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덫에 걸리다
  • 감명국·이승욱·조해수 기자 (kham@sisapress.com)
  • 승인 2013.07.3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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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충수인가 함정인가

지난 18대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선 문재인 의원은 석패했다. 1470만표에 육박하는 득표를 하고도 박근혜 대통령에게 약 100만표 차로 졌다. 전직 대통령 비서실장과 초선 의원의 경력이 전부인 초보 정치인으로서 그는 대단한 경쟁력과 대중 흡입력을 입증했다. 그의 총 득표수는 역대 대통령 당선자들보다도 오히려 많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1149만여 표, 노무현 전 대통령은 1201만여 표, 김대중 전 대통령은 1032만여 표로 당선됐다. 김영삼·노태우 전 대통령은 1000만표도 못 얻고 당선됐다. 48.02%의 득표율 역시 역대 낙선자 중 최고임은 물론, 역대 당선자들의 득표율과 맞먹거나 더 높다. 누구도 문 의원의 다음 19대 대선 출마를 의심치 않았다.

많은 지지자에게 문 의원은 ‘사나이’로 각인되었다. 친구이자 주군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을 끝까지 지킨 ‘의리의 사나이’로, ‘폐족’의 낙인 속에 흩어진 친노 세력을 한데 끌어모은 ‘맏형 같은 사나이’로 인식됐다. 무엇보다 군 복무 시절 특전사 검은 베레모를 쓴 그의 강인한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은 ‘진짜 사나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보수 진영에서조차 “노무현은 못 믿어도 문재인은 믿을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일부 성급한 이들은 “19대 대선의 주인공은 문재인이냐, 문재인이 아닌 다른 누구냐다”라고 5년 후를 미리 점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문 의원은 결코 길지 않은 자신의 정치 인생 중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친노 진영에서조차 “사실상 차기 대권은 어려워진 게 아니냐”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불과 반년 만에 이처럼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꿔놓은 것은 ‘NLL 대화록’, 즉 ‘안보 논리’였다. 자신을 향한 중도·보수 진영의 ‘음해’와 ‘오해’를 이번 기회에 확실히 불식시키고자 호기롭게 승부수를 던졌던 특전사 출신의 이 사나이는, 그러나 스스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지난 7월22일은 그야말로 문 의원과 친노의 입장에서는 악몽 같은 하루로 기억될 법하다. 이날 여야 의원과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대통령기록물 열람위원단은 국가기록원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본’을 찾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대화록 실종’을 확정 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에 문 의원과 친노 그리고 민주당 전체가 시쳇말로 ‘멘붕’에 빠져들었다.

ⓒ 시사저널 자료사진
친노 진영 자중지란…“문재인으론 어려워”

여론은 급반전됐다. 이런 기회를 새누리당이 놓칠 리가 없었다. 문 의원과 친노 진영을 향해 정상회담 대화록 폐기 의혹을 제기하며 십자포화를 쏟아냈다. ‘국정원 국정조사’와 국정원의 ‘NLL 대화록 유출’ 파문으로 궁지에 몰렸던 여권으로서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정국 국면 전환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 한 명을 날려버릴 수 있는 호재였다. 당황한 민주당은 이명박 정권에서의 원본 파기 의혹을 서둘러 제기하고 나섰지만 여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민주당 내 이른바 친노 진영 의원들은 “가슴을 치고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입을 모은다. 저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왜 없나. 진짜 없는 것이냐”고 서로에게 물어보지만, 누구 하나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직 못 찾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무래도 MB(이명박) 정권이 의심스럽다”는 희망 섞인 바람 정도를 중얼거리고 있다.

예상대로 민주당은 여지없이 둘로 쪼개졌다. 친노에 대한 ‘비노’ 중심 신주류의 공격이 시작됐다. 문 의원에 대한 조경태 최고위원과 김영환 전 최고위원의 공격 수위는 같은 당 소속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강도가 드세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책임지라’는 말이지만, 좀 더 심하게 빗대면 ‘정계 은퇴’ 수준까지 요구하는 것으로 비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내 소중한 자산”이라고 했던 말이 무색할 정도다.

민주당 양 계파뿐만 아니라 친노 진영 전체도 자중지란에 빠지는 모습이다. 의원들 사이에서는 노무현 정권 말기 청와대 관계자들의 기억과 증언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반면 노 정권 시절 청와대 관계자들은 민주당의 안이한 대응을 원망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을 향해 무차별 공세를 퍼붓고 있는 새누리당과 언론 보도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민주당 차원에서 이뤄지지 않은 점을 꼽으며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임상경 전 청와대 기록관리비서관은 “일부 언론 보도가 사실과 다른데도 적극적으로 해명해 납득시키지 못한 부분도 있어서 아쉽다”며 “대응에 일부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2007년 8월9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문재인 비서실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의 어설픈 출구 전략이 빌미 제공

궁지에 몰린 문 의원은 7월24일 “국민의 바람대로 NLL 논란, 더는 질질 끌지 말고 끝내자. 대화록이 없다고 하는 상황의 규명은 여야가 별도로 논의하면 될 일이다”라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나 곧 “대화록 정국을 만든 장본인이 대화록 실종 원인에 대한 입장은 물론, 진실 규명을 위한 구체적 해법도 내놓지 않았다”는 더 큰 비난을 자초하고 말았다. “당시 대통령실장으로서 본인의 결백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니, 대화록 공개의 파장에 대해선 너무 안일하게 본 것 같다”는 한 친노 성향 인사의 지적처럼 내부에서도 문 의원의 실축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 친노 성향으로 분류되는 한 3선 의원은 “문 의원이 정계 은퇴까지 거론하며 NLL 대화록 열람을 주장하면서, 당초 핵심 사안이었던 ‘국정원 정치·대선 개입’ 의혹과 ‘대화록 사전 유출’ 의혹이 묻혀버렸다. 결국 새누리당 좋은 일만 해준 셈이 됐다. NLL 논란으로 (민주당의) 분위기가 좋았는데, 단 한 번의 악수로 모든 게 어그러진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친노 진영의 상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하지만 대다수 정치 전문가는 물론 친노 의원들조차 “친노는 이제 시대의 화두가 아니다. 노무현의 가치는 영원하겠지만, 계파로서의 친노는 이제 끝났다”고 말할 정도다. 일각에서는 “이제는 친노가 아닌, ‘친문(재인)’으로 불러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지난해 총선과 대선의 연이은 패배와 ‘친노 패권주의’의 폐해성으로 위기에 몰린 친노 진영이지만, 오히려 더 단단한 결속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도 확실한 차기 대권 주자인 문 의원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전당대회에서 ‘비노’ 진영의 김한길 대표에게 당권을 뺏긴 것도 “대선 패배 책임 차원에서 비주류에 한 번 양보한 것”으로 치부할 정도였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

당초 문 의원이 “정계 은퇴도 불사하겠다”며 대화록 원본 공개를 요구하는 배수진을 쳤을 때만 해도 친노 진영은 “(기대했던 대로) 잘 가고 있다”며 상황을 낙관했다. 오히려 “너무 페이스가 빠른 것 아닐까. 조기 등판으로 자칫 일찍 지치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저쪽(안철수 의원)도 조기 등판한 마당에 차라리 잘됐다”는 목소리에 이내 묻혔다. 하지만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새누리당의 고발로 검찰 수사까지 진행되면, 문 의원이 검찰에 소환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에 따라 친노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친노 진영은 일단은 문 의원 감싸기에 적극 나서고 있는 모양새다. 친노 성향의 한 의원은 “‘사초 실종’을 문 의원 개인 책임으로 몰고 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새누리당도 열람을 제안한 바 있고, 민주당 지도부도 이에 동의했다. 애초부터 NLL 논란의 발단은 새누리당의 정문헌·서상기 의원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강한 응집력을 바탕으로 위기를 헤쳐 나온 친노인 만큼 이번 역시 문 의원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재기를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박원순? 안철수?” 벌써 대안 찾는 목소리

그러나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10월 재보선과 내년 6월 지방선거가 당장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초선인 문 의원이 당내 기반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부산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 지방에서 성과를 내야겠지만, 지금으로선 힘들어 보인다. 내부에서는 “차라리 이참에 뒤로 한참 물러나 있다가 2016년 총선 국면에 전환을 노려보자”는 얘기도 나온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은 “어떻게 하면 빨리 ‘NLL’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이란 본질로 되돌려놓을 수 있을까 하는 게 지금 민주당의 최대 과제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일단 문 의원은 뒤로 빠져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대권이든, 당권이든 유력 보스를 중심으로 줄을 설 수밖에 없는 생리를 갖고 있다. 문 의원 입장에서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그를 대신할 새로운 리더가 필요한데 이 부분이 만만찮은 상황이다.

당장 거론되는 인사가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친노와 비노 양측은 물론 당 밖의 안철수 세력까지 아우를 수 있는 카드라는 것이다. 친노·구주류 진영에서는 문 의원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친노 대표 주자를 이리저리 떠올려보기도 한다. 비노·신주류 진영에서는 안철수 의원을 향한 러브콜이 더욱 구체화될 가능성이 있다. 위기에 빠진 정국 해법으로 안철수 세력과 조기에 힘을 합치는 재창당 수준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손학규 전 대표가 귀국하면 일정 부분 역할에 나설 것이란 얘기도 파다하다. 지금으로선 9월 귀국이 유력해 보인다.

아무튼 ‘문재인-안철수-박원순’ 삼국지 체제로 정립되던 야권의 차기 구도가 ‘NLL 정국’에 따른 문 의원의 실책으로 이제 혼돈의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었다.  


(왼쪽부터)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 ⓒ 시사저널 임준선. 안희정 충남도지사 ⓒ 시사저널 이종현. 박영선 민주당 의원 ⓒ 시사저널 포토
민주당 친노 성향의 한 의원실에서는 “사라졌던 ‘NLL 대화록’ 원본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 한, 문재인 의원을 향한 새누리당의 공격은 4년 후 대선 때까지 집요하게 계속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차기 대권에 이제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은 박원순 서울시장이라고 본다”며 “오히려 저쪽(비노)에서도 문 의원보다는 박 시장에 대한 거부감이 덜할 것이다. 문제는 내년 지방선거인데, 재선에만 성공한다면 날개를 다는 격”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 또한 간단치 않다. 박 시장은 여러 차례 완곡하나마 “지금은 대선에 뜻이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내년 서울시장 선거에 다시 나선다면 여당에서 “2017년 대선을 위해 중도 사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서울시민에게 분명히 하라”고 요구할 것이 틀림없다. 지금 여권에서는 내년 서울시장 선거를 반드시 이기기 위해 ‘빅 카드’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김황식 전 총리와 안대희 전 대법관 이름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거론되고 있다. 설사 박 시장이 내년 재선에 성공하더라도 서울 시정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당내를 일사불란하게 리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그래서일까. 기동민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최근 당내 인사들과 잦은 만남을 가지면서 당내 입지를 키우고 있다는 후문이다.

문 의원을 대신해 친노 세력을 이끌 계파 지도자로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와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거론되기도 한다. 김 전 지사는 지난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문 의원과 함께 친노 진영을 양분했던 한 축이다. 한때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이지만, 친노 진영 내 패권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내부의 적이 많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노 전 대통령의 왼팔로 불렸던 안희정 지사는 친노 진영은 물론 야권에서도 충성도 높은 지지자를 다수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당장 그에게도 내년 지방선거가 발등의 불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재선이 만만치 않다. 만약 재선에 성공하면 친노 진영을 대표하는 대선 주자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 역시 내년 지방선거에서의 재선 여부가 관건인 송영길 인천시장도 있지만, 그를 친노의 대표 주자로 보기는 어렵다는 분석이다.

당내에서는 현재 법사위원장을 맡으며 국정원 국정조사 등의 정국을 이끌고 있는 박영선 의원을 주목하는 이도 있다. 박 의원은 이번 NLL 정국에서 민주당 법사위원들을 이끌며 ‘권영세 녹음 파일’을 공개하는 등 대여 투쟁을 전면에서 이끌고 있다. 이 과정에서 김한길 대표, 전병헌 원내대표 등과 부딪치는 등 구주류의 선봉 격에 나서는 모습이 자주 노출됐다. 다만 내부에서 “지나치게 강성으로 비치는 탓에 호감도가 높은 만큼 ‘비호감’ 이미지도 많다”는 부정적 의견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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