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화 볼 때마다 미련·분노 뒤섞여”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3.09.16 14:35
  • 호수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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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영향력 1위, 봉준호 감독 인터뷰

문화예술계 분야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인물로 꼽힌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를 타고 프랑스 파리를 달리고 있었다. 10월30일 프랑스 개봉을 앞두고 현지에서 대규모 프로모션을 가졌다. 한국 시간으로 9월10일 봉 감독과 연락이 닿은 곳은 프랑스 파리였다. 이후 그의 <설국열차>는 체코 프라하로 이동했다. 영화를 함께 만들었던 체코의 기술 스태프에게 시사회를 약속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인터뷰는 그가 프라하에 도착한 후인 9월11일 국제전화로 이뤄졌다.

프랑스에서의 시사 반응은 열렬했다. 프랑스 현지의 트위터에 “재능과 야망의 완벽한 조합. 어둡고 절망적인 미래로 우리를 데려간다” “공상과학영화의 마스터피스” 등 호평이 줄을 이었다. 현지에서 수차례에 걸친 시사회와 40여 차례의 인터뷰에 응한 그에게 프랑스 반응에 대해 묻자 “쑥스럽게 그런 얘기를 내 입으로 어떻게 하느냐”며 웃었다. <시사저널>이 선정한 ‘2013년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예술인’으로 뽑혔다는 소식에 그는 “대형 거품”이라며 “영화 홍보 시기와 조사 시기가 맞물린 데다 내가 너무 얼굴을 내밀어서 거품이 낀 것 같다”며 겸연쩍어했다.

지난 9월8일(현지 시간) 프랑스 도빌 아메리칸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선정된 상영회에 봉준호 감독(오른쪽 끝)과 틸다 스윈튼(오른쪽 두 번째)이 참석했다. ⓒ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내가 영향력 1위? 대형 거품이다”

할리우드 자본까지 끌어들인 <설국열차>의 상업적 성공과 완성도는 ‘봉준호’라는 브랜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듯하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을까 싶은 고민도 들었다”고 의외의 답을 했다. 그는 <설국열차>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완성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00여 나라에 팔리고 국내 흥행에서 다행히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거친 모험의 여정도 끝나가고 있다. 한국 영화 산업 전체에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도감이 드는 정도다. 나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 매혹적인 만화를 만나서 8년간 매달려 살았다. 세계화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프로젝트가 아니다. 세계화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이 살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영화 시장은 미국과 인도를 제외했을 때 정말 훌륭한 관객을 갖고 있다. 한국 관객을 위해 알차고 참신한 영화를 만드는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엄청난 예산으로만 실현 가능한 비전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시도를 해야겠지만 예산이 많을수록 큰 통제가 따른다. 나도 뼈저리게 느꼈다.”

‘큰 통제’에 영향을 받았느냐는 물음에 그는 “내가 하고 싶은 예술적 비전은 다 했다”고 말했다. “예산 내에서 작업을 맞추는 게 힘들었다. 현장 프로듀서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이 규모대로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찍었다면 최소 두 배 이상 돈을 더 쓸 수 있었겠지만 그만큼 통제와 압박도 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제작해서 내가 예술적 비전을 소신껏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출발부터 다국적 관객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프로젝트에선 순수하게 한국 관객만을 생각하고 작업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까. 이를테면 한국 관객들은 봉 감독의 전작인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에서 송강호의 입으로 전달되는 한국어 대사와 연기를 통해 미묘한 정서를 전달받고 웃거나 무릎을 치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봉 감독의 이런 미학을 한국말 그대로 표현해 ‘삑사리의 미학’이라 부르고 있다. “당구 칠 때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올 때 삑사리라고 한다. 예측 불가능한 전개의 연속이라는 의미에서, 또는 미끄러져 내린다는 면에서 프랑스 언론에서 그렇게 부르더라. 크게 보면 전 세계 사람들의 사는 꼴이 비슷하다. 한국의 오프사이드와 유럽의 오프사이드가 다른가?”

<설국열차>에서도 ‘삑사리’ 장면이 있다. 틸다 스윈튼이 극 초반에 ‘너는 꼬리 칸, 나는 머리 칸’이라며 일장 연설을 할 때 뒤쪽에서 물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실수였다. 틸다는 이 장면에서 즉흥적으로 뒤를 돌아다보고 입을 달싹이다가 대사를 계속했다. 봉 감독은 “그때 틸다가 동물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계산된 느낌이 안 들었다. 난 여러 테이크 중 단지 그 테이크를 고른 것뿐이다. 틸다는 여자 송강호다”라고 말했다.

“영화 예산 클수록 큰 통제 따른다”

<설국열차> 개봉 직후에 논쟁이 이어졌다. 한 달여가 지난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자리 잡고 있을까. “<설국열차>에 대한 대중의 기대가 컸고 과열 상태에 가까웠다. 연못에 흙탕물이 일어난 시기였다. 나중에 가라앉으면 이곳저곳 다 보이지 않나. 몇 년이 지나면 영화 자체가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아직은 나도 <설국열차>가 어떤 영화인지 잘 모르겠다. 감독 입장에서 내 영화는 언제나 아쉽고 볼 때마다 고문이다. 프레임 밖 상황도 다 보이니까 그때 상황도 생각나고 저 장면은 저래서 못 찍었고…. 후회와 미련, 분노, 자책이 뒤섞인다.”

그에게 지금 <설국열차>에서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부분은 요나의 마지막 장면이다. “기차를 나와 처음 땅(쌓인 눈)에 발을 내딛으면서 우두둑 하고 밟는 과정, 달 착륙하듯…. 그 생각만 자꾸 난다. 겨울이 빨리 왔으면…. 겨울을 기다리는 게 아닐까. 더운 게 싫어서….”(웃음)

그는 신작 준비와 관련해 “3~4가지 프로젝트가 머릿속에서 뱅뱅 돌고 있다. 다만 공식화한 서류나 계약서가 오가는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뿐이지. 한국어 영화가 될지는 아직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할리우드 쪽에서도 꾸준히 제안이 오지만 그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할리우드의 제안에 응해 연출을 하면 한국에서 <설국열차>를 만드는 것과는 다르다. 거기는 지원도 많지만 간섭도 많다. 나의 예술적 비전보다는 스튜디오가 원하는 영화의 용역을 하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역할을 경험해보는 것도 괜찮겠지만 내 성격상 잘될지 모르겠다. 어쨌든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제안하는 영화는 항상 경계하게 된다. 덥석 잡았다가 가서 납품업자 꼴이 되면 안 될 텐데, 그럴 거면 영화를 왜 하나 하는 경계심도 있다.”

그는 최근 영화계의 빅 이슈인 <천안함> 상영 중단에 대해서 우려하는 의견을 냈다. “영상물등급위원회나 법원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상영하게끔 한 영화를, 정확히 누구인지 밝히지도 않는 누군가의 항의를 핑계로 일방적으로 상영 취소하는 것은 초현실적인 일이다.” 아울러 그는 사회적 이슈가 됐던 김조광수 감독의 동성 결혼식에 참석을 약속해놓고 프랑스 프로모션 때문에 가지 못했던 것에 대해 미안함을 표시했다.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한국을 벗어나 유럽을 시작으로 타이완, 일본, 미국으로 달린다. 내년 2월 개봉하는 일본에서는 12월 중순이나 1월 초에 대규모 프로모션이 예정돼 있다. 크리스 에반스, 틸다 스윈튼, 송강호도 참여한다. 다만 미국 개봉 일정은 아직 잡혀 있지 않다. 미국판 편집 작업을 놓고 배급사인 더와인스타인컴퍼니(TWC)와 봉 감독 간에 ‘협의’가 계속되고 있다.

봉 감독은 “TWC는 워낙 정교하게 마케팅을 하는 회사다. 와인스타인 형제는 영리한 프로모터이지 악당이 아니다. 영화의 스토리가 바뀌거나 엔딩

ⓒ 시사저널 임준선
이 바뀌거나 캐릭터가 없어지거나 그런 것은 없다. 속도 조절만 한다”고 밝혔다. TWC는 블록버스터보다는 작품성 높은 영화를 정교하게 마케팅해서 오스카상을 타고 짭짤한 수익을 올리는 데 능한 회사다. 지난해 2100만 달러를 들여 <실버라이닝플레이북>을 만들어 1억3000만 달러를 벌었고 덤으로 오스카 트로피도 챙겼다. 프랑스제 무성영화 <아티스트>도 TWC의 손을 거쳐 오스카상을 받았다. 그렇다고 예술영화만 하는 배급사는 아니다. 지난해 12월28일 타란티노의 <쟝고>를 개봉해 성공시켰다. 올해 TWC는 오스카용 영화로 <만델라>(2014년 1월 개봉)를 낙점해 벌써부터 영화제를 통해 입소문 마케팅을 시작했다. TWC는 <설국열차>를 미국에서 올해 말쯤 개봉할 예정이다. <설국열차>의 가장 강력한 입소문은 한국과 프랑스에서의 성공이다. 4000만 달러짜리 작가주의 ‘중소 예산’ SF영화 <설국열차>가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어떤 성과를 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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