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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김일성 떠올리며 ‘묘수’ 찾기

남북 회담 합의부터 파탄까지, 박근혜-김정은 기 싸움 6일 전말

이영종│중앙일보 외교안보팀장 ㅣ 승인 2013.06.18(Tue) 10:3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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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 들어 첫 남북 간 당국 회담이 파국을 맞았다. 현충일 휴일에 전격적으로 나온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특별담화로 시작된 회담 기류가 불과 엿새 만인 6월11일 성과 없이 사라진 것이다. 통일부 안팎에선 류길재 장관의 이름에 빗대 일장춘몽처럼 끝난 당국 회담 무산의 충격을 희화화하는 분위기도 있다. 그의 이름이 ‘6일째’와 발음이 거의 같다는 점에 착안해 만들어진 우스갯소리다.

6월6일 낮 관영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나온 북한의 담화에 휴일을 즐기던 통일부와 대북 관련 부처 당국자들은 황급히 사무실로 뛰어들어와야 했다. 마치 북한의 군 창건일 휴일이던 지난 4월25일 우리 정부가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전격 제안했던 것을 앙갚음하는 듯한 형국이다. 당시 정부는 ‘26일 오전’이란 시한까지 정해주며 “회담이 없다면 중대 조치를 취하겠다”고 통첩성 대북 입장을 밝혔다. 우리 정부의 한 대북 관련 정책 담당자는 “(북한의) 휴일임을 알면서도 ‘돌직구’를 던진 박근혜정부의 통보에 북한측이 적잖이 당황하고 놀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들이 써먹던 전형적인 수법을 남한 당국이 카피했다는 점에서 황당해했을 것이란 얘기다.

김성혜 등장은 朴 의식한 金의 작품

북한이 이를 거부하며 비난 입장을 내자 박근혜 대통령은 개성공단에 남아 있던 남측 인력의 전원 철수를 강행했다. 북한은 철수하는 공단관리위 인력을 붙잡고 시간을 벌려 했지만 허사였다. 박 대통령의 의지가 워낙 강경했기 때문이다. 공단은 인적이 끊긴 흉물로 남았고, 남북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다시 회담 국면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북한은 전례 없이 유연한 태도로 남측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회담의 틀을 격상하고, 장소도 서울로 잡았지만 그대로 따르는 모습이었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최고사령관 자격으로 직접 나서 ‘핵 찜질’이니 ‘벌초’니 하며 대남 위협을 하고 도발 수위를 높이던 분위기와는 확 달라진 모습이었다.

남북 간에 돌연 박자가 척척 맞아 들어가자 일각에선 사전 비밀 접촉설이 나왔다. 개성공단 사태를 계기로 박근혜정부의 핵심 인사가 베이징에서 북측 관계자와 만나 시나리오를 짠 대로 회담 제안과 수용이 진행되고 있다는 관측이었다. 하지만 회담 관련 업무에 오래 종사해온 당국자들 사이에선 “물밑 조율이 이뤄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분석이 대세였다. 이른바 ‘기술자’로 불리는 국정원측 라인이 가동된 흔적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6월12일 서울 개최로 가닥이 잡힌 당국 회담을 논의하기 위해 6월9일 판문점 실무 접촉에 나온 북한 단장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조평통 서기국 부장으로 나온 김성혜는 세련된 스타일과 부드러운 언행으로 남측 회담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여성 대남통이다. 김성혜는 2005년 평양 방문 때 기자에게, 남편이 노동신문사에서 일하고 아이 둘을 두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남측 회담 관계자는 물론이고 기자들과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 다른 북측 인사의 눈치를 보지 않는 모습 때문에 출신 성분이 좋거나 실세 권력자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특히 그가 2002년 5월 미래연합 대표 자격으로 방북한 박근혜 대통령을 안내했던 인물이란 점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회담 관계자는 “당국 회담을 이끈 경험이 일천한 김성혜의 단장 기용이 불안했는지 베테랑 회담 일꾼인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전종수를 보장성원으로 판문점에 내보냈더라”고 귀띔했다. 김성혜는 후에 북측이 보내온 당국 회담 대표단 명단에 포함됐다. 의제와 대표 모두 박 대통령과의 인연을 꼼꼼히 챙긴 맞춤형 회담 틀을 두고 회담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김정은의 작품이란 얘기가 흘러나왔다. 앞서 김정은은 군 총정치국장인 최룡해 특사가 중국 방문을 마무리하던 5월24일께 강원도 원산의 특각(전용 호화 별장)에 머무르며 열흘 넘게 장고한 것으로 파악됐다.

남북 간에 합의된 당국 회담은 개최 하루 전 대표단 명단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결국 파탄 났다. 남측이 통일부장관의 상대역으로 요구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김양건 대남비서를 북한이 거부하자, 정부는 김남식 통일부 차관을 우리측 수석대표로 하는 명단을 보냈다. 북한은 강지영 조평통 서기국장을 ‘장관급’ 단장(우리의 수석대표)이라고 우기며 남측이 차관을 내보낸 데 문제를 제기했다. 회담 무산의 원인으로 꼽힌 수석대표 격 문제와 관련해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안보전략대학원장은 “서로 복심을 다 파악하고, 회담의 한계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대표의 격은 외형적 이유일 뿐 실제로 대화를 진전시켜야 할 태도나 마음가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산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근혜-김정은, 숙명의 만남 예견한 듯

남북 당국 회담 추진 과정은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이 결정적으로 작용했고 실제 실무 접촉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불발 책임을 남측에 떠넘기는 조평통의 6월13일자 담화 중 일부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실무 접촉 남측 수석대표가 합의 문건 토 하나 수정할 권한도 없어 서울의 지령을 받느라 2~3시간 지체했다”고 밝힌 건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얘기다. 그만큼 통일부로서는 청와대의 관심 속에 치러야 했던 회담이었다는 얘기다.

이런 사정은 북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가파른 남북 대치 상황에서 남측 회담 제의를 수용할 결정을 할 사람은 김정은 제1비서뿐이란 점에서다. 결국 두 사람은 남북 회담 테이블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간접 대결을 벌인 셈이다. 장외 전초전 단계에서 멈췄지만 샅바 잡기를 위한 기 싸움의 1라운드를 치렀다고 볼 수 있다. 조평통은 대남 비난 담화 말미에 “북남 당국 회담에 털끝만큼의 미련도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평통은 영혼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북한 대남 라인은 조변석개의 대남 접근 양상을 보여왔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메시지로 북한 회담 단장의 격에 문제를 제기한 박 대통령도 이대로 남북 관계를 방치할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이 각별히 챙겨온 개성공단 정상화는 물론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 상봉 등을 풀어야 한다는 점에서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가동을 위해서는 첫해인 올해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박 대통령의 머릿속에 정상회담이 그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 제1비서도 2002년 박근혜-김정일 면담록을 들춰보며 박 대통령의 대북 인식 등을 토대로 향후 대남 전략을 짜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는 요즘 ‘마식령 속도’라는 신조어를 창조해 북한 관영 선전 매체들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강원도 마식령에 초대형 스키장을 올겨울까지 건설해 개장하라는 지시다. 어쩌면 노동당의 대남 전략가들에게도 박근혜정부와의 대화 돌파구를 열기 위해 마식령 속도를 붙이라는 지시가 떨어졌을 수 있다.

남북 관계는 결국 양측 최고 지도자의 결단에 의해 그려지는 함수 그래프다. 박근혜-김정은 두 지도자는 정상회담이라는 숙명의 만남을 예견하고 있을지 모른다. 냉전 시기 체제 대결을 이끌었던 라이벌인 아버지 박정희와 할아버지 김일성을 각각 떠올리면서 말이다. 이제 격 논란을 넘어 좀 더 근본적인 당국 대화 테이블이 남북 모두에게 필요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 길지 않은 냉각기를 거쳐 다시 의기투합하는 상황이 닥칠 것이란 관측이다. 벌써부터 정부 당국과 북한 전문가들은 6월 말 베이징 한중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대남 태도 변화 가능성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왼쪽)ⓒ 청와대제공, (오른쪽) ⓒ 조선중앙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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