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후손들 ‘땅 찾기’ 집요하다
  • 이규대 기자·양창희 인턴기자 ()
  • 승인 2013.06.18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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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재산 청산’ 후에도 소송·논란 계속돼

친일파 후손의 토지 반환 소송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점화하고 있다. 친일파 민영은의 후손 5명이 충북 청주 소재 부동산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다. 민영은은 국가가 인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4명 중 하나다. 현재 해당 부동산은 청주시 소유이며 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후손들은 이것이 부당하게 개인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후손들은 2011년 청주시를 대상으로 ‘도로 철거와 인도, 부당이득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11월 1심 판결에서 민영은 후손이 승소했다. 원고인 친일파 후손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여론은 들끓었다. 충북 지역 시민사회단체는 ‘친일파 민영은 후손의 토지 소송에 대한 청주시민대책위원회’를 꾸려 활동에 나섰다. 청주시의회에서도 관련 의제가 공론화될 만큼 지역 사회의 반향이 예사롭지 않다. 현재 해당 소송은 피고 청주시가 항소해 2심 공판이 진행 중이다.

지난 3월27일 ‘친일파 민영은 후손의 토지 소송에 대한 청주시민대책위원회’가 청주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a뉴스
친일파 민영은 후손 1심 승소

민영은 후손들이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토지는 청주 도심 일대의 12개 필지다. 전체 면적은 1894.8㎡(573평)다. 공시지가로 3억7352만원 상당이다. 문제의 부동산은 청주중학교, 서문대교, 성안길 부근 등 청주 시내 요지에 있다. 실제 가치는 수십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1심 재판부는 청주시가 합당한 점유권 없이 부동산을 도로로 사용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청주시가 도로를 철거하고 해당 토지를 민영은 후손에 인도할 의무가 있다고 봤다. 이뿐만이 아니다. 청주시가 토지를 환수한 후 도로로 활용하면서 얻은 편익을 ‘부당이득’으로 보아 현금으로 반환하라고 판결했다. 2001년 3월22일부터 2011년 10월31일까지 총 2억3113만2000원, 그리고 토지의 최종 반환이 이뤄지기까지 매월 178만원(2011년 한 달 기준 산정 토지 임대료)을 원고 5인에게 나누어서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친일 재산은 2000년대 이후 국가 차원의 청산 작업을 거쳤다.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제정됐다. 이에 따라 2006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가 출범하고 4년에 걸친 활동 끝에 상당량의 친일파 재산을 국고로 환수했다. 그런데 이번에 친일파 후손이 토지 소유권 분쟁에서 승소한 판결이 나온 것이다.

민영은이 남긴 토지는 이미 2009년부터 2010년에 걸쳐 충북 청주와 청원 일대 345평 상당을 환수당한 바 있다. 그런데 똑같은 인물이 소유했던 일부 부동산에 대해서는 국가의 환수 대상이 아니라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그 배경에는 어디까지 친일 재산으로 인정하고 청산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의 기준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난맥상이 있다.

청산 당시 ‘친일 재산’으로 분류 안 돼

조사위의 친일 재산 청산 작업에는 엄격한 기준이 필요했다. 만약 친일 재산임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제대로 확립돼 있지 않으면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재산권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역효과가 우려됐기 때문이다. 청산 작업이 광복 이후 50여 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시작된 탓에 그 위험성은 더욱 컸다.

특별법에서는 재산 환수 대상자에 대해 을사늑약·한일합병조약 등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자,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자, 일본제국의회의 의원으로 활동한 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자 등으로 한정했다. ‘친일 재산’이란 이런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국권 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 시(1904년)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하거나 이를 상속받은 재산 또는 친일 재산임을 알면서 유증·증여를 받은 재산’으로 정했다.

민영은이 친일 재산을 보유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핵심적인 이유는 1924년부터 중추원 참의로 활동했다는 데 있다. 조사위는 중추원 참의가 당대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로서, 오랜 기간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한 공을 드러내는 역사적 사실로 해석했다. 민영은이 1924년 중추원 참의에 오른 후 취득한 재산은 모두 친일 재산으로 보고 국가에 귀속됐다.

문제는 그 시기 이전에 취득한 재산이다. 그 재산을 친일 행위로 취득한 재산으로 볼 수 있을지가 쟁점이다. 조사위는 고민 끝에 ‘중추원 참의 임명 이전에 취득한 재산의 경우 위원회가 입증할 수 있는 상당한 친일 행위가 있을 경우에만 국가에 귀속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친일 재산에서 제외’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에 대해서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 제2조에서 제시하는 20가지 행위를 그 법적 기준으로 삼았다. 이번에 문제가 된 12개 필지는 민영은이 1914년부터 1920년 사이에 취득한 땅이다. 조사위 활동 당시 친일 재산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이유다.

친일파 민영은의 후손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청주중학교 인근 도로. 작은 사진은 민영은. ⓒ 연합뉴스
“역사 정의에 역행하는 행태”

공교롭게도 이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문제의 부동산은 민영은의 상속자인 그의 아들이 숨진 후, 손자녀들이 미국과 서울로 흩어지면서 사실상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땅을 청주시가 접수해 도로로 사용해온 것이다. 그러나 토지대장에는 여전히 8필지의 소유권자가 ‘민영은’으로, 나머지 4필지의 소유권자는 그의 아들로 남아 있다. 후손들은 이를 근거로 뒤늦게 재산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청주시는 공판 당시 ‘일정 기간 이상 시가 토지를 점유해왔으므로 소유권은 시에 있다’ ‘민씨 일가가 사실상 사용 수익을 포기하고 부동산을 시에 기부한 것과 같다’ 등의 주장을 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토지대장의 기록을 근거로 “지적공부를 관리하는 지방자치단체인 피고(청주시)로서는 이 사건 각 부동산이 타인 소유임을 알면서 점유를 개시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봤고, 이를 청주시의 ‘무단 점유’라고 규정했다.

조사위 조사에 따르면, 민영은은 중추원 참의로 활동하기 이전부터 각종 친일 행위를 했다. 1912년부터 충북 지방토지조사위원으로서 6년 동안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했다. 1915년에는 일본 교토의 일본 국왕 즉위식에 참석했다. 1919년에는 3·1운동의 확산을 막는 청주자제회 회장을 맡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이 제시한 20가지 행동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시 획득한 재산을 ‘친일 재산’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1심 판결 이후 청주시와 지역 시민사회에서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결과라는 반응이 나왔다. 후손들의 소송 행위 자체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거세다. 손현준 시민대책위원회 상임대표는 “후손들의 토지 반환 소송은 역사 정의와 국민 정서에 역행하는 행태”라고 비판했다.

만약 민영은의 후손이 최종 승소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청주시 관계자는 “후손들로부터 해당 토지를 사들이는 방향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결국 친일파가 일제 강점기에 획득한 재산권을 인정해주기 위해 수십억 원대의 혈세를 들여야 하는 셈이다.

국가의 친일 재산 청산 작업은 2010년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번 소송이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과연 민영은 후손들의 땅 찾기 소송은 어떤 결말을 맞을까. 국민의 시선이 여기에 쏠려 있다.  


‘친일파 토지 반환 소송’ 역사 


친일파 후손 중 최초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한 인물은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씨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총 17건의 연쇄 소송을 벌여 4차례 승소했다. 특히 1997년 7월 소송에서 승리해 되찾은 서울 서대문구 일대의 토지는 당시 시세로 30억원에 달했다. ‘친일 행위로 얻은 땅이라고 해도 사유 재산을 국가가 법적 근거 없이 마구잡이로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였다.

을사늑약 당시 궁내부대신으로 고종을 협박했던 친일파 이재극의 후손도 1996년 파주 문산읍의 땅을 찾겠다고 나섰다. 1심 재판부는 ‘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 법의 보호를 구하는 것은 정의에 반한다’며 소송 각하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2003년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원심을 뒤집고 이재극 후손의 손을 들어줬다. 판결의 취지는 이윤형씨가 승소했을 때와 같다.

친일파의 자손이 연이어 땅을 되찾자 여론은 들끓었다. 특별법 제정 청원 운동이 일어났다. 결국 2005년 12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의결됐다. 친일 행위를 통해 얻은 재산을 국가가 환수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조사위의 활동과 특별법의 존재는 향후의 소송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친일파 후손들은 조사위에 강하게 반발하며 무더기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들의 승소율은 극히 낮았다. 새로 입법된 특별법이 이들의 재산권을 제한할 법적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일진회’를 만든 대표적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은 인천 부평구 소재의 2500억원대 토지를 돌려받기 위해 2003년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1년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환수한 친일파 재산은 ‘빙산의 일각’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하며 친일파 168명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켰다. 조사 대상이 된 토지는 총 2284만㎡(690만9100평)였다. 서울 강북구와 맞먹는 면적이다. 이 중 조사위가 국가 환수 결정을 내린 토지는 절반가량인 1113만㎡(336만6825평)다. 당시 시세로 따지면 총 2106억원에 해당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조사위가 환수한 토지는 친일파 재산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한 예로 2007년 5월 위원회의 1차 환수에서는 이완용·송병준 등 반민족행위자 9명이 일제 강점기에 갖고 있던 땅의 단 0.64%밖에 환수하지 못했다. 이완용의 경우 일제 강점기 토지조사 사업 당시 여의도의 1.9배 면적인 1572만㎡(475만5300평)의 땅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위원회가 귀속시킨 땅은 0.09%에 불과한 149만㎡(45만725평)였다.

제대로 된 조사가 너무 늦게 이뤄진 것이 문제다.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이미 대부분의 토지들을 팔아 현금화한 것이다. 당시 친일파 재산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 역시 사실상 불가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준식 전 조사위 상임위원은 “현재 친일파 재산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대부분의 재산이 이미 처분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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