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노 의원들의 고민, 각개약진 앞으로!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3.05.2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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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교체론’ 등장

“5·4 전당대회 때야 윤호중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일부 젊은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이번 원내대표 경선 때는 정말로 별다른 의견 교환조차 없었다. 물론 나만 쏙 빼고 모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주당 내에서 ‘친노’ 핵심으로 통하는 한 재선 의원은 당내 친노로 불리는 의원들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뒤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제 친노라는 꼬리표가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기자의 도발에 이 의원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선 앞으로도 친노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제는 각자 자신의 실력을 통해 ‘정치인 아무개’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문(愚問)에 대한 현답(賢答)이었다.

문재인 민주당 의원(가운데)이 4월11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한명숙(맨 왼쪽)·이용섭 등 동료 의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5·4 전당대회에서 확인된 싸늘한 당심

지난해 총선과 대선에서 연달아 패한 뒤 민주당 내에서 친노는 사실상 공적(公敵)이 됐다. “우리 모두의 패배”라는 항변은 변명으로 치부됐다. 여기저기서 친노 진영의 좌장 격인 이해찬·한명숙 전 대표의 의원직 사퇴나 정계 은퇴 요구가 쏟아졌고, 심지어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의원을 향해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왔다.

5·4 전당대회 결과는 ‘설마’ 했던 당심(黨心)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줬다. 당 대표 선거에서 친노의 지원을 받은 이용섭 후보가 비주류의 김한길 후보에게 완패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유일한 ‘공식’ 친노 후보였던 윤호중 의원이 최고위원 경선에서 최하위를 기록한 것은 충격이었다. 평소 친노와 각을 세워온 한 중진 의원조차 “윤 의원이 설마 ‘꼴찌’를 할 거라곤 솔직히 예상치 못했다”고 놀라워했을 정도다.

민주당 내에서 친노 진영은 누가 뭐래도 다수파다. ‘범(汎)친노’를 아우르면 전체 소속 의원 127명 중 절반이 넘는 규모다. 그런데 막상 선거전에 돌입하자 이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윤 의원은 맨 하위로 처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윤호중 의원은 전당대회가 끝난 뒤 “대의원들 중에서 ‘당신 친노라며?’라고 묻거나, ‘친노라서 마음을 바꿨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며 “이번 전당대회 결과에는 지난해 총선·대선 패배에 대한 대의원들의 원망이 반영된 것 같다”고 전했다.

최근 들어 당내 친노 의원들은 모임을 갖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홍영표 의원은 “모여 봐야 괜한 오해만 사는 경우가 많고, 또 시급하게 할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각자 지금까지의 정치 행보를 성찰해보고 앞으로 뭘 어떻게 할지를 구상하는 시간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자성(自省)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법조계 출신인 한 친노 의원은 “솔직히 화가 나고 억울한 일도 많지만 당원들이 반성을 요구한다면 몸을 낮추는 게 맞다”며 “이 기회에 우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진심을 제대로 실천하려 애썼는지 돌아보는 것도 좋지 않겠냐”고 했다. 한 비례대표 의원은 최근 이해찬 전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다. 한 수도권 의원은 “나도 친노라 불리긴 하지만 정말로 실체가 있는 비난인지, 근거가 있는 지적인지 의아할 때가 많다”고 항변했다. 다른 비례대표 의원도 “김한길 대표 등 신주류측이 당권만을 의식해 뭐든 친노 탓으로 몰며 마녀사냥식으로 분위기를 끌어온 게 사실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젠 ‘친노’ 아닌 ‘친문’을 주목할 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친노 진영 내에서도 좀처럼 의견이 모아지지 않는 모습이다. 한 중진 의원은 현재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이해찬 전 대표는 대선 때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좀처럼 의욕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세종시 초대 의원으로서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역할을 하겠다는 정도인 것 같다. 한명숙 전 대표는 적어도 여름까지는 본인 재판 때문에, 문재인 의원은 대선 패배 책임론 때문에 당분간은 나서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냥 지금은 각자 도생하는 시기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런 가운데서도 최근 친노 내에서 점차 공감을 얻어가는 주장이 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친노 세대교체론’ 또는 ‘친노 세력교체론’ 정도가 될 듯하다. 이해찬·한명숙·문재인 의원 등 명망가 중심의 계파 틀을 벗고, 4050 세대를 중심으로 ‘노무현 정신’을 노선과 정책으로 구체화하자는 것이다. 비례대표 출신인 김현 의원은 “어차피 지금부터는 4050 세대가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친노 4050은 전대협 간부 출신들이나 미디어를 통해 얼굴을 알린 이들과는 달리 밑바닥부터 실력으로 검증받으며 커온 사람들”이라고 자신감을 표했다. 이인영·우상호 의원이나 임종석·김민석 전 의원 등에 비해 경쟁력이 더 강하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친노 진영 일각에선 내년 지방선거를 하나의 분기점으로 본다. 풀뿌리 민주주의와 지역 균형 발전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지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 전국적 차원에서 신진 세력의 등장이 가능하다는 점 등에 착안한 구상이다. 물론 여기엔 지난해 총선·대선 패배 이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각개 약진하고 있는 친노 진영의 재결집을 도모하겠다는 정치적 의중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상이 실제로 현실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 비례대표 의원은 “이미 친노 진영은 자연스럽게 분화하고 있다”며 “이제는 ‘친문(親文) 그룹’을 주목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친노의 중심이 이해찬 전 대표에서 문재인 의원으로 넘어가는 수준 정도가 아니라 친노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 그룹이 형성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결국 당내 권력 지도가 당권뿐 아니라 차기 대선 주자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으로 이어진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김두관 전 지사 지지 그룹은 더는 친노로 보기 어렵고, 대선 당시 문재인 의원과 함께했던 의원 중 상당수도 친노와는 거리가 멀다”며 “앞으로의 관심은 친노의 부활이나 재집결이 아니라 친문 그룹이 기존의 폐쇄성과 배타성, 패권주의를 극복하면서 확장성을 가질 수 있느냐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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