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일승천기에 겁먹었나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3.08.07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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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앞에 할 말 못하는 대한축구협회

일본은 45년 동안 한반도를 강압적으로 지배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올해 광복 68주년이 되지만 일본과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뤘는지 세심하게 따져봐야 한다.

스포츠는 정정당당한 승부의 세계다. 경기장에서뿐만 아니라 관중석에서도 페어플레이가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7월28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에서는 ‘2013 동아시안컵 축구대회’가 열렸다. 우리 국가대표와 맞선 팀은 숙적 일본이었다. 축구 한일전은 전 국민의 관심사다.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일본은 반드시 이기라고 목이 터져라 응원한다. 이날 우리측 응원석에는 축구대표팀 서포터즈 붉은악마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경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한국 응원석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글자가 쓰인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다.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의 얼굴 현수막도 펼쳐졌다. 그런데 그때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들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붉은악마 응원석으로 향했고, 급히 현수막을 철거했다. 붉은악마측에 현수막 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붉은악마는 항의 표시로 후반전 응원을 보이콧했다.

7월28일 2013 동아시안컵 축구대회 한국 대 일본의 경기에서 한국 응원단이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의 초상이 그려진 대형 걸개그림을 펼치고 있다. ⓒ 연합뉴스
‘문화재 응원’도 문화부에서 제동

축구협회는 왜 붉은악마의 현수막을 철거한 것일까. 붉은악마도 의아해했다. 붉은악마 관계자는 “(지금까지) 애국가 연주 중 이순신·안중근 대형 현수막을 펼쳐왔다. 이에 대해 축구와 상관없다는 지적을 받은 적은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도 기존에 사용했던 문구”라고 말했다. 이날 일본 응원단도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흔들다가 제제를 받기도 했다.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원래 일제강점기 일본이 약탈해 간 ‘조선 제왕의 투구’와 ‘갑옷’ 사진을 넣어 만든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합니다’를 쓴 현수막을 응원 도구로 쓸 것을 붉은악마에 제안했다. 조선 제왕의 투구는 일제강점기 도굴왕으로 불린 오구라가 수집한 ‘오구라 컬렉션’의 일부로 조선 왕실에서 내려오던 투구다. 현재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붉은악마는 문화재제자리찾기측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붉은악마는 이를 정치적인 사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정당한 문화재 반환 의지의 표명으로 판단했다. 우리 문화재 환수에 대한 붉은악마의 의지와 애정을 담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걸림돌은 다른 데 있었다. 이런 정황을 인지한 문화체육관광부가 축구협회를 통해 ‘현수막을 펼치지 말라’는 입장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문화부는 민원 회신에서 ‘국가 문화유산의 환수는 문화 교류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국제연맹 주관 축구대회 경기장에서 추진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축구협회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현행 국제축구연맹(FIFA) 규약에는 ‘경기 응원 시 정치적 주장을 금지’하고 있다. 문화부는 이에 대한 우려를 제시했고, 축구협회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에 대해 붉은악마와 문화재제자리측은 ‘과도한 일본 눈치 보기’라고 반발했다. 처음에 사용하려고 했던 ‘조선 제왕의 투구와 갑옷 사진 현수막’은 경기장에 내걸지도 못했는데, 기존에 계속 사용해왔던 펼침막에 대해 제재를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 공동대표인 혜문 스님은 “응원단이 자발적으로 결정한 사항을 정부가 개입하고 방해하는 것은 지나친 월권행위다. 국제 분쟁을 핑계로 정부가 외압을 행사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또한 일본 응원단의 욱일승천기 사용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못 하면서 자국의 응원단을 과도하게 통제·비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욱일승천기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상징하는 전범기다. 방송에 이 깃발이 한번 잘못 나가면 여론의 뭇매를 맞고 해당 방송은 사과문을 내걸어야 한다. 그런데 축구 한일전에서 일본 응원단은 욱일승천기를 자랑스럽게 흔들고 있다. 욱일승천기 응원 자체는 ‘정치적’ 행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대한축구협회는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용해도 문제 삼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지난해 8월 일본에서는 U-20(20세 이하) 월드컵 여자축구대회가 열렸다. 일본축구협회는 처음에는 정치적 논란을 부를 수 있다며 관중들의 욱일승천기 소지를 금지했다가 ‘정치적 논란 부분을 너무 확대해석했다’며 소지 금지를 철회했다. 그리고 일본 관중들은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욱일승천기를 흔들며 응원했다. 지난 4월 일본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에서 열린 ‘2013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F조 3차전 경기에서도 일본 관중들은 욱일승천기를 흔들었다.

7월28일 열린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일본 응원단이 군국주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흔들며 응원하고 있다. ⓒ 뉴스뱅크 이미지
누구를 위한 축구협회인가

일본 관중들의 욱일승천기 응원에 대해 대한축구협회는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FIFA와 일본축구협회에 이의 제기를 하라는 요구에 대해 자체 회의 결과 그라운드에서 선수가 직접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일본 응원단의 욱일승천기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으면서 정치성이 덜한 자국 응원단만 제재하고 있는 모습이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안민석 의원(민주당)은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승천기는 꽤 오랜 시간 경기장에서 버젓이 펼쳐져 있었음에도 대한축구협회는 일본축구협회에 항의는커녕 단 한 번도 유감 표시를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욱일승천기의 경기장 반입을 금지해달라는 우리 축구팬들의 요구에 마땅히 제재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일본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고 지적했다.

FIFA는 경기장 내의 정치적인 색채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지난 런던올림픽 때 박종우 선수는 ‘독도는 우리 땅’ 피켓을 들고 세리머니를 했다가 일본축구협회의 강한 항의를 받고 메달 수여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귀국했다. 당시 대한축구협회는 박종우 선수를 적극 보호하고 옹호하기보다는 일본축구협회에 굴욕적인 문서를 보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에 대해 혜문 스님은 “일본 군국주의의 잔재인 욱일승천기가 우리 땅에서까지 펼쳐지는 것을 축구협회는 본 척 만 척하고 있다. 반면 우리 서포터즈의 문화재 현수막은 전면 금지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가 누구를 위한 협회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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