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치명적 바이러스보다 강하다
  • 이은선│ 기자 ()
  • 승인 2013.08.2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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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로 재난 블록버스터 도전한 수애

<감기>가 수애의 대표작이 될 순 없을 것이다. 재난영화는 캐릭터보다 상황이 더 돋보이는 장르이니까. 배우가 자신의 연기력으로 ‘회심의 한 방’을 보여주고 싶어 선택할 만한 장르는 아니라는 얘기다. 게다가 수애가 <감기>의 시나리오를 받아든 때는,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여자 서연을 연기한 드라마 <천일의 약속>(SBS)을 끝낸 직후였다.

수애는 당시를 “몸도 마음도 몹시 지쳐서 가벼운 분위기의 작품을 원하고 있던 때”라고 말한다. <심야의 FM>(2010년)에 이어 아이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를 연기한다는 것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역시 수애를 괴롭혔다.

<감기>에서 수애가 연기하는 인해는 도시를 덮친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항체를 개발해야 하는 중책을 안은 연구원이자, 어린 딸 미르(박민하)를 살리려는 엄마다. 사람들은 초 단위로 죽어나가고, 도시를 넘어 나라 전체가 패닉에 빠진 상황. 그래도 인해는 절망하며 주저앉을 수 없다. 감염된 딸을 그대로 죽게 놔둘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당연히 인해 캐릭터의 방점은 ‘연구원’보다 ‘엄마’에 찍힌다. <감기>는 바이러스로 폐쇄된 분당의 지옥도를 펼쳐 보이는 동시에 실질적 주인공인 미르의 목숨을 놓고, 인해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그들과 얽힌 구조대원 지구(장혁)의 숨 가쁜 카운트다운을 그린다.

ⓒ 아이러브 시네마 제공
감염된 딸 살리려는 ‘엄마’의 절박함

때문에 인해는 몹시 이기적인 캐릭터로 비치기도 한다. 머릿속에 온통 딸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보니, 주변 상황은 나 몰라라 하는 순간이 여러 번이다. 인해가 연구원으로 설정된 이유는 오로지 항체를 손쉽게 구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함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인해는 용인할 수 있는 절박함과 눈살이 찌푸려지는 민폐 사이를 오간다. 확실히 캐릭터만 놓고 봤을 때는 그다지 매력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래도 인해를 미워하긴 어렵다. 수애 특유의 이미지 덕분이다. 캐릭터의 매력이 배우를 돋보이게 해주는 역이 있는가 하면, 캐릭터가 배우 고유의 매력에 기대는 경우도 있다. <감기>의 인해는 후자다. 수애가 낮고 단정한 목소리로 “제 딸을 부탁해요”라고 말할 때, 지옥 안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자의 힘겨움을 담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화면을 가만히 응시할 때, 인해는 이기적인 여자가 아닌 가여운 여자가 된다.

김성수 감독은 출연할지를 놓고 고심하는 수애를 찾아가 “당신이 연기하면 무엇이든 진짜 같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 ‘진짜 같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인해를 보면 알 수 있다. 수애에게는 관객이 캐릭터에 설득당하게 하는 힘이 있다. 나약한 듯 강단 있는 여인의 모습. 그건 수애에게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수애는 “늘 작품을 선택하는 시점에 가장 자신 있는 연기에 도전하곤 했다”고 말한다. 그것이 시나리오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고, 스스로를 ‘완벽주의자’라고 부르는 배우 수애의 자세이기도 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스스로에 대한 시험 계속

“내 안에 유약한 모습이 많다는 걸 스스로는 잘 안다. 캐릭터를 통해서는 그것을 감추고 싶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떠올렸을 때 내가 원하는 여성상을 생각하도록 이미지를 만들어온 것이다. 그것이 프로의 자세라 믿었다.”

그런 그가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스스로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치매 환자를 연기한 드라마 <천일의 약속>(SBS)이나, 재난 블록버스터에 도전한 <감기>, 끝도 없는 야망을 품은 악녀 주다해를 연기한 <야왕> (SBS)은 하나같이 쉽지 않은 역할이었다(실제 촬영 순서는 <감기>가 <야왕>보다 앞선다).

수애는 “누군가 날 시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힘에 부치는 작품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지난 몇 년은 참 거칠게 지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엔 힘들었지만, 내가 더 단단해지는 계기가 된다면 좋은 일이다.”

<감기>로 도전장을 낸 지금, 수애는 흥행 면에서도 시험대에 올랐다. 스스로는 여전히 대표작으로 <님은 먼 곳에>(2008년)를 제일 먼저 꼽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수애 최고의 흥행작은 첫 영화 <가족>(2004년)이다. 작품마다 안정적인 연기력을 선보여온 것과는 별개로 흥행 성적은 조금씩 아쉬웠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감기>는 그에게 꽤 중요한 의미가 된다. 재난 블록버스터 안에서도 수애는 배우로서 존재감을 확보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감기>의 흥행 결과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물론 재난 상황이 무색하리만치 여전히 단아하고 아름다운 영화 속 수애를 보면, 흥행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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