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값에 팔리고 기술 유출 위험까지
  • 이규대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3.05.29 17:2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TX다롄 조선소 매각 임박…중국 금융기관들 실사 중

‘월드 베스트’(World Best)의 꿈은 끝내 무산되는 것일까. 조선·해양 전문 대기업인 STX그룹(재계 서열 13위)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그룹 전체가 극심한 유동성 위기에 빠진 탓이다. 현재 STX그룹은 조선·중공업·엔진 등 일부 핵심 사업을 제외한 비핵심 사업 및 해외 계열사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매각 작업을 진행 중이다. ㈜STX를 지주회사로 하는 그룹의 지배 구조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STX그룹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야심찬 ‘중·장기 글로벌 전략’을 수립해 실행에 옮겨왔다. 당시는 세계 조선·해양업계가 호황기를 구가하던 때였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찾아온 극심한 업계 불황 이후,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다. 현재 알려진 부채만 15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한때 ‘월드 베스트’ 청사진의 전초기지였던 해외 조선소는 ‘청산 1순위’로 전락했다. 특히 중국 다롄 조선소의 향배가 이목을 끈다. 업계 후발 주자인 중국에 관련 기술이 빠져나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난해 7월30일 중국 다롄 조선소에서 열린 40만톤급 광물운반선 명명식에 참석한 강덕수 STX그룹 회장. ⓒ STX 그룹 제공
전문가들 “기술 유출 가능성 있다”

STX그룹의 글로벌 전략은 2007년 중국 다롄에 대규모 조선·해양 종합 생산기지를 설립하며 시작됐다. 같은 해 유럽의 대형 조선소 2곳을 인수해 STX프랑스, STX핀란드를 각각 설립했다. ‘한국-중국-유럽’을 잇는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겠다는 구상이었다.

STX그룹이 처음부터 글로벌 전략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 초반 조선업계의 활황에 탄력받은 STX그룹은 생산 물량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경남 진해의 조선소를 뒷받침할 ‘제2조선소’가 절실했다. 2003년 무렵부터 남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새 조선소 부지를 물색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부지 확보나 인력 충원 면에서 만족스러운 조건이 없었다.

중국 다롄은 원가 절감 면에서 매력적인 투자처였다. 다롄 시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부지 확보, 인프라 구축 등을 지원하고 세제 혜택도 안겼다. 다롄 조선소는 급성장하는 중국 경제를 겨냥한 전략적 투자의 의미도 있었다.

STX그룹은 조선소 건설에 약 1조7000억원(15억 달러)이라는 큰돈을 쏟아부었다. 60%는 국내와 현지 금융권으로부터의 외부 차입으로, 40%는 자체 자금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공격적인 투자로 조선소를 만들어놨더니 불황이 찾아왔다. STX다롄은 극심한 유동성 위기에 시달렸다. 현재 금융권 차입금은 추가 대출로 인해 1조8000억원까지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STX그룹은 다롄 시 정부에 조선소 지분 75%를 담보로 맡기고 구체적 매각 협상을 벌이고 있다. 중국의 거대 국영기업 중국선박공업집단(CSSC)이 인수한다는 설, 중국 현지 금융사 등이 유상증자에 참여해 경영권을 갖게 된다는 설 등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STX그룹측은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 (STX다롄이) 어떤 형태로 지원을 받아 경영을 정상화할 수 있을지 다롄 시 등과 논의하는 중이다. 다만 지금 나오는 모든 얘기를 검토 중인 것은 맞다”고 밝혔다. STX 사정에 정통한 금융권 인사는 “다롄 조선소는 중국에 넘기기로 하고 실사가 진행 중이다. STX의 절박한 사정으로 미루어 헐값에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STX다롄이 중국 기업에 넘어가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세간의 우려대로 조선·해양 분야의 핵심 기술이 중국에 유출될까. 전문가들은 “과장할 수준은 아니나 일부 기술 유출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내다봤다.

조선·해양업종은 여타 제조업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현장에 투입되는 인력의 전문성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홍성인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업종 특성상 (설비를 인수한다고 해서) 설비 운용 노하우를 빼앗기는 쉽지 않다. 국내 인력이 중국으로 넘어가지 않는 이상 기술 유출이 치명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숙련된 인력의 뒷받침 없이는 손쉽게 핵심 기술을 가로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조선소 설비·운영 관련 기술이 유출될 위험이 크다는 점을 함께 언급한다. 홍 연구위원은 “STX측이 진해조선소를 운영하면서 축적한 노하우를 담아 다롄 조선소를 설계했다. (인력 및 기술만 갖춰진다면) 생산성을 상당히 올릴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향후 중국의 조선업계가 역량을 갖춰나가는 과정에서 다롄 조선소가 좋은 교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현재 중국은 조선·해양 산업을 대대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한국이 고부가가치 상선을 중심으로 세계 정상급의 기술 경쟁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중국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및 막대한 국내 수요를 등에 업고 있다. 양종서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연구원은 “현재 중국은 고급 기술이 필요 없는 벌크선 등을 주로 생산한다. 그러나 성장 잠재력은 매우 크다. 한국만 해도 최근 20년 사이에 국가 지원을 바탕으로 고부가가치 선박 생산 기술을 갖게 된 전례가 있다. 지금 중국은 국력을 총동원해 조선 관련 업종을 지원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런 우려에 대해 STX그룹 관계자는 “일부 기술 유출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다롄 조선소에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 없는 범용 선박 중심의 생산을 해왔다. 엔진과 해양 플랜트 등 고부가가치 사업 비중은 크지 않아 심각한 수준의 기술 유출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STX 위기, 한국 경제 난맥상 상징

“과거 호황기의 경영론을 폐기하고 오로지 생존만을 목표로 경영 전략을 재구성하겠다.” 강덕수 STX그룹 회장이 5월7일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한 말이다. ‘샐러리맨 신화’로 유명한 강 회장은 2000년대 초·중반 업계 활황을 바탕으로 STX그룹을 공세적으로 확장해왔다. 그런 그가 위기를 맞아 ‘호황기의 경영론’을 폐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2008년 이후 본격화된 세계 경제 위기는 조선·해운업계를 전대미문의 불황에 빠뜨렸다. 강 회장의 공세적 경영 전략도 직격탄을 맞았다. ‘성장 신화’에 바탕을 둔 한국 대기업 특유의 발전 공식이 변화한 글로벌 환경에 의해 좌절된 것이다. ‘글로벌 전략’의 실패는 고스란히 국가 기간산업의 기술 유출 우려로 되돌아왔다. 업계의 후발 주자인 중국이 그 틈새를 노린다. 지금 업계 안팎에서 STX그룹의 위기가 ‘한국 경제의 난맥상을 상징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