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0km ‘분리 장벽’, 평화를 갈라놓다
  • 팔레스타인=조철 기자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3.05.29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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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접경 지역 현지 취재

 ‘아랍의 봄’ 소식이 먼 일처럼 여겨지는 중동에는 곳곳에 전쟁이나 테러의 위협이 잠복하고 있다. 내전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폭격까지 받으면서 난민 숫자가 150만명을 넘어섰다.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서는 이스라엘 군인들의 탄압을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나는 피난민이 늘어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주변국과의 화해를 모색하기보다는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입장을 바꾸지 않는 것은 자국 국민의 안전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한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로부터 위협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이란 미사일이 이스라엘을 향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전호진 종교문화연구소 소장은 “이란은 이스라엘을 지상에서 사라져야 할 나라로 규정하고,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아랍 국가들을 결집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지금 이스라엘 접경 지역에는 어느 때보다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5월 초 이스라엘이 두 번에 걸쳐 시리아 영토를 공습했고,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 설치하고 있는 콘크리트 장벽도 완공을 앞두고 있다.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저항이 우려된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에 설치한 높이 4~8m의 콘크리트 장벽. 중간중간 초소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국경이기보다 교도소 담장을 연상시킨다. ⓒ 시사저널 조철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내 장벽도 완공 앞둬

5월17일부터 21일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요르단 등지에서 중동 평화를 위한 회의(MEPI : Meddle East Peace Initiative)가 열렸다. 올해로 10년째다. 기자는 현지 회의에 참가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주변을 취재했다.

MEPI는 5월17일 예루살렘에서 각국 종교 지도자와 정치인들이 모여 종교 화합과 평화 운동에 대한 경과 보고를 한 뒤 팔레스타인 서안 자치지구에 있는 라말라를 방문했다. 라말라로 가기 위해 MEPI 참가자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이스라엘 출입을 감시하는 ‘체크포인트’를 통과해야만 했다.

라말라에 있는 베스트 이스턴 호텔에서는 ‘평화를 향한 방법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토론 참가자들은 이스라엘이 세운 장벽에 대해 경과를 보고하고 대응책을 고민했다.

특히 현직 팔레스타인 국회의원인 무스타파 알바구티가 설명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이른바 ‘이스라엘의 2020 계획’은 이스라엘의 분리 장벽 설치가 팔레스타인 영토를 땅따먹기 하듯 빼앗아가는 것을 넘어 팔레스타인인들을 인종 청소하듯 몰아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는 크게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로 나뉘는데, 그동안 두 지역 간에 물적 교류도 활발하고 왕래도 쉬웠다. 하지만 장벽이 설치되면서 서안 지구마저 여러 곳으로 분리돼 물적 교류는커녕 왕래하는 일마저 힘들어졌다. 무스타파 의원은 “분리 장벽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분리시키는 것을 넘어 팔레스타인을 고립시키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는 그동안 잘못된 정보와 뉴스로 인해 팔레스타인이 많은 오해를 받아왔다고 전제하고, 1947년 유엔으로부터 영토의 44%를 조건으로 이스라엘과의 공존을 제안받았던 역사부터 현재의 자치지구 상황까지 지도와 함께 자세히 소개했다. 그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경호 장벽’이지만 팔레스타인 쪽에서는 ‘분리 장벽’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팔레스타인 영토는 예전에 비해 32%로 축소됐다. 이스라엘이 경찰과 군인을 동원해 정착민들을 탄압한 결과다. 이들은 강제로 빼앗은 땅에 집을 짓고 외국인들에게 싸게 임대하는 정착민 정책을 쓰는 등 범죄 행각을 저지르고 있다. 장벽은 강탈한 영토를 돌려주지 않을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GDP(국내총생산)가 팔레스타인의 20배 이상인 이스라엘이 전기와 물 사용료를 자국민에 비해 2배 이상 요구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기도 했다.

 

MEPI에 참가한 각국 종교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시온문 앞에서 종교 화합을 기원하며 기도하고 있다. ⓒ 시사저널 조철
팔레스타인 분열시킨 정황 드러나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구는 가자 지구와 동예루살렘 지구, 서안 지구 등으로 흩어져 있다. 그마저도 축소되고 분리 장벽으로 더 잘게 쪼개지고 있다. 마을과 마을이 장벽에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곳도 점점 많아진다. 학교를 가로질러 장벽이 설치된 곳도 있다.

분리 장벽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는 팔레스타인정착운동 의장 자말 주메아는 “이스라엘 정부는 2002년부터 분리 장벽을 설치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축출하고 있다. 분리 장벽은 팔레스타인 탄압의 중요한 수단이 돼 수많은 마을을 파괴하고 수십만 명의 피난민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팔레스타인측은 이스라엘이 작성했다는 ‘2020년 이스라엘 마스터플랜’을 세미나 참가자들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그들이 입수한 ‘마스터플랜’은 △갈릴리 지역 개발 계획(이스라엘 영토 편입) △네게브 지역 개발 계획(이스라엘 영토 편입) △예루살렘의 유대교화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로부터의 철수 등이다. 단순해 보이는 이 계획은 결국 팔레스타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다.

양창식 MEPI 회장은 “신은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종교, 인종,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세미나를 마치고 팔레스타인 마을을 나오는 길에는 병목 현상이 심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오가며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은 교도소를 매일 들락거리는 기분을 느낀다는 말이 실감났다. MEPI 참가자들을 태운 버스는 이스라엘군의 검문검색을 받은 뒤 분리 장벽 옆에 새로 난 도로로 진입했다. 분리 장벽은 교도소 담벽보다 높아 보였다. 어디가 끝인지 모르게 이어진 분리 장벽은 평화를 위해 길을 내는 사람들의 발길까지 막아섰다.


“인종을 넘어 젊은 층과 대화 자리 만들어야” 
란 코헨 전 이스라엘 산업무역장관


란 코헨 씨(66)는 이스라엘 국회의원을 거쳐 산업무역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MEPI 10주년 행사에 참가해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대해 반감보다는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를 예루살렘에서 만났다.

 

MEPI 활동이 이스라엘 정부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MEPI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이슬람교·기독교 등 많은 종교가 화합을 이루게 한다. 유대교 라비, 이슬람교 이맘, 기독교 목사 그리고 타 종교 지도자들을 같은 단상에 서게 한다. 3종단이 각기 다른 신이 아니라, 사실은 같은 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MEPI가 이 활동을 계속해 유대교 라비나 이슬람교 이맘에 영향을 미치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동 평화 운동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수만 명일 것이다. 많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MEPI가 던지는 메시지를 볼 것이다. 숫자는 적지만 잘 알려져 있다.

MEPI가 어떤 방향으로 가기를 바라는가.

예루살렘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활동을 전개해나가기를 바란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는 종교 간에 갈등을 빚는 일이다. 그것이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유대교 급진파인 라비와 이슬람교 급진파 이맘이 충돌하면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MEPI에서는 가자 지구의 이맘과 예루살렘의 라비를 함께 만날 수 있다. 군대 가기 전인 12~18세 젊은 층의 대화 자리를 만들면 중동 평화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MEPI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부에 미친 영향은.

정부에 대한 영향은 크지 않다. 정치인들은 외부 단체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 정치적인 필요가 우선이다. 총리와 대통령과 같이 일하고 있지만, 늘 자기에게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MEPI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란 등의 대표자들과 컨퍼런스를 한다면 흥미로운 모임이 될 것이다.


 
 

ⓒ 시사저널 조철
양창식 MEPI 회장은 2003년 중동평화회의를 시작하며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의장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 후 10여 차례의 만남을 통해 신뢰를 쌓았다. 2004년에는 유럽의 유력 언론인 500여 명을 초청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알려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5월21일 현지에서 양 회장을 만났다.

 

올해가 MEPI 행사를 시작한 지 10년째다.

예전에는 미국 정부나 이스라엘 정부나 우리 행사를 지원하기는커녕 말리기 바빴다. 테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대교 극단주의자나 이슬람교 극단주의자 모두 대화를 싫어한다. 그래서 다른 NGO와 연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스라엘을 압박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인 힘만으로는 모자라다. 이스라엘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국제 여론이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변해야 한다고 보나.

이스라엘은 충분한 정치·경제·군사력을 갖고 있다.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주변 약소국을 도와주고 연대해야 한다. 배제하고 배척하려고 하면 독립군을 양성하는 결과를 낳는다. 팔레스타인 분리 장벽을 강행한 것은 궁극적으로 중동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분리 장벽 설치 후 어떤 문제가 발생했나.

가자 지구에선 이미 분리 장벽 설치를 끝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경제적 손실이 있다. 팔레스타인의 노동력을 원활하게 공급받지 못하게 됐다. 값싸고 고급스런 노동력이다. 지금은 필리핀 등지에서 노동력을 구하고 있다. 가자 지구는 하루에 1달러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로 상황이 험악해졌다.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있겠나. 150만명이 거대한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팔레스타인 영토에 정착촌을 만들어 무단 점거한다는데 마찰이 없나.

외국의 유대인들을 그 정착촌에 살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군인의 탄압을 받고 떠난 빈 지역에 고급 주택을 지어 혜택까지 주고 있다. 그 마을이 번성하면 자연히 이스라엘 영토가 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측은 항의할 근거가 없다. 팔레스타인이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다 보니 등기부등본도 없는 땅을 그렇게 무단 점유하는 것이다.

가자 지구에는 하마스(팔레스타인 무장 정파)가 있지 않나.

가자 지구 안에도 비폭력 운동가가 많다. 이스라엘 쪽도 팔레스타인 쪽도 더는 미사일 공격이나 자살 폭탄 테러로는 미래가 없다. 양쪽 모두 내부에서 그런 목소리가 강력한 연대를 갖출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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