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떴다고 목소리까지 파나
  • 이형석│헤럴드경제 기자 ()
  • 승인 2013.08.2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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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영화 ‘연예인 더빙’홍수 홍보·마케팅 활용도

지난 7월31일 오후 7시 서울 왕십리의 한 극장. 상영관 입구 로비엔 앙증맞은 레드카펫이 깔리고 작은 무대가 세워졌다. 그 주위로 10대 팬과 사진기자 100명 이상이 몰려 법석을 이루는 가운데 레드카펫 주인공이 등장했다. 아이돌 그룹 2AM의 정진운과 카라의 한승연이었다. 10대 관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사진과 종이를 내밀며 사인 공세를 펼쳤다. 정진운과 한승연의 무대 인사가 이어졌다. “굉장히 실감나게 녹음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재미있게 봐 주시고 들어주세요.”

이날 두 사람이 극장을 찾은 것은 공연이나 방송 때문이 아닌 애니메이션 <에픽 : 숲속의 전설> 시사회 무대 인사 때문이었다. 정진운과 한승연은 미국 20세기폭스사의 애니메이션인 이 작품의 한국 개봉판 남녀 주인공 역을 맡아 목소리 연기(더빙)를 했다. 개봉(8월7일)을 일주일여 앞두고 대규모로 열린 시사회 행사만 봐도 전문 성우가 아닌 아이돌 스타를 기용해 얻는 홍보 효과는 뚜렷했다. 두 ‘주연 배우’가 소속된 2AM과 카라의 멤버가 함께 극장을 찾았고, 동료 아이돌 그룹 레인보우도 방문해 “목소리 연기가 훌륭하다”는 덕담을 한마디씩 남겼다. 사진기자의 카메라는 연신 번쩍였고, 그 흔적은 인터넷 기사에 고스란히 남았다.

관객에 따라 다르겠지만 소년 소녀의 성장담인 영화 속에서 10대 남녀로 분한 정진운과 한승연의 목소리 연기는 크게 나무랄 데 없었다. 극 중 인물의 연령대와 성격이 비교적 잘 맞아떨어진 캐스팅이었다. 이 영화 홍보사 관계자는 조심스러웠다. 시사회 후 “연예 스타가 더빙했다는 이유로 일부 기자나 평론가, 관객이 편견 어린 시선으로 관람하고 평한다”며 “이들의 연기에는 전문 성우의 훈련된 억양과는 또 다른 자연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애니메이션 를 더빙하고 있는 개그맨 박명수, ⓒ 소니픽쳐스 제공을 더빙 하고 있는 가수 한승연(ⓒ 20세기폭스코리아 제공)·정진운. (ⓒ 20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연예 스타 주연 기용 작품 해마다 늘어

하지만 ‘편견’은 근거 있는 사실로 드러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지난 6월5일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쾌걸 조로리의 대대대대모험> 논란이었다. 이 영화의 인터넷 포털 사이트 네티즌 평에는 “추억을 겸해서 보려고 했건만 망한 더빙 때문에…” “어떤 분(관객) 아기가 캐릭터가 이상하다고 울었다고 하네요. 그럼에도 개그맨 더빙 계속하겠죠. 되지도 않는 망발하면서” 등 부정적인 의견이 잔뜩 올라와 있다. 이 영화의 더빙은 KBS2 <개그콘서트>의 주역인 정태호와 신보라였다. 특히 TV 시리즈의 극장판이다 보니 국내 방영 원작에서 더빙을 맡았던 성우 대신 투입된 정태호에 대한 반감이 컸다. 또 박성광·정태호·신보라 등이 목소리 연기를 맡은 <빌리와 용감한 녀석들> 1, 2편 역시 관객으로부터 만만치 않은 비판을 받아야 했다. <개구쟁이 스머프2>의 경우엔 가가멜 역할을 맡은 박명수를 타깃으로 한 비난이 적지 않다.

이런 논란에도 최근 아이돌 스타, 개그맨, 영화배우, 탤런트 등 전문 성우가 아닌 연예 스타를 목소리 연기진으로 기용하는 애니메이션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홍보와 마케팅의 장점 때문이다. 특히 최근 몇 년 새 어린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국내외 애니메이션의 개봉이 폭발적으로 늘고 시장도 확대되면서 흥행 경쟁이 과열되자, 이러한 연예 스타 더빙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국내에서 개봉한 애니메이션 편수는 지난 2009년 29편에서 2010년 28편, 2011년 41편, 2012년 44편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올해는 그 폭이 훨씬 커서 8월 첫째 주까지 개봉작이 무려 39편에 이른다. 애니메이션 관객도 늘어났다. 한국콘텐츠진흥원 통계에 따르면 2009년 약 1000만명이던 관객이 지난해엔 1600만명에 달했다. 전문 성우가 아닌 연예 스타를 주연으로 기용한 작품은 2011년엔 전체 41편 중 6편에 불과했으나 2012년엔 44편 중 14편으로 늘어났다. 올해는 8월 첫째 주까지 개봉한 39편 중 무려 18편이나 됐다. 두 편 중 한 편은 연예 스타가 더빙에 참여한다는 말이다.

애니메이션 를 더빙하고 있는 소녀시대 서현과 태연. ⓒ upi코리아 제공
저가 영화의 개그맨 더빙 수준 논란

애니메이션 시장의 성장과 수입 및 개봉 편수의 증가는 중소 배급사에 의해 비교적 저가인 10만~20만 달러에 국내에 들여오는 작품이 늘어난 데 힘입은 것이다. 연예 스타, 특히 개그맨들의 더빙 수준 논란은 대부분 이러한 작품에 집중돼 있다.

왜냐하면 세계 애니메이션의 메이저로 꼽히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인 월트디즈니(픽사), 드림웍스, 20세기폭스, 소니픽처스의 작품이나 일본의 명가 지브리 스튜디오의 영화는 더빙 없이 자막으로 상영하거나 전문 성우를 기용한다. 연예 스타 더빙은 본사에서 각 지역별로 까다롭게 관리·감독한다. 지난해 개봉했던 월트디즈니의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국내 더빙 버전 주연은 <써니>로 유명한 배우 강소라가 맡았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 프로듀서에게 직접 오디션 과정을 거쳤으며, 미국 본사를 방문해 국내에 필름을 들여오기 전 편집본을 미리 보기도 했다.

디즈니의 또 다른 작품인 <주먹왕 랄프>의 정준하 역시 본사에 의해 목소리 감수를 거쳤다. CJ엔터테인먼트가 배급했던 드림웍스의 <가디언즈>는 이제훈·류승룡·이종혁·한혜진·유해진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한 애니메이션이었다. 개그맨이라고 항상 논란에 시달리는 것은 아닌데 양상국·김준현·안윤상이 목소리 연기를 했던 <모모와 다락방의 수상한 요괴들>의 경우엔 더빙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로 유명한 지브리 스튜디오 출신들이 만든 작품이다.

국내에선 주로 CJ엔터테인먼트에 의해 개봉되는 드림웍스 작품, 할리우드 영화사가 직배하는 디즈니·소니·20세기폭스의 애니메이션, 열혈 팬을 거느린 일본의 아동용 TV 시리즈 극장판(<짱구는 못 말려> <포켓몬스터> <도라에몽> <원피스> <명탐정 코난> 등)의 경우 인지도·작품성·배급력에서 우위에 있기 때문에 개그맨이나 연예 스타 더빙 의존도가 낮다. 반면 최근 증가한 중소 규모 수입사의 애니메이션은 연예 스타를 쓰지 않으면 흥행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사정이 있다. 특히 여름·겨울 방학, 5월 등 성수기의 경우엔 어린이가 좋아하는 개그 프로그램이나 예능 프로그램 스타가 ‘흥행 카드’로 꼽힌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와 일본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은 관객 연령층이 성인을 포함해 다소 높은 반면, 중소 규모 수입사의 작품은 아동용이 많다는 것도 연예 스타, 특히 개그맨의 출연을 늘리는 원인이다.

이들은 더빙뿐 아니라 예고편, 제작발표회, 인터뷰, 무대 인사 등 홍보·마케팅 전반에 관해 영화 수입사와 계약을 맺는다. 연예 스타의 출연료는 일반 성우의 10배 정도인 2000만~5000만원에 이른다. 개그맨들이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각광받자, 이들이 작품 속에서 활용하는 자신의 유행어가 작품을 훼손하고 감상을 방해한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10여 편 넘는 애니메이션을 홍보한 이노기획의 김도희 과장은 “가뜩이나 어려운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개봉 편수가 급증하다 보니 어지간한 작품은 극장주의 눈에 띄지 않으면 개봉도 할 수 없고, 관객으로부터 외면받는다”며 “연예 스타의 목소리 연기는 홍보와 마케팅에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연예 스타와 개그맨의 목소리 연기 질과 수준은 작품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하긴 어렵다”며 “최근엔 무리한 더빙보다는 홍보대사로 활용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김 과장의 말대로 더빙은 전문 배우가 하고, ‘추천’ 형식으로 연예 스타가 홍보대사를 맡는 게 최근 추세다. 성우의 전문적인 연기력과 연예 스타를 통한 홍보 효과를 모두 다 얻을 수 있어 대안으로 떠올랐다. <토니 스토리 : 깡통제국의 비밀>은 정준하가 홍보대사를 맡았고, <토토의 움직이는 숲>엔 개그맨 홍인규·홍태경 부자가, <슈퍼히어로>엔 배우 정은표·정지웅 부자가 나섰다.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보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얼굴이 잘 알려진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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