뉴스
처벌 강화가 능사는 아니다

온라인 서평 이벤트에도 꼼수가 있다. 출판사는 서평을 작성할 대상자에게 직접 책을 발송하지 않는다. 출판사가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주문해 대상자의 주소로 보내는 경우가 많다. 수십 부의 판매량도 책 발간 초기에는 의미가 크다.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에 작게라도 노출되기 위한 최소의 양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책에 대한 입소문을 일으키는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

배씨는 “사재기를 하지 않으려 해도 정공법으로 가면 자신만 바보가 된다. 그런 식으로는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책 시장에서 지난 10년간 출간 직후의 판매고가 그 책의 성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구조가 굳어졌기 때문이다. 책 시장에서의 경쟁은 이미 인터넷과 대형 서점에서의 ‘노출 전쟁’ 양상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출판계는 충격에 빠졌다. 한국출판인협회는 5월8일 발표한 공식 입장에서 ‘이번 문제가 매출 올리기에 급급한 서점과 독자를 기만해서라도 책을 팔고 보자는 출판사의 얄팍한 상술이 빚어낸 공동 작품’이라고 규정하면서도 ‘한 출판사의 양식과 도덕성을 넘어 범(汎)출판계의 구조적 취약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을 사재기 관행을 뿌리 뽑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만 물면 되는 느슨한 처벌 조항을 좀 더 엄격한 벌금형으로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번 파문을 계기로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해 현실성 있는 대책을 수립하려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처벌 강화 위주의 대책에는 한계가 있다고 강조한다. 사재기로 얼룩진 현 출판 시장에는 구조적인 모순이 있어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우선 출판계의 오랜 이슈인 ‘도서정가제 도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한 라디오 방송에서 “독자들이 너무 특정 업체로 몰린다. 정가제로 인해서 동네에 있는 서점들이 살아나고, 독자들이 그 서점에 가서 스스로 책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그나마 이런 폐해를 줄이는 지름길”이라고 지적했다.

중견 출판사 부키의 박윤우 대표는 많이 팔리지 못해 묻혀버린 양질의 책들을 소개하는 ‘아까운 책’ 시리즈를 최근 3년간 발간해왔다. 그는 서점의 본질에 주목한다. 서점은 결국 책을 많이 읽는 이들이 좋은 책을 고르기에 적합한 장소여야 한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책을 열정적으로 읽는 고정 독자층은 전체의 10%나 될까. 그런데 지금 책 시장은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책을 팔아야 할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책을 많이 접하는 독자들이 좋은 책을 판별하는 형태로 시장 구조가 재편돼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의 출판 시장은 ‘노출 전쟁’의 폐해를 극복할 지적 생태계 구축을 요구받고 있다.


출판사는 왜 ‘사재기’ 유혹에 빠지나 


사재기라는 불법적인 수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금에 여유가 있다면 막대한 홍보비를 들여 대중 노출을 늘릴 수 있다. 유명 작가를 섭외하는 것도 그 한 방법이다. 좋은 기획을 바탕으로 탄탄한 내용의 책을 선보여 입소문을 타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비용이나 실제 효과 면에서 사재기만큼 확실한 방법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황석영·김연수·백영옥 등 인기 작가를 대거 보유하고도 사재기를 해야 했던 자음과모음 출판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출판계의 한 관계자는 “출판인 모임 같은 곳에 가면 광고비로 수억 단위의 돈을 쓰는 사례도 들을 수 있다. ‘이 책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기대를 갖고 그렇게 투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데 그마저도 책의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 요즘 시장 분위기”라고 전했다. 베스트셀러나 서평 등에 의존하는 구매 행태가 굳어지면서 전통적인 홍보, 유명 작가 등의 파워 역시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발간 초 판매가 지지부진하면 그 책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각 출판사들이 사재기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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