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방 늙은이 취급받긴 싫다
  • 모종혁│중국 전문 자유 기고가 ()
  • 승인 2013.06.1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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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뿌리 깊은 원로 정치…자식에 대물림하는 구태 여전

‘불교제에 심취해 전국 사찰을 순례해 고승과 환담하는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부부 동반으로 도교 사원을 찾은 우방궈(吳邦國) 전 전인대(全人代) 위원장, 재직 시절의 원고와 연설문을 모아 책을 낸 리루이환(李瑞環) 전 정협(政協) 주석, 수필집을 출판해 베스트셀러로 만든 우관정(吳官正) 전 공산당 중앙기율위 서기….’

최근 중국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퇴임한 정치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과거에도 이들의 동향은 주요 뉴스 중 하나였다. 그런데 요즘 은퇴 지도자들의 ‘노는 방식’이 달라졌다. 전국을 주유하며 자신들의 과거 치적을 둘러보고 지방 지도자에게 영향력을 과시하던 이전과 달리, 요즘은 인민들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듯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퇴임 원로가 된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오른쪽)과 권력을 물려받은 시진핑 주석이 지난 3월27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악수하고 있다. ⓒ XINHUA 연합
장쩌민은 사찰 순례, 우방궈는 도교 심취

5월30일 발행된 주간지 <남방주말>이 소개한 일부 지도자들의 은퇴 후 종교 생활은 파격적이다. 무신론자인 공산당 최고 지도부가 불교와 도교에 몰입하고 있다. 재임 때부터 공식 행사로 불교 사원을 다니며 고승들과 불법을 논하던 장쩌민 전 주석은 퇴임 후 더욱 열심히 사찰 순례에 나서고 있다. 3월 퇴임한 우방궈 전 위원장은 도교에 빠져들었다. 그는 4월 청명절 때 베이징의 도교 사원인 바이윈관(白雲觀)에서 열린 도교 행사에 부인과 함께 참석했다. 전진파 조사전을 참관하면서 만난 도사들에게는 도교식으로 인사하는 등 도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줬다.

아직 종교 생활로 서민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심는 지도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관심을 기울이는 종교도 중국에서 수천 년간 뿌리를 내린 불교·도교 등에 한정되어 있다. 종교 사찰을 찾는 이들의 행보도 철저히 비공식적이어서 그 실체를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이에 비해 퇴임 지도자들의 ‘출판 정치’는 그동안 통과 의례처럼 여겨졌다. 중국 역대 최고 지도자가 재임할 때나 퇴임 후에 원고와 연설문을 모아 선집(選集)을 내는 것은 하나의 전통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선집> <덩샤오핑(鄧小平)선집> <장쩌민선집>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모두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편집해 인민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일반 당원에게는 지금도 마르크스·레닌 저작보다 중요한 필독서다.

선집이 국가 최고 지도자에게 한정된다면, 개인 저서의 출판은 1991년 보이보(薄一波) 전 부총리가 낸 <중대 결정과 사건에 대한 회고>가 시초다. 그는 공산당 8대 원로 중 한 명이자 지난해에 하야한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 시 서기의 아버지다. 자신의 저서를 통해 마오쩌둥 사후 공식 후계자로 지목된 화궈펑(華國鋒)의 몰락과 덩샤오핑의 복권 및 권력 장악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저서 출판을 통해 이미지를 개선시킨 인물로는 리펑(李鵬) 전 총리를 들 수 있다. 리 전 총리는 재직 중에는 무능함의 대명사로 대중의 원성이 높았다. 싼샤(三峽) 댐 등 거대 토목 사업을 무리하게 진행한 탓에 그 부작용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퇴임 후 7권의 책을 잇달아 출판해 재임 시 행적과 업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홍보했다. 무엇보다 300만 위안(약 5억5500만원)에 달하는 인세로 기금을 만들어 해마다 10명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리펑 기금’은 다른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자신의 이름을 딴 장학기금을 앞다퉈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 은퇴한 지도자들이 종교와 저서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이유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중국에서 공식적인 최고 지도자 자리를 물러난 뒤 배후에서 정계를 주무른 첫 사례는 덩샤오핑이다. 화궈펑을 축출한 덩샤오핑은 당권과 군권을 분리해 1981년 후야오방(胡耀邦)을 당 총서기에 앉혔다. 후야오방이 1985년 대학생 시위대의 요구 사항에 동의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1986년 1월 그를 쫓아내고 자오쯔양(趙紫陽)을 후계자로 내세웠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때는 민주화 시위대와 대화하려는 자오쯔양을 내쫓고 장쩌민에게 권력을 내줬다.

장쩌민은 1992년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까지 거머쥐며 최고 권력자의 반열에 올랐으나 여전히 덩샤오핑의 그림자를 벗어나진 못했다. 특히 같은 해 1월 덩샤오핑이 상하이·선전·주하이 등 경제특구를 돌며 개혁·개방 확대를 주창한 ‘남순강화’는 중국식 ‘상왕 정치’의 위력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흥미로운 것은 장쩌민 전 주석이 덩샤오핑과 똑같은 행적을 보였다는 점이다. 장 전 주석은 2002년과 2003년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직을 후진타오(胡錦濤)에게 물려준 뒤에도 2004년 9월까지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지켰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槍杆子裏面出政權)’는 마오쩌둥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사회주의 국가에서 군권(軍權)의 장악은 매우 중요하다.

장 전 주석은 군권을 통해 후진타오 전 주석을 견제했고, 상하이방 후계자들을 곳곳에 포진시켜 상왕 정치를 펼쳤다. 지난해 11월 교체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7인 중에도 장더장(張德江), 장가오리(張高麗), 류윈산(劉雲山) 등은 상하이방으로 분류된다.

후진타오·리샤오핑 등 아들이 관직 이어받아

지난 3월 후진타오 전 주석이 예상을 뒤엎고 국가주석과 군사위 주석까지 시진핑에게 물려준 것은 상왕 정치의 고리를 끊기 위한 의도로 해석됐다. 후 전 주석은 모든 자리를 내던진 대신 중앙정치국 및 서기처 28명 중 11명을 자신의 공청단파로 채웠다. 국무원 부장(장관)급 25명 중에도 7명이 공청단 출신이다.

이런 후 전 주석도 자식에게 관직을 대물림하는 구태까지는 벗지 못했다. 5월25일 후 전 주석의 아들 후하이펑(胡海峰·42)이 저장(浙江) 성 자싱(嘉興) 시 부서기 자격으로 성 공산당 고위 간부를 영접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후하이펑은 칭화(淸華)홀딩스 사장과 장삼각(長三角)연구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각종 사업 계약을 따내 경제적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이보다 앞선 5월13일에는 우방궈 전 위원장의 아들 우레이(吳磊·37)가 상하이 시 경제정보화위원회 부주임에 올랐다. 지난해 말에는 예젠잉(葉劍英) 전 부주석의 증손자 예중하오(葉仲豪·30)가 광둥(廣東) 성 윈푸(雲浮) 시 공청단 서기가 됐고, 4월에는 덩샤오핑의 손자 덩샤오디(鄧小弟·28)가 광시(廣西)자치구 바이써(百色) 시 핑궈(平果) 현의 부현장 자리에 올랐다.

출판 정치로 한껏 주가를 올린 리펑 전 총리는 아들인 리샤오펑(李小鵬)을 차기 총리로 밀고 있다. 리샤오핑은 국유전력회사인 화넝(華能)그룹 이사장을 지내다 2008년 산시(山西) 성 부성장을 맡아 정계에 입문했다. 지난 1월에는 성장에 올라 고속 출세를 이어갔다. 성장 취임 후 터널 붕괴 사고, 화학물질 누출 사고 등 대형 사고가 일어났지만 사고 수습에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목을 받았고 결국 악재를 잠재웠다.

은퇴한 지도자들의 ‘상왕 정치’가 앞으로도 영향력을 발휘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과거와 달리 요즘 퇴임한 지도자들은 인민의 눈초리를 의식해 서민적인 행보를 보이거나 대중 소통에 역점을 두고 있다. 특히 지난해 10월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는 일가의 재산이 27억 달러에 달한다는 뉴욕타임스의 보도 이후 몸가짐을 조심하고 있다. 원 전 총리는 고향에서 칩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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