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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수사 발표’ 배후에 거대한 음모 있다

지난해 12월16일 긴박했던 그날, 누가 김용판을 움직였나

조해수 기자 ㅣ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3.06.26(Wed) 09: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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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화의 역사 소설 <영원한 제국>은 영화로까지 제작된 베스트셀러다. 이 소설은 조선 말기인 1800년(정조 24년) 음력 1월19일 단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날 벌어진 의문의 살인 사건을 통해 당시 정조를 둘러싸고 극에 달했던 왕권 정치와 신권 정치의 대립, 즉 당파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내고 있다. 단 하루가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음을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18대 대선을 불과 사흘 앞둔 지난해 12월16일. 이날 하루 역시 대한민국의 흐름을 바꿀 만한 흥미로운 일들이 전개됐다. 6개월이 지난 지금, 이날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정국은 요동치고 있다. <시사저널>은 최근 검찰의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 수사 결과, 경찰의 증거 분석 진행 상황 일지, 서울지방경찰청(이하 서울청) 및 수서경찰서(이하 수서서) 사이의 ‘수·발신 문서대장’ 자료 그리고 취재 결과로 확인된 당시의 정황을 토대로 대선을 사흘 앞둔 12월16일 문제의 그날 긴박했던 상황을 다시 들여다봤다.

 

   
ⓒ 시사저널 임준선
“실제적으로 이거(선거 관련 댓글)는 언론 보도에는 안 나가야 할 거 아냐.”

“(나가면) 안 되죠. 나갔다가는 국정원 큰일 나는 거죠. 우리가 여기까지 찾을 줄은 어떻게 알겠어.”

“우리가 판단하면 안 되고. 기록은 (보고가) 올라가겠지만, (언론에 공개는) 안 하겠지.”

12월16일 새벽 1시16분, 서울청 사이버범죄수사대 디지털 증거 분석실의 분석관들이 나눈 대화 내용이다. 분석관들은 선거와 관련된 댓글 분석 결과는 언론 브리핑에서 삭제돼야 하며, 분석 결과가 상부에 보고되더라도 언론 브리핑에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직적 은폐 시도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하루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12월15일 새벽 4시2분께 영상을 보면 분석관들은 중요 증거인 ID와 닉네임들을 발견하고 “이제 분석은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며 박수를 치고, “고기를 사달라”며 기뻐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때만 해도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분석 결과를 바로 수사팀에 넘기려고 했던 듯하다.

검찰은 김용판 전 서울청장이 12월14일부터 16일까지 주말에도 출근해 직접 보고를 받았으며, 15일 오후부터 “국정원의 선거 개입 및 정치 관여 혐의는 없다”는 취지의 보도자료 초안을 미리 작성하도록 지시했다고 보고 있다. 또한 보고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손으로 직접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했고, “수서서 수사팀에는 분석 결과를 알려주지 말라”는 지침을 내린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광석 당시 수서경찰서장(맨 왼쪽)이 국정원 여직원 댓글 의혹과 관련한 중간 수사 결과 발표를 지켜보고 있다. ⓒ 연합뉴스
야  “여당, 경찰 발표 내용 미리 알았다”

이와 같은 경찰의 내부 지침이 새누리당에 실시간으로 유출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16일 낮 12시. 김무성 당시 박근혜 캠프 총괄선대본부장은 기자들과의 오찬에서 “국정원 여직원 PC 1차 조사에서 아무런 댓글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경찰은 눈치 보지 말고 오늘 중으로 수사 결과를 공식 발표해달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진선미 민주당 의원은 “사건을 담당했던 (수서서) 수사팀도 모르던 내용을 알았다는 것은 경찰이 디지털 증거 분석 결과와 진행 상황을 박근혜 캠프 선거본부와 긴밀하게 공유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16일 오후에는 경찰 내부에서 이미 ‘혐의 없음’으로 결론을 내고 보고서 작성에 착수했다. 오후 3시34분에 녹화된 영상에는 한 분석관이 “‘비난이나 지지 관련 글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써가려고 그러거든요”라고 말한다. 또 “결과적으로 없는 것으로 하자. 그거까지는 우리가 이야기가 됐잖아. (중략) 진짜 이건 우리가, 지방청까지 한 번에 훅 가는 수가 있어요”라고 말한 대목도 나온다. 많은 게시 글 등이 발견된 상태에서 ‘게시 글이나 댓글을 발견하지 못했음’이라는 초안은 허위임이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이를 감추기 위해 ‘게시 글이나 댓글을 게재한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로 표현을 고치는 등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사건을 처음 담당했던 수서서는 12월16일 오후 5시, 서울청에 보낸 ‘키워드 검색 관련 수사 협조 의뢰’ 공문을 통해 키워드 검색을 4개로 축소했다. 당초 수서서는 78개 키워드 검색을 요청한 데 이어 20여 개를 추가 의뢰한 상태였다. 수서서가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서울청의 집요한 압력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청은 이미 12월15일부터 대선 전에 국정원 정치·대선 개입 의혹을 해소해주는 것으로 방향을 잡고 12월16일 발표를 추진하기 위해, 키워드를 ‘문재인, 박근혜,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등으로 줄이라고 수서서에 수차례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당시 서울청 김 아무개 수사2계장이 권은희 수서서 수사과장에게 직접 전화해 압력을 행사한 사실도 밝혀졌다.

12월16일은 때마침 마지막 대선 후보 TV토론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날 오후 8시에 시작된 토론회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는 사건과 관련해 “그 여직원이 댓글을 달았는지 증거도 안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같은 시간 서울청에서는 보도자료 작성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4개의 키워드에 대한 분석 작업이 마무리된 것은 오후 9시15분께로,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결과가 나와 있었던 셈이다.

TV토론회가 끝난 직후인 오후 10시40분께, 당시 박선규 새누리당 대변인은 한 방송국 생방송에서 “아마 내 생각에는 국가적인, 국민적인 관심이 있기 때문에 조사 결과가 오늘 나올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서울청이 디지털 증거 분석 결과 보고서를 마무리한 시점도 오후 10시30분 전후다. 이에 대해서 진선미 의원은 “당시 박 대변인은 저녁 9시40분 이전에 스튜디오에 있었기 때문에 방송 시작 전에 경찰의 수사 결과 발표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서울청은 오후 10시37분 분석 결과 보고서를 수서서에 송부했다. 10시42분에는 보도자료까지 전달됐다. 이후 상황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1시께 수서서는 보도자료를 배포했고, 11분 후에는 “국정원의 조직적 비방 댓글 주장은 사실무근”이라는 국정원 보도자료가 나왔다. 다음 날 아침 9시에는 이광석 당시 수서서장이 직접 언론 브리핑을 갖기도 했다.

   
SD 라인이 장악했던 국정원 조직

김용판 전 서울청장은 검찰 조사에서 허위 보도자료 배포 및 언론 브리핑에 대해, 자신이 결정을 내렸으며 경찰청장과 수서서장에게도 16일 저녁때에야 비로소 계획을 알렸다고 진술했다. 자신이 이번 사건의 ‘주연 배우’임을 시인한 것이다.

김 전 청장이 주연이었다면, 국정원은 주연 못지않은 ‘신 스틸러(scene stealer)’ 역할을 맡았다. 국정원 정치·선거 개입 사건의 본질은 수사 축소·은폐 이전에 이명박(MB) 정권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국내 정치에 개입해 공작을 벌였는지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MB 정권 국정원 내에서의 이른바 ‘SD(이상득) 라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은 지난 정권에서 MB와 박근혜 간 갈등이 첨예할 당시에도 꾸준히 박근혜 의원 등 친박계와 친분 관계를 유지해왔다. MB 정권 초기 국정원에는 SD계 인사들이 대거 포진했다. 첫 국정원 기조실장에 임명됐던 김주성 전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SD가 정계 입문 전 대표이사를 지냈던 코오롱그룹에서 35년간 근무한 인연을 갖고 있다. 2010년 민간인 불법 사찰 문제가 불거지면서 SD 라인이 된서리를 맞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영향력은 건재했다는 것이 국정원 내부 전언이다.

김용판 전 청장은 보도자료를 배포하기 직전인 12월16일 오후, 박원동 당시 국정원 국익정보국장과 통화한 사실을 인정했다. 김 전 청장은 “박 전 국장이 ‘주변에서 (경찰의) 디지털 증거 분석은 2~3일이면 끝나는데 발표도 안 하고 미적거리는 것은 민주당 눈치 보기 아니냐면서, 김용판이 도대체 누구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고 밝혔다. 검찰은 박 전 국장에 대해 계속 수사한다는 방침이다. 민주당은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가 “차문희 국정원 2차장이 12월16일 김 전 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박근혜 후보가 잘못해서 토론이 엉망이 됐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신문) 조판 판갈이를 해야 한다’며 허위 수사 결과 발표를 종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주연과 조연을 캐스팅해 이번 작품을 연출한 감독은 누구일까. 그 감독의 실체에 대한 정치권의 공방이 뜨겁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 불구속이 MB와 MB 측근들의 외압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면, 김 전 청장 불구속은 TK 라인의 외압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TK’의 의미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민주당이 TK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를 굳이 사용한 이유는, 이번 사건이 이른바 ‘이명박근혜(이명박-박근혜) 게이트’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MB 정권과 박근혜 후보가 공동으로 기획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박영선 “권영세와 박원동 관계 주목”

이런 맥락에서 민주당이 이번 사건의 배후로 지목한 인물이 권영세 주중대사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2월16일 김 전 청장을 중심으로 권영세 당시 새누리당 선대본부 종합상황실장과 박원동 전 국장이 여러 차례 통화했다는 제보가 있다”고 주장했다. 세 사람은 모두 국정원 근무 경력을 갖고 있다. 권 대사는 한때 박근혜정부의 유력한 국정원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MB 정권에서 국회 정보위 민주당 간사를 지낸 바 있는 박영선 의원은 “박 전 국장은 검찰을 20년이나 출입한 정보원이다. 국회에도 3년간 파견돼 있었다. 그때 권 대사가 국회 정보위원장이었다. 국회에 3년간 파견 나왔다는 걸 강조하는 이유를 알아달라. 여러 제보의 정황으로 미뤄 김 전 청장과 박 전 국장이 이번 사건에서 분명 직거래를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박 전 국장이 이 사건의 ‘플랫폼’인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새누리당의 위기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무소속 안철수 의원 세력에 지지율에서 뒤지는 등 위기를 맞은 민주당이 이번 건을 강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제1야당의 존재감을 한껏 부각시키려 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야권의 공세에 밀리면 자칫 지난 MB 정권 첫해인 2008년의 촛불 시위가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새누리당의 우려대로 검찰 수사 결과 발표 이후 대학가와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국정원 사건에 대한 시국선언이 이어지는 등 반발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이번 파문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사퇴 요구 등 직접적인 선거 무효 논란으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당장 10월 재보선과 내년 지방선거 등 향후 정치 이벤트마다 공격의 대상이 될 공산이 클 수밖에 없다. 국정원 사건은 정국의 주도권을 거머쥐고 박근혜정부를 보위해야 할 새누리당으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이슈인 셈이다.

새누리당 소속의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이 6월20일 ‘NLL 발언록’을 다시 들고 나온 데서도 이런 절박함이 묻어난다. 서 위원장은 자신이 발의한 사이버테러 법안을 다루지 않는다는 이유로, 검찰의 국정원 수사가 본격화된 지난 4월부터 국회 정보위를 열지 않고 있어 의혹을 키우고 있다. 검찰의 국정원 사건 수사에 개입한 의혹을 산 황교안 법무부장관과 곽상도 청와대 민정수석을 넘어 ‘현 정권의 핵심 실세가 검찰 수사 개입의 배후’라는 의혹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당초 NLL 발언록 공개 불가 방침을 고수했던 국정원이 갑가지 ‘발췌록’ 공개에 이어 전문 공개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나서면서, 궁지에 몰린 국정원이 NLL 카드로 정면 돌파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파문이 국내 정쟁을 넘어 남북 문제 등 한반도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김기용-김용판 권력 게임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이사장을 지냈던 영남대 출신이다. 그는 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통하는 최외출 영남대 부총장과 경제학과 2년 선후배 사이다. 김 전 서울청장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달성경찰서장을 지내기도 했다. 달성군은 박 대통령의 의원 시절 지역구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TK(대구·경북) 인사로 ‘박 대통령 인맥’이라고 봐도 이상할 게 없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 민주당에서는 “김 전 청장은 지난해 5월8일 경찰청 보안국장에서 서울청장으로 전격 내정됐다. 김 전 청장이 승진 케이스도 아니었는데 서울청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친박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당시 김 전 서울청장의 직속상관이었던 김기용 경찰청장은 박 대통령과 큰 인연이 없다. 오히려 이해찬 민주당 의원과의 인연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기용 전 청장은 이 의원이 국무총리였던 2004년, 중앙청사 경비대장을 맡으면서 이 의원과 남다른 인연을 맺어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시사저널> 2012년 5월15일자 기사 참조).

이 때문에 김기용 전 청장은 재임 기간 내내 ‘임시 청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실세는 김용판 전 서울청장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았다. 둘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주도권을 놓고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잦았다. 한 예로 김기용 전 청장은 취임 후 학교 폭력 예방에 주력했는데, 김용판 전 서울청장은 따로 ‘주폭과의 전쟁’을 내세웠다. 이를 두고 당시 경찰 내에서는 “김용판 서울청장이 유력 언론사와 공조해 언론 플레이를 펼치고 있다. 이는 (경찰) 수장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김용판 전 청장이 차기 경찰청장을 내다보고 박근혜정부에 확실한 눈도장을 받으려고 했다. 대선 거짓 수사 발표도 김 전 청장의 과잉 충성 결과가 아니겠는가”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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