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지금 ‘파리’만 날려
  • 최정민│프랑스 통신원 ()
  • 승인 2013.09.0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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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기업인들 탈출 러시…세금 폭탄·늑장 행정 탓

파리의 최상급 럭셔리 빌라와 아파트만을 취급하는 부동산회사인 ‘페오(FEAU)’. 이곳은 지난해 말 영화배우 제라르 드파르듀가 소유했던 빌라의 거래를 맡았다. 추정 가격 5000만 유로(740억원)에 이르는 프랑스 국민 배우의 집이 급매물로 나왔다. 제라르 드파르듀의 빌라뿐 아니다. 페오의 샤를-마리 조트라스 대표는 “많게 잡아 집주인 절반이 집을 팔려고 내놓은 상태”라고 말한다. 모두 럭셔리한 최고급 주택들이다. 매물 소유주는 공개되지 않으며 거래 가격 역시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다. 그러나 팔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들은 ‘세금 폭탄’을 피해 프랑스를 떠나는 행렬 중 일부다.

파리 시내의 고급 주택가들이 비어가고 있다. 상황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프랑스를 떠나는 사람이 비단 유명한 스타나 대부호들만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조트라스 대표는 “젊은 기업가들, 이제 막 일을 시작하는 이들도 떠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파리에서 한 시위자가 ‘부자를 보호하라’는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AP연합
벨기에 브뤼셀, 프랑스 부자들이 점령

프랑스 기업들의 해외 탈출 러시는 올해 들어 급격히 증가했다. 최근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제코>는 “올해 들어서만 850여 개의 기업이 스위스로 이전했다”고 보도했다. 기업들이 본사를 이전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법인세 때문이다. 스위스의 법인세는 12%로 33%인 프랑스보다 훨씬 낮다. 프랑스의 법인세는 유럽연합에서 두 번째로 높다. 가장 높은 국가는 35%를 내는 소국(小國) 몰타다. 젊은 기업인들의 경우 회사는 프랑스에 두는 대신 주소지만 해외로 옮기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그 이유는 회사를 팔 경우 매각 대금의 60%를 내야 하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들이 피난처로 가장 선호하는 곳은 프랑스와 북쪽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 나라 벨기에 도시들이다. 프랑스의 북부 도시 릴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인 벨기에 네샹의 고급 빌라들은 모두 프랑스 대부호들의 집이거나 프랑스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의 집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간부는 “왜 주거지를 이곳으로 옮겼느냐”는 질문에 “ISF 때문”이라고 답했다. ISF는 ‘부자 연대세’를 말한다.

프랑스에 부자 연대세가 도입된 것은 25년 전 일이다. 그 이전에는 1982년에 만들어진 ‘대부호 세금(IGF)’이 있었다. 말 그대로 큰 부자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이다. 당시는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한 이듬해였고, 국민적 신망이 두터웠던 피에르 모루아 내각이 들어선 상황이었다. 미테랑 정부 시절처럼 현 올랑드 정부도 출범 직후 야심차게 부자 연대세를 밀어붙였다. 그런데 탄력을 받은 것은 나라의 곳간이 아니라 오히려 탈출 행렬이었다. 증세 범위와 액수가 확대되자 탈출 러시에 불이 붙었다.

프랑스 부자들에게 ‘엘도라도’로 꼽히는 곳은 벨기에 외에 영국, 멀게는 싱가포르와 미국도 포함된다. 브뤼셀의 경우 최근 ‘제2의 뉘이 쉬르 센느’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뉘이 쉬르 센느는 파리 서쪽에 위치한 프랑스 최고의 부촌이다. 선박왕 오나시스를 포함해 대대로 프랑스의 부자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 전직 대통령인 니콜라 사르코지가 30대에 시장으로 재직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곳의 부자들이 브뤼셀로 옮겨가고 있다. 브뤼셀 시청의 이브 드용 씨는 “현재 브뤼셀의 인구 8만3000명 중 프랑스인이 1만1000명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그는 “더 많은 프랑스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브뤼셀에서 세금 관련 전문가로 활동하는 카이저 변호사는 프랑스 방송 ‘채널2’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인들이 벨기에를 선호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프랑스에 존재하는 부자 연대세가 벨기에와 영국에는 없다. 40년 가까이 경영한 회사를 매각할 경우 프랑스에선 60%를 세금으로 내지만 벨기에는 0%다.” 회사 경영에서 발생한 이익에 대해서도 프랑스는 60%에 가까운 세금을 물리지만 벨기에는 25%, 영국은 25~28%에 불과하다. 기업주 입장에서는 떠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엑소더스는 대부호나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 프레드 카라토의 경우가 그렇다. 색소폰 연주자인 카라토는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테크노뮤지션 다비드 게타, 로랑 볼과 함께 활동하는 실력파 뮤지션이다. 1년에 150여 회 콘서트를 열어 30만 유로 안팎을 벌었다. 그런데 음악 활동과 함께 야심차게 창업을 시도한 그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은 파리가 아닌 런던이다. “프랑스에서는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세금에 관한 편지들이 먼저 날아왔다. RSI(독립 영업자 사회보장기구)부터 재무부의 세금 관련 서류들까지, 돈을 벌기도 전에 내야 할 돈이 많았다. 그런 것들이 의욕을 앗아갔다.”

그의 회사가 자리 잡은 영국은 창업 첫해에 20%의 세금만 내면 된다. 무엇보다 음악 활동을 하는 그에게 중요한 수익원인 ‘저작권료’에서도 차이가 난다. 발표하는 싱글 앨범의 경우, 한 장당 3유로의 수익 중 런던에 있는 그에게 배당되는 몫은 2유로80센트다. 그가 프랑스에 있었다면 1유로50센트밖에 가져가지 못한다.

“영국만 즐겁게 해줬다”

프랑스 기업들의 탈출 러시가 본격화하면서 가장 이득을 보고 있는 곳은 이웃 나라 영국이다. 마치 2차 세계대전 때의 피난 행렬을 연상시키듯 런던으로 향하는 기업들이 줄을 잇고 있다. 프랑스 우파 진영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이자 신자유주의 노선을 연구하는 ‘콩코르디아 재단’은 “지난 20년간 세금으로 잃어버린 일자리가 100만개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들의 발표 중 흥미로운 것은 “특히 영국만 즐겁게 해줬다”는 대목이다. 영국은 지난 수년간 창업자들의 천국으로 불렸는데 프랑스에서 빠져나가는 인력을 고스란히 수용했다.

프랑스 기업 탈출 러시의 모든 이유가 세금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막상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면 까다로운 행정 절차와 느린 처리로 프랑스인들조차 지치기 일쑤다. 프랑스인들이 그 정도이니 외국 기업은 말할 나위가 없다. 울며 겨자 먹기로 프랑스에 들어와야 하는 외국 기업들의 경우 적응 기간만 수개월이 걸린다. 행정 처리가 늦어지는 탓에 체류증도 받지 못한 채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시작부터 불법을 자행하게 만드는 셈이다.

영국의 칼럼니스트 닉 얍은 “영국에서 성공하려면 독일인처럼 해야 하고 독일에서 성공하려면 미국인처럼 해야 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성공하려면 프랑스인처럼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렇게 까다로운 프랑스를 이제는 자국민들마저도 떠나고 있다. 당장은 기업들의 해외 탈출 러시를 막을 뾰족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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