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초<史草>를 누설한 죄를 엄벌하라
  • 오항녕 | 전주대 교수·국가기록원 심의위원 ()
  • 승인 2013.07.0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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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은 대통령 기록물…공개·열람은 불법

만약 사관(史官)이 자기에게 관계되는 사건을 싫어하거나 친척과 친구의 청탁을 듣고 관련 사실을 없애고자 하여 문서철을 훔친 자는 ‘제서(制書, 국서)를 도둑질한 법률’로써 논죄하여 목을 베고, 사초를 도려내거나 긁어 없애거나 먹으로 지우는 자는 ‘제서를 찢어버린 법률’로 논죄하여 목을 베며, 동료 관원으로서 알면서도 고하지 아니하는 자는 법률에 의하여 한 등급을 줄이고, 사초의 내용을 외인에게 누설하는 자는 ‘근시관(近侍官)이 중요한 기밀을 남에게 누설한 법률’로써 논죄하여 참해야 할 것입니다.

1449년(세종 31년) 3월2일, 조선시대 실록을 편찬했던 사관들이 근무하던 춘추관(春秋館)에서 세종에게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는 세종의 윤허를 얻어 조선의 기록 관리에 관한 기초 법령이 되었다. 이후 연산군 4년 성종 시대 실록을 편찬하던 과정에서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에 적힌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빗댄 것이라고 연산군에게 고자질해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 경험을 바탕으 로 중종 2년에는 사초를 작성하는 과정에서만이 아니라,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사초를 누설해도 마찬가지로 목을 베는 규정이 추가됐다. 이렇게 해서 인류 역사상 거의 독보적인 역사 자료의 지위를 가진 <조선왕조실록>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다.

경기도 성남시 대통령기록관 내 대통령 지정기록서고. ⓒ 연합뉴스
별안간 불거져 나온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북방한계선) 관련 발언이 어떠했느냐는 것은 필자의 논제가 아니다. 그건 다음 문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국정원에서 공개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성격과 그것을 국정원에서 공개하는 것이 과연 적법한가다.

결론부터 말하면,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은 대통령 기록물이다. 대통령 기록이란,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산하거나 받은 기록을 말한다. 정상회담은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직무다. 국정원 소속 공무원이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해 회의록을 작성했어도 대통령의 국정 행위를 지원하는 업무를 수행한 것이므로 회의록은 대통령 기록물인 것이다. 국정원에서는 마치 자신들이 작성했으므로 국정원 기록이지 대통령 기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모양인데, 법률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국회 재적 3분의 2 이상 찬성해야 열람 가능

실제로 국정원 소속 공무원이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해 회의록을 작성했어도, 국정원은 작성이 끝난 회의록을 대통령 비서실에 접수시켜 대통령 비서실에서 관리하는 것이 적법한 관리 방식이다. 나아가 대통령 비서실 소속 공무원이 회담에 배석해 녹음한 녹음 기록을 국정원에서 녹취하도록 지원한 것이라면, 역시 그 회의록은 대통령 기록물이다. 만일 국정원이 대통령에게 보고해 확정한 회의록이 아닌 다른 판본을 보관해왔다면 국정원이 보유한 판본은 회담의 내용을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담은 기록물이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증거로서의 효력을 지닐 수 없다. 이를 ‘진본성(Authenticity)의 원칙’이라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업무상 활용을 위해 “국정원에서 관리하라”고 했다면, 국정원은 대통령 기록물 사본을 접수해 관리한 것이며 대통령 기록물의 사본으로서 관리되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전 회의록을 지정기록물로 지정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지정기록물이란, 군사·외교·안보 등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록의 공개를 일정 기간(최대 15년) 유보해 불필요한 국익의 손상이나 정치적 쟁점화를 피하기 위해 대통령이 비공개로 지정한 기록을 말한다. 이는 ‘대통령기록물법’을 만들 때, 대통령 기록이 바로 공개될 경우 퇴임 후를 걱정한 대통령이 오히려 기록의 생산을 주저하거나 심지어 폐기할 수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보호 장치였다. 물론 법률이 제정되었으니, 이런 취지에 여야 모두 동의한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지난해 12월17일 국정원이 회의록 발췌본을 제작해 제출하고, 올해 1월16일 검찰이 열람한 것은 모두 대통령기록물법에 위배된다.

검찰이 수사상 대통령 지정기록물의 열람이 필요했다면 대통령기록물법 제17조 제4항 제3호에 근거해 관할 고등법원장이 영장을 발부해 대통령 지정기록물 관리 기관인 대통령기록관을 통해 회의록을 열람했어야 했다. 특히 6월20일 국회 정보위원회(정보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국정원이 제출한 회의록 발췌본을 열람한 것 역시 위법이다. 우선 기록관리전문가협회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국회법 제37조에 의하면, 국회 정보위는 국정원 소관에 속하는 사항을 논의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과 관련된 사항을 논의해야 하는 상임위원회는 외교부와 통일부를 소관하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다. 국회에서 회의록 열람이 필요하다면, 외통위에서 대통령기록물법 제17조 제4항 제1호에 근거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 의결을 통해 대통령 지정기록물 관리 기관인 대통령기록관을 통해 회의록을 열람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법이다.

국정원은 말할 것도 없고, 국회 정보위 서상기 위원장 등 회의록을 열람한 사람들에 대한 고발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이나 서상기 위원장의 변명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대통령 기록물이 아닌 일반 공공 기록물이라고 우기면서 위법·범법 행위를 합리화하고 있다. 혹시 정치 논리에 휘둘리기 십상인 검찰이나 법원 역시 이들 손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고민은 거기에 있지 않다. 진정 나라가 나라다운 모습을 갖추기 위해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대통령 기록을 대해야 하고, 나아가 공공 기록물을 관리·보존해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조선 세종 때의 춘추관 수준, <조선왕조실록>을 만들었던 사관들의 수준까지는 요구하지도 않는다.

정권은 바뀌게 되어 있다. 5년 뒤가 될지, 10년 뒤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바뀐다는 점이다. 그 후로도 정권 교체는 또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이 나라가 경험을 쌓아가는 나라, 역사를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는 나라가 되기 위해, 더 가깝게는 지금 주변 나라들과 신뢰를 쌓아가는 품격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중국을 방문하는 대통령에게 이런 불법이 과연 무슨 도움이 될지 정도는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며칠 전 필자는 우리나라의 공공 기록물, 대통령 기록물 관리를 책임지는 국가기록원의 공개 분류 심의회에 참석했다. 비공개나 비밀 기록 하나를 공개하기 위해 국가기록원 실무자들은 토론을 반복하고, 기록 생산 기관 및 유관 기관과 협의하며, 최종적으로 필자가 참석한 심의회의 논의를 거친다. 올해도 이분들, 21세기의 사관들은 18만건의 기록을 재분류해야 한다. 이들이 나라의 기록을 대하는 자세만큼, 아니 그 반만이라도 국회의원·국정원·검찰·법원은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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