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주먹으로 창업해 ‘신화’가 된 일곱 남자
  • 이석 기자·조수영·조유빈 인턴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3.08.2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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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일·강병중·최재호·이정훈 독특한 아이디어와 도전이 성공 키워드

“기업가의 ‘기’는 나라에 따라 ‘企(바랄 기)’와 ‘起(일으킬 기)’로 나뉜다. 일본은 후자로 번역해 기업가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으로 평가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원뜻을 잃어버리고 단순히 비즈니스맨으로 인식하고 있다.”

안철수 의원이 2008년 카이스트에서 ‘기업가 정신’을 강의할 때 한 말이다. 주식 부자들은 대체로 이 ‘기업가 정신’에 충실했다. 주변의 지인들이 “안 된다”고 말릴 때도 차별화된 아이디어와 도전을 통해 성공을 일궈냈다. 쓰러지고 넘어져 실패의 고배를 마시며 와신상담한 적도 있다. “사업가의 삶이 끝난 것 아니냐”는 주변의 수군거림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나 주변을 놀라게 했다. <시사저널>은 올해 조사에서 눈에 띄는 주식 부자 7인의 성공 스토리를 들여다봤다.

 

 

김준일 락앤락 회장 ⓒ 뉴시스
김준일 락앤락 회장(21위, 7041억2100만원)
밀폐 용기에
세계의 돈을 담다

 

김준일 락앤락 회장은 국내 홈쇼핑업계에서 전설로 통한다. 락앤락 밀폐 용기 세트 하나로 분당 1000만원의 매출을 올렸기 때문이다. 2001년 첫 방송 때 준비한 2000세트가 30분 만에 동났다. 다음 방송에서는 두 배인 4000세트를 내놨지만 순식간에 매진됐다. 김 회장은 ‘9회 연속 매진’이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주부들에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회사 매출은 매년 수직 상승을 거듭했다. 해외 수출도 계속 확대됐다. 락앤락은 현재 전 세계 110개국에 수출 중이다. 특히 중국 쪽 비중이 높다. 락앤락의 인지도는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서 99%에 달한다고 김 회장은 말한다. 그는 기자들과 만나 “중국 소비자들은 고급 제품을 선호한다”며 “중국 공장이 있지만 관세와 운임을 추가로 내면서까지 한국에서 생산한 제품을 가져다 팔았다”고 밝혔다. 현지에서 중국 소비자들의 성향을 유심히 살피고 고급화 전략을 펼친 결과다.

그는 지금도 ‘현장에 답이 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지식은 도구에 불과하고, 중요한 결정은 경험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이 김 회장의 지론이다.

그가 1998년 처음으로 락앤락을 개발했을 때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밀폐 용기는 ‘실(Seal)’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락앤락처럼 네 군데에서 잠그는 제품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출시 초기만 해도 판매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원인을 찾기 위해 사무실 근처 월마트를 찾았다. 소비자들은 처음 본 제품에 신기해하면서도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제품을 설명하는 판매 사원을 매장마다 배치해 매출은 뛰었지만, 수익은 고스란히 판매 사원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소비자의 마음을 돌릴 묘책을 고민하고 있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세계 최대 홈쇼핑 채널인 미국 QVC에 소개하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김 회장은 홈쇼핑에 소개할 인포머셜(Infomercial) 광고를 제작하기 위해 직접 미국 마이애미로 날아갔다. 한국에서 실패한 경험을 광고에 반영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물속에서도 젖지 않는 지폐’ 광고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준비한 5000세트가 순식간에 팔렸다. 여세를 몰아 유럽 홈쇼핑 시장에도 진출했다. 해외에서 성공하자 국내 시장 역시 자연스럽게 열렸고, 홈쇼핑업계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됐다. 지난 2분기 락앤락의 매출은 1.4% 감소했지만, 영업이익은 14.5%나 늘어났다. 

 


최재호 무학 회장 ⓒ 연합뉴스
최재호 무학 회장(64위, 2632억7375만원)
손님 구두 닦아주며
시장 개척

 


롯데그룹은 2009년 두산으로부터 ‘처음처럼’을 인수했다. 인수 초기만 해도 자신감이 넘쳤다. 롯데 자이언츠의 연고지인 부산을 상대로 ‘처음처럼 마케팅’을 벌여 점유율을 높일 계획이었다. 롯데는 우선 자이언츠 선수들의 유니폼에 ‘처음처럼’ 로고를 새겨넣었다. 부산 사직구장에 있는 무학소주의 광고를 모두 떼어내고 그 자리에 ‘처음처럼’ 광고판을 붙였다. 당시 롯데가 쏟아부은 마케팅 비용만 수백억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실패했다. 부산 지역의 처음처럼 점유율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롯데의 막강한 유통망을 활용하면서 전국 시장 점유율은 11%에서 15%대로 뛰었지만, 부산 지역에서는 무학과 대선주조의 벽을 넘지 못했다. 2008년 이전까지만 해도 대선주조의 ‘C1’이 부산 시장의 90%를 장악했다. 하지만 현재는 무학이 70% 이상 시장을 장악하는 것으로 업계에서는 보고 있다. 무학은 지난해 소주 시장 2위인 ‘처음처럼’을 제치고 전국 소주 시장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무학의 성공에는 저도주 신화를 창조한 ‘좋은데이’가 우선 거론된다. ‘좋은데이’는 낮은 도수(16.9도)와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부산·경남 지역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국내 최초로 순한 소주인 좋은데이를 탄생시킨 주인공이 최재호 무학 회장이다. 최 회장은 좋은데이를 출시하면서 애향심에 호소하지 않았다. 그저 맛으로만 승부를 걸었다. 영업 전선에도 최 회장이 직접 나갔다. 소주 소비가 많은 선술집에 나가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고, 고객들의 의견은 다시 제품의 질을 높이는 데 반영됐다. 최 회장이 손님들의 구두를 직접 닦아준 적도 적지 않다고 한다.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90위, 1993억7521만원)
부엌을 설계해
주부 마음을 잡다

 


가구업계 1위 업체인 한샘은 2010년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됐다. 최양하 대표가 회장으로 승진했고, 창업주인 조창걸 회장은 명예회장이 되면서 경영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럼에도 조 명예회장의 ‘일 욕심’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매일 새벽 서울 원서동 한샘디자인 연구소로 출근해 경영에 관련된 주요 사항을 직접 보고받는다. 최신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 해외 가구 전시회를 뛰어다닌다.

한샘이 있기까지의 원동력도 여기서 출발한다. 조 회장이 한샘을 세운 1970년대 초만 해도 부엌을 설계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한 얘기였다. 주거 환경 가운데서도 부엌은 가장 뒤처진 공간에 속했다. 싱크대와 갖가지 주방 기구 정도면 부엌의 구색을 갖추기에 충분했다. 조 회장은 단출하게 구성된 부엌에 ‘가구’란 개념을 추가했다.

특히 1970년대 아파트 붐은 한샘이 성장하는 데 ‘촉매제’가 됐다. 조 회장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목공소와 같은 분위기의 공장에서 생산된 한샘의 가구들이 미국·중동 등지에 수출되기 시작했다. 1979년 수출 100만 달러를 돌파했고, 4년 뒤에는 500만 달러 달성에 성공했다. 바깥에서 거둔 성공은 한샘이 ‘국내 고급 브랜드’로 입지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샘 부엌 가구를 집에 들이는 것이 주부들의 꿈이 됐다.

한샘은 사업 영역을 주방에서 거실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1997년에 사업 영역을 침실·거실·서재 등 주택 내 모든 공간으로 넓혔다. 설립한 지 40년이 지난 현재 한샘은 토털 인테리어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국내 가구 시장 규모는 7조~8조원으로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진 2008년에 비해 20%가량 줄어들었다. 하지만 한샘은 2008년 대비 매출이 47% 늘어났다. 이 때문에 조 회장의 주식 평가액도 77계단이나 오른 90위를 기록했다.


이정훈 서울반도체 사장(왼쪽에서 두 번째) ⓒ 뉴스뱅크 이미지
이정훈 서울반도체 사장(44위, 4053억5341만원)
‘빛’에 특허 입혀
큰돈 번 사나이

 


이정훈 서울반도체 사장은 빛을 파는 사람이다. 서울반도체는 차세대 광원으로 각광받는 LED(발광 다이오드)를 생산하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경기 침체에도 ‘빛’을 발했다. 매출 4534억원, 영업이익 441억원을 올리며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최근 발표된 2분기 실적에서도 영업이익률 11.0%를 기록하며 최고 수준의 글로벌 LED 기업이 됐다.

서울반도체는 원래 미국계 반도체 제조 메이커 ‘페어차일드’에서 근무하던 엔지니어들이 1987년 설립해 운영하던 업체였다. 하지만 경영상 문제로 1991년 대신증권에 매각 의뢰가 들어왔다. 이정훈 사장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손을 뻗었다. 회사 인수를 위해 사재까지 털었다.

강병중 넥센타이어 회장
이 사장의 인수를 기점으로 서울반도체의 실적이 호전되기 시작한다. 그는 회사를 인수하자마자 과감히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뛰어난 기술력에 비해 조직의 뒷받침이 부족했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산하 조직에 책임과 권한을 과감히 위임했다. 그러면서도 서울반도체의 강점인 기술 개발에 많은 공을 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적으로 결과가 나타났다. 서울반도체는 백색 LED 관련 특허를 국내 최초로 취득했다. 1991년 사장 취임 당시 10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은 1999년 163억원으로 뛰었다. 2002년에는 매출 1000억원을 넘어섰고, 2007년엔 2502억원을 달성했다. 서울반도체는 현재 LED업계를 넘어 코스닥 대장주로 꼽힐 정도로 영향력 있는 중견 기업이 됐다. 2006년에는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 최고 유망 기업’으로 꼽혔다. 이 사장이 18.74%를 보유한 서울반도체 주식 가치도 자연스럽게 상승했다. 이 사장의 주식 평가액은 올해 4000여 억원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1.6배나 늘어났다. 주식 부자 순위도 지난해 62위에서 올해 44위로 18계단이나 뛰었다.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 ⓒ 시사저널 임준선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91위, 1966억8243만원)
서태지보다 뛰어난
‘가수 보는 눈’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는 무일푼으로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시작해 거부가 됐다. 양현석 대표는 가수 박남정의 댄서로 활약하다 서태지와 이주노를 만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가수로서 황금기를 누렸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되고 난 후에는 제작자로 변신했다. 서울 신사동의 허름한 건물 지하에 ‘현기획’이라는 월세 사무실을 차렸다. 이후 남성 3인조 ‘킵식스’를 선보였으나 이목을 끌지는 못했다. 1997년 힙합 전문 음반 기획사인 YG를 만들고 지누션을 데뷔시켰다. 2002년에는 R&B 전문 레이블인 엠보트엔터테인먼트와 손잡고 거미·휘성·빅마마 같은 가수들을 데뷔시킴으로써 한국 최고의 제작자 반열에 올랐다. YG엔터테인먼트의 연 매출은 지난해 말 997억원으로 전년 대비 59.4%나 급상승했다. 시가총액도 9959억원(2012년 9월)을 기록하면서 양 대표는 주식 부자 91위에 올랐다.

 

박관호 위메이드엔터테인먼트 이사회 의장 ⓒ 뉴스뱅크 이미지
강병중 넥센타이어 회장(46위, 3872억145만원)
실패에도 묵묵히 ‘고무’ 만져
인생 역전

 


강병중 넥센타이어 회장의 젊은 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중학생 때는 아버지마저 잃었다. 교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164cm의 작은 키 때문에 육군사관학교 시험에도 떨어졌다. 대학 졸업 후 재생 타이어를 생산하는 흥아타이어공업(현 넥센)을 설립했다. 싼 가격을 무기로 일본에 진출했다가 품질 문제가 불거지면서 쓴맛을 봤다. 1990년대에는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경남생명보험과 제일투자신탁을 잇달아 설립했지만, IMF 외환위기 여파로 또다시 고배를 들었다.

강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경남생명과 제일투자신탁을 판 돈으로 ‘부실기업’ 딱지가 붙어 있던 우성타이어(현 넥센타이어)를 인수했다. 주변에서는 쌍수를 들어 반대했다. “무엇하러 고생을 사서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 회장은 자신의 선택을 믿었다. 기업 이미지를 위해 넥센타이어로 사명을 바꿨다.

넥센은 ‘Next Century’의 약자로 내일을 생각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내일의 가치를 창조하는 기업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한국타이어와 금호타이어에 치여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지 말고 마음을 비운다’는 좌우명대로 묵묵히 고무를 만졌다. 넥센타이어는 2012년 경남 창녕공장이 본격 가동되면서 업계 2위인 금호타이어의 시가총액을 추월하기도 했다.

강 회장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스포츠 분야 지원을 통해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넥센 히어로즈와의 메인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면서 일정 부분 인지도 상승 효과도 봤다.

강 회장의 전략은 적중했다. 넥센타이어는 지난해 매출 1조7006억원, 영업이익 1769억원으로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거뒀다. 올해 매출 목표는 지난해보다 12% 늘어난 1조9000억원이다.

 

 

박관호 위메이드엔터테인먼트 이사회 의장 (41위, 4345억5989만원)
찻집에서 친구와
게임 얘기하다 창업

 

박관호 의장이 사업을 시작한 계기도 흥미롭다. 그는 학교 부근 찻집에서 친구와 게임 이야기를 늘어놓다 찻집 주인으로부터 5000만원을 투자받았다. 이 돈으로 1996년 엑토즈소프트를 세웠다. 여기서 나온 게임이 ‘미르의 전설 1’이다. 하지만 자금난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개발 자금을 위해 끌어들인 새 경영진과도 불화가 이어졌다. 박 의장은 결국 스스로 일군 회사에서 제 발로 걸어나왔다.

그는 2000년 위메이드를 창업하고 ‘미르의 전설 2’로 재기하게 된다. 2001년 출시된 ‘미르의 전설 2’는 멈춰본 적이 없다. 상용화 전 단계인 베타 서비스부터 본격 상용화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서버가 다운된 적이 없다. 정교한 서버·클라이언트 기술에 대한 박 의장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위메이드는 지난해 중국에서 ‘미르의 전설 3’의 공개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여전히 중국 내 ‘게임 한류’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박 의장의 주식 평가액은 다른 창업 부자들 가운데서도 유독 눈에 띈다. 올해 조사에서 그의 보유 자산 가치는 지난해에 비해 2배 가까이 올랐다. 주식 부자 순위에서도 27계단 상승한 4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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