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전력 엉터리로 부풀려졌다”
  • 엄민우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3.06.1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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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전력거래소 임원 등 증언 “과도한 예비력 확보가 전력 단가 올려”

원전 비리의 민얼굴은 예상보다 추악했다. 원전 부품 비리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온 국민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전문 영역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검증을 피해왔던 원전의 비리 사슬은 하루하루 마치 경쟁하듯이 새로운 의혹을 쏟아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원전 비리는 국민의 생명과 안위를 개인의 사욕과 바꾼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비리의 사슬 구조를 원천적으로 끊을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원전 부패를 드러낼 ‘메스’ 역할은 검찰이 맡았다. 검찰은 원전 부품에 대한 승인 업무를 담당하는 한국전력기술을 압수수색하고 관련자 소환 조사에 나섰다. 한국수력원자력의 김균섭 사장은 면직 철퇴를 맞았다. 수사가 어디까지 확대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력 산업에 대한 의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사저널>은 전력거래소의 전직 임원 A씨를 통해 현재 국내의 전력 수요 관리가 엉터리로 되고 있다는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내부 출신인 데다 이 분야에서 상당한 전문성을 갖고 있는 인물이어서 그의 발언에 따른 파장이 클 듯하다. 이 인사의 증언을 뒷받침할 복수 관계자들의 얘기도 취재 과정에서 상당 부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현재 전력거래소가 유지하고자 하는 예비전력 400만kW는 과도하게 높은 수준이며, 전력 수급이 비효율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치 전력대란의 마지노선인 것처럼 인식되던 예비전력 400만kW 그 자체를 불신하고 있는 것이다.

ⓒ 시사저널 임준선
“400만kW는 원자력 발전기 4대 용량”

6월 초부터 30℃를 넘는 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TV에서는 연신 전력 수급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냉방기 사용을 자제하라는 캠페인성 보도가 잇따른다. 예비전력이 400만kW 아래로 떨어지면 속보를 연발하며 경고음을 울린다.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공공기관은 반강제적으로 냉방을 자제하고 있다. 절전에 의한 불편은 공공기관 종사자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요즘 ‘백화점이나 은행을 가도 예전만큼 시원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온 국민이 무더위를 참고 냉방을 자제해야 할 만큼 전력 수급 상황에 문제가 있는 걸까.

A씨는 6월4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예비전력을 400만kW 이상씩 유지하면서 국민의 불안감을 조성하고 불편을 강요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밝혔다.

전력 당국은 예비전력이 400만kW 밑으로 떨어지면 ‘관심’ 단계를 발령하며 전력 사용을 자제할 것을 당부한다. 전력 당국이 ‘에어컨 사용을 줄여라’라고 주장할 때 근거로 대는 것이 바로 예비전력이다. 예비전력은 말 그대로 전력 수급 안정을 위해 소비되는 전력 이상으로 확보하고 있는 전력을 말한다.

예비전력은 나라마다 기준이 다르다. 하지만 A씨를 비롯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400만kW 밑으로 떨어진다고 해서 전력 사용을 자제시키는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이다. 발전기 중 가장 용량이 큰 것이 원자력발전기다. 1대당 100만kW의 전력 용량을 수용할 수 있다. 400만kW는 이 원자력발전기 4대 용량에 해당한다. A씨는 “원자력발전소 4개가 동시에 망가지지 않는 이상 400만kW씩 예비전력을 확보할 필요가 없다. 전력 부문이 전문 분야라는 점을 악용해 전력거래소가 국민을 상대로 불안감을 조성시키고 있다”고 증언했다.

실제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400만kW 이상을 유지하는 우리의 예비전력은 미국보다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미국의 전력은 여러 계통으로 나뉘어 있다. 계통마다 다르지만 보통 가장 큰 발전기(원자력)의 1.5~2.5배 정도의 예비전력을 확보한다. 150만kW에서 250만kW 정도다. 영국은 National Grid에서 전력망을 운영하는데 예비전력을 180만~230만kW로 정해놓고 계절에 따라 차등적으로 관리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력거래소 관계자는 “400만kW는 연구용역을 통해 정해진 것으로 당시 한 대규모 발전단지가 완전히 셧다운 됐을 때를 기준으로 정한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은 다른 계통에서 전력을 끌어다 쓸 수 있기 때문에 우리랑 다른 구조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A씨는 “미국이 150만kW를 두고 운영하는 것은 다른 계통에서 250만kW를 끌어 쓰기 위함이 아니다. 아일랜드 계통(단일 계통) 시스템이라고 해도 원자력발전기 4대 분량만큼 예비력을 보유하는 것은 과하다. 미국 텍사스 전력 당국 관계자도 한국 예비전력이 400만kW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나치게 높다’며 미국에서는 소비자단체가 전력 단가가 올라간다고 반발하기 때문에 그렇게 높게 할 수가 없다고 했다”며 전력거래소측 주장을 일축했다. 한편 관련기관에 종사하는 또 다른 전기공학 박사는 “미국의 ERCOT(에르코트) 계통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단일 계통인데 예비력을 250만kW 보유한다”고 말했다.

전정희 의원, EMS 운영 관련 의혹 제기

예비전력을 과도하게 확보하는 이유가 현재 예비전력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인 전정희 민주당 의원은 “전력거래소는 EMS를 사용하지 않다 보니 정확한 운영 예비전력이 얼마인지 모르고 있다. 현재 발표되는 예비전력은 과다하게 책정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EMS란 지난 2002년 220억원을 주고 들여온 전력계통 운영 시스템이다. EMS는 사람이 직접 하기 힘든 전력 수요 예측과 현재 전력 예비력 등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전 의원은 지난해부터 전력거래소가 이 EMS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EMS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아 2011년 9·15 정전 사태가 일어났고, 아직까지도 정확한 예비전력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전 의원의 설명이다. 하지만 전력거래소측은 “비상조치를 취할 때 해당량을 수기로 입력하는 부분은 있지만 실시간 예비력을 손으로 입력한다는 것은 아니다. 해당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검증을 받았고 지금도 조사를 받고 있다”고 반박했다.

전력거래소에서 계통운영을 담당하는 또 다른 관계자는 “올 4월 초 전문가에게 실사를 받아보자고 해서 교수 7명이 수차례 거래소에 왔었다. 아직 진행 중이지만 6월 말 정도에 아마 보고서가 나올 것인데 우리는 EMS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현재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통해 EMS에 대한 기술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과도한 예비전력 확보는 한국전력공사의 적자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력업계 관계자는 “예비전력을 과도하게 확보할 경우 전력 발생 단가가 비싼 발전기까지 돌려야 하는 상황이 오고 이것이 전력 도매가를 높여 한전의 적자를 유발하는 요인이 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똑같은 전기 1kW라도 원자력발전기로 생산할 때보다 LNG발전기로 생산할 때 비용이 더 들어간다. 전력을 필요 이상 생산하면서 단가가 비싼 발전기까지 돌리게 되고, 이는 한전이 발전회사에게 전기를 구입하는 가격을 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6월3일 정홍원 국무총리(왼쪽 두 번째)가 전력거래소를 방문해 수급 상황을 보고받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전력 공급 늘수록 발전사 ‘호황’, 한전 ‘적자’

현재 전력 공급 체계는 한전이 발전사들에게서 전기를 사서 민간에 파는 구조다. 그런데 한전은 전기를 팔면 팔수록 적자를 보고 있다. 발전사에게 비싼 돈을 주고 사서 싼 가격에 민간에 팔기 때문이다. 확인 결과 지난 2012년 3월을 기준으로 한전은 발전사로부터 1kWh당 108원을 주고 사서 소비자들에게 89원을 받고 팔았다. 전기를 팔수록 적자를 보는 셈이다. 이 거래 과정에 개입하는 곳이 전력거래소와 도매가격을 결정하는 비용평가위원이다.

한전은 지난해 전력 구매 가격이 부당하게 책정돼 있다며 전력거래소와 비용평가위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했으나 중간에 접었다. 이와 같은 문제는 전력거래소의 경영평가에서도 지적됐다. <시사저널>이 확인한 전력거래소 경영평가를 보면, 한전의 소송 시도에 대한 지적이 나오자 전력거래소측이 “우리는 공정해야 하고, 발전사 편도 아니고 한전 편도 아니다. 한전이 적자가 나면 전기요금에 기댈 수 있지만 발전사가 적자가 나면 발전소 운영에 문제가 생긴다. 한전에 이해를 시켰다”고 답한 내용이 나온다. 한전이 적자를 보고 있는 사이에 민간 발전사들은 이익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실토한 셈이다.

실제로 국회 산자위 소속인 전하진 새누리당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한전이 적자를 보는 와중에도 민간 발전사들은 이득을 챙겼다. 국내 3대 민간 발전사인 SK E&S는 지난해 영업이익이 7601억원으로, 지지난해에 비해 155.9%나 늘어났다. GS EPS와 포스코에너지 역시 각각 32.2%, 94.3%의 영업이익 증가율을 보였다. <시사저널>이 전하진 의원실로부터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2011년에서 2012년 사이 발전사가 한전에 공급하는 1kWh당 단가는 SK E&S가 127원에서 163원으로, 포스코에너지가 133원에서 161원으로, GS EPS가 124원에서 142원으로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 한전이 민간 발전사에 지불한 전력 구매 비용은 10조4480억원으로 전년 대비 35.7% 증가했다. 지난해 한전은 8179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문제는 한전의 적자가 고스란히 전기요금 인상 요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한전은 최근 2년 사이 네 차례나 전기요금을 인상했다. 적자가 나는 부분을 국민 돈으로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국이 전력 수요를 조정한다는 명목으로 전력 수요 피크 때 전기 사용량을 줄이는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이 재원은 전력기반산업기금이다. 국민이 내는 전기요금 중 3.7%가 전력기반산업기금으로 들어간다. 지난해 상위 10개 기업이 이 제도로 챙긴 돈은 1799억원에 달한다. 비효율적 전력 수급 관리가 국민 생활은 물론 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전하진 의원은 최근 전력 수요 관리 사업의 시장 참여를 통해 전력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전 의원은 “무조건 공급을 늘리자, 혹은 절약하자는 식의 전력 대책은 단순하고 한계가 있다. 해당 법이 전력 수요 관리 시장을 창출하고 전력 시장의 효율성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전력 수급의 효율적 운영과 전기요금 현실화가 이뤄져야 한전의 적자 폭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한 전력 전문가는 “EMS를 통해 예비전력 관리를 효율적으로 해서 전력 구매 대금을 낮추고 지나치게 낮은 전기요금을 적정 투자 보수율(수익률)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까지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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