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일본 밥상 유럽인 입맛 사로잡다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3.05.2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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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식품 대중화…한국 정부 주도 ‘한식 세계화’와 대비

한국산 스마트폰과 LED TV는 가격에 비해 뛰어난 성능으로 유럽 시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반면 한때 세계 가전 시장을 사로잡았던 일본 제품의 입지는 좁아졌다. 이제 일본의 주력 상품은 디지털카메라와 음향기기, 콘솔게임기 등으로 바뀌었다. 한국의 대중음악과 드라마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마니아층을 형성하자 일각에서는 “유럽에 한류 열풍이 불고 있다”는 성급한 분석을 내리기도 했다. 그 사이 일본 문화는 소박하게 차려낸 밥상을 앞세워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독일 쾰른 대학에 재학 중인 에바 바르도 씨는 겨울 방학 중인 지난 1월, 도서관 매점을 찾았다가 크게 실망했다. 지난 학기부터 팔기 시작한 오니기리(일본식 주먹밥)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니기리를 공급하는 일식당 ‘와라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왜 매점에 오니기리가 보이지 않느냐”며 항의성 게시물을 올렸다. 방학 중이라 잠시 공급이 중단되었다는 답변을 들은 그녀는 개강 후 ‘다시 오니기리를 사 먹을 수 있어 기쁘다’는 글을 남겼다.

지난해 3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음식 박람회에 설치된 일본 부스에서 주방장이 굴 요리를 준비하고 있다. ⓒ EPA 연합
이름과 포장은 일본식, 맛은 유럽식

유럽에서는 이미 일본 식품의 대중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스시’가 대표하던 고급 요리의 이미지를 벗고 오니기리·라면 등 대중성을 갖춘 친근한 제품이 속속 유럽인들의 일상에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3년 전인 2010년 독일의 슈퍼마켓 체인 레베(Rewe)는 일본 닛신 식품의 라면을 팔기 시작했다. 레베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 13개국에서 성업 중이며 독일 내에만 1만5700개의 지점을 둔 대형 프랜차이즈 슈퍼마켓이다. 닛신 식품은 봉지라면 외에도 컵라면, 볶음국수 등 해마다 꾸준히 제품군을 늘려가고 있다. 이미 20년 전부터 독일에 지사를 설립하고 제품 개발에 주력한 데 따른 결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닛신 식품 유럽 지사의 카이 쉰칭거 대변인은 “유럽에서 판매 중인 라면 제품을 일본 음식으로 부르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 그 이유로 그는 “닛신 식품의 라면은 유럽연합(EU)의 식품 안전 규정과 유럽인의 입맛에 맞춰 새로 개발됐다. 제품 생산도 모두 유럽 내에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닛신 식품의 국제화 전략은 일본 식품 대중화 현상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제품의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적 특색은 포장과 제품명 등을 통해서만 보여주고 맛은 현지인의 입맛에 맞추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라면은 쉰칭거 씨의 주장대로 국적이 불분명한 제품이지만 유럽인들은 이를 ‘일본 식품’으로 분명하게 인식하며 소비하고 있다.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다니엘 배르벨 씨도 닛신 라면을 즐겨 사 먹는다. 그는 “진짜 일본 라면 맛이 어떤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 입맛에 맞고 가끔 색다른 요리를 하고 싶을 때 닛신 라면을 산다”고 말했다. 독일 출신인 그는 프랑스 슈퍼마켓에서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일본 식품을 쉽게 접할 수 있어 좋다고 밝혔다. 쾰른 전문대학에 재학 중인 미국인 니키 셰퍼 씨 역시 “슈퍼에서 파는 라면이 진짜 일본 음식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래도 라면은 일본 인스턴트 음식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닛신 식품과는 정반대의 전략을 택해 성공한 사례도 있다. 전통적인 맛과 생산 방식을 고집한 경우다. 독일의 중소기업인 아르헤 나투어퀴헤(Arche Naturkuche) 사는 일본 현지에서 생산된 조미료·장류·차·스낵류 등을 수입해서 유기농 슈퍼마켓에만 공급하고 있다. 이 회사의 제품이 늘어선 진열장 앞에 서면 마치 일본의 어느 상점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일본식 된장인 미소만 하더라도 그 종류가 여섯 종에 이르고 차센(일본식 녹차를 만드는 도구) 등 ‘진짜배기’ 일본 제품이 다양하게 갖춰져 있다.

아르헤 나투어퀴헤 사의 운영 관리자인 슈테판 슈미트 씨는 “특별히 일본 문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우리 회사 제품을 선호한다. 우리 제품의 주 고객층은 친환경 유기농 제품을 즐겨 찾는 고학력자이며, 이들은 외국의 전통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고 말했다. 슈미트 씨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일본에서 생산된 제품이라는 이미지가 판매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환경 보호 의식이 높은 유럽 사람들 사이에서 동양적인 삶의 양식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소비자들은 우리 제품을 구매하면 일본의 전통적인 식품 생산 방식이 명맥을 이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소비자들이 소비를 통해 환경 보전과 해외 전통문화 보존이라는 가치를 실천하는 것에도 관심을 갖는다는 뜻이다.

유럽에서는 1986년 일어난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계기로 유기농 식품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났다. 1990년대 초까지 환경운동의 하나로 여겨지던 유기농 식품 판매는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대중적으로 확산되었고, 2013년 현재 독일만 보더라도 베이식(Basic), 알나투라(Alnatura), 비오컴퍼니(Biocompany) 등 유기농 제품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슈퍼마켓 체인이 성업 중이다.

한식 세계화 사업, 유럽에서는 체감 못 해

슈미트 씨는 소비자들이 환경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만큼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타격도 컸다고 전했다. 그는 “원전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순식간에 모든 물량이 동났다. 그리고는 제품을 찾는 발길이 끊어졌다”고 기억했다. 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 2년이 지난 요즘에서야 매출이 다시 예전 수준을 회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회사 홈페이지의 첫 화면에는 여전히 소비자들의 불안을 달래기 위한 안내문이 올라와 있다. EU가 정한 것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품질 관리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는 “이러한 불안 요소에도 불구하고 유기농 제품에 대한 수요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데 비해 독일 내 유기농 작농 규모는 그 증가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해외 수입이 불가피하고, 앞으로도 일본 식품을 전문으로 들여올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식품의 대중화 양상은 국가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널리 대중화된 독일과 달리 영국에는 아직 라면과 같은 대중적인 일본 식품이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고급 슈퍼마켓 체인에서는 영국 회사가 만든 미소 된장국과 스시, 캘리포니아 롤을 살 수 있다.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일본 식품이 일상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유럽인들의 식탁에 안착하고 있는 일본 식품은 우리의 한식 세계화 사업을 되돌아보게 한다. 지난해 말까지 769여 억원이 투입되었다는 한식 세계화 사업의 효과는 유럽에서는 전혀 체감할 수 없다. 현재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본 음식 대중화 현상은 일본 정부 주도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일본 문화에 흥미를 느낀 현지인들이 수요를 만들어내고 시장이 이에 반응한 것이다. 슈테판 슈미트 씨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나는 원래 대안적인 삶의 양식을 실천하고자 여러 가지를 알아보다가 일본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다 일본 음식을 맛보게 되었고, 지금은 집에서도 스시를 만들어 먹는다”고 말했다. 지속적인 문화 교류를 통해 ‘토양’을 먼저 갖춰야 하는 것이 먼저라는 점을 지적한 슈미트 씨의 말은 그런 과정을 과감히 생략해버린 한식 세계화 사업을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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