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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 내 손안에 있소이다”

3선 성공한 메르켈 독일 총리 ‘철의 여인’ 대처 뛰어넘어 ‘유럽의 여왕’ 등극

강성운│독일 통신원 ㅣ 승인 2013.10.02(Wed) 13: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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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는 결국 앙겔라 메르켈에게 쏟아졌다. 9월22일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기독민주당(CDU, 기민당)·기독사회당(CSU, 기사당)은 41.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와 동시에 메르켈 독일 총리의 3선 연임도 사실상 확정됐다. 이번 선거에서 메르켈이 이끄는 여당은 독일 역사상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였던 동·서독 통일을 이끈 헬무트 콜 전 총리가 지난 1994년에 거둔 득표율(41.4%)을 웃도는 수치를 기록했다. 보수 성향의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터차이퉁>(FAZ)의 온라인판은 메르켈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위대한 총리의 반열에 올랐다.”

   
독일 베를린의 기민당 당사에서 총선 결과에 기뻐하고 있는 메르켈 총리. ⓒ DPA 연합
물리학자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정치인 변신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브란덴부르크 주에 인구 1만6000명 정도의 작은 도시가 있다. 중세풍의 아름다운 건물과 옛 동독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공존하는 거리를 갖고 있는 이 마을에는 교외에 19세기 중반부터 고아와 장애인을 돌봐온 자선 시설이 있다. 검은 벽돌로 지어진 교회와 3층 집이 서 있는 이곳이 바로 메르켈이 자란 곳이다.

1989년 9월23일, 목사인 메르켈의 아버지와 교회 관계자들은 민주화를 두고 밤샘 토론을 벌였다. 메르켈도 우연히 집에서 이 토론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메르켈도 변했다. 당시 물리학을 전공한 후 동베를린 과학아카데미에서 근무했던 그는 정치적 실무자로 변신했다. 12월 초 ‘민주주의의 출발(DA)’이라는 정당의 대변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메르켈은 미국 의회 연설에서 “내가 정치의 세계에 들어간 것은 지금이야말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게 정치에 매료된 메르켈에게 이번 선거는 ‘유럽의 여왕’이란 명성이 어울리는지 자격을 증명하는 자리였다. 이번 총선은 정치 지형을 뚜렷이 나누는 이슈도, 2위의 긴장감 넘치는 추격전도 없이 그야말로 맨송맨송한 선거였다. 선거가 치러지기 전부터 이미 메르켈 총리의 3선이 기정사실화됐기 때문이다. 선거 연구 단체인 발렌(Wahlen)은 “현재 메르켈 총리의 이미지는 1990년 이후의 총리들 중에서 가장 좋다”며 “유권자의 3분의 1 이상이 어느 당이 승리하든 메르켈만 총리직을 유지하면 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고 밝혔다. 통일 이후 독일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메르켈 붐’을 간파한 기민당은 철저히 메르켈을 내세우는 인물 중심 선거전을 펼쳤다. “내용 없는 선거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배꼽 앞에 두 손을 포개어 얹는 메르켈 총리 특유의 제스처를 담은 초대형 광고물이 베를린 중앙역 외벽에 설치되기도 했다. 다급해진 사회민주당(SPD, 사민당)은 메르켈의 사진을 싣고 그를 비판하는 포스터를 제작했다. 선거판 전체가 메르켈을 중심으로 짜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사민당의 페어 슈타인브뤼크 총리 후보는 애초 메르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연이은 실언으로 얻은 비호감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선거 일주일 전 한 잡지 표지에 등장해 ‘가운데 손가락 욕’을 하는 파격을 연출했다. 그러다가 도리어 역풍을 맞았다.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심지어 사민당 지지자의 47%도 이를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사민당은 25.7%의 득표율을 올리며 정권 교체에 실패했다. 그나마 지난 총선에서 기록한 역대 최저 득표율인 23%를 겨우 넘겨 체면치레를 했을 뿐이다.

   
남유럽에서 메르켈은 증오의 대상

메르켈에게 승리를 안겨준 것은 유로존 위기다. 부채에 시달리는 유로화 사용 국가들에게 강력한 긴축 재정과 개혁 정책을 관철시켜 유로존 위기 해결을 주도한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메르켈 2기 정부가 출범한 2010년 유럽 전역으로 경기 침체가 확산되면서 그리스·스페인·프랑스·이탈리아·포르투갈 등에서 줄줄이 정권이 교체됐지만 메르켈의 지지율은 오히려 7.7%나 올랐다. 유로존 위기를 자신의 게임으로 만들면서 그는 유로존 위기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국가 지도자가 됐다.

최근 메르켈과 관련한 저서를 출간한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의 랄프 보루만 기자는 메르켈의 신념을 옛 동독 붕괴에서 찾는다. 그는 “메르켈은 경제가 비효율적인 체제는 멸망하며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이 법칙은 예외가 아니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에게 ‘경쟁력’을 촉구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신념 때문에 혹독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메르켈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경제 위기를 유발한 근본 원인을 제거하라는 그에게 분노의 화살이 쏟아졌고, 유로존 탈퇴를 주장하는 극우 성향의 포퓰리즘 정당이 민중 정당의 가면을 쓰고 인기를 끌었다. 유로존 위기 국가들은 이번 독일 총선 결과에 대해 냉소와 두려움이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스에서 발행 부수 1위인 일간지 <타 네아(Ta nea)>는 왕관을 쓰고 왕좌에 오른 메르켈의 몽타주 사진을 싣고 “유럽은 메르켈의 나라가 되었다”고 보도했다.

독일에서는 반대로 “왜 우리 세금으로 부패한 나라의 은행과 정치인들이 벌인 빚잔치를 수습해주고 부당한 비판까지 감수해야 하느냐”며 유로존과 유럽연합에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이러한 반(反)유럽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이번 총선에서 4.7%의 지지를 받았다. 의회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창당한 지 불과 5개월밖에 되지 않은 작은 정당으로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경제 위기 국가에 널리 퍼진 반(反)독일 풍조와 이에 맞서 등장한 AfD의 돌풍은 메르켈식 개혁 정책이 유럽 국가 사이에 불신과 분열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메르켈 총리가 집권 3기에는 강경 노선을 수정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유럽연합과 유로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설득하지 못하면 유럽 국가 간 공조와 통합은 불가능하다. 메르켈 총리는 9월22일 총선 승리가 확정된 후 가진 연설에서 “모두가 그렇듯이 우리도 친구가 필요하다”며 “유로화를 보강하는 것은 유럽뿐 아니라 독일에도 이익이 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우리는 강한 유럽, 성공적인 유럽을 원한다”고 주장해 AfD 및 반유럽주의자들과의 차별화를 꾀했다. 메르켈이 정책을 수정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기민-기사당이 연방 하원에서 과반수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결국 메르켈 총리는 의회에 입성한 사민당·녹색당·좌파당 중 한 정당과 연합을 해야만 한다.

총선 다음 날인 9월23일 메르켈 총리는 기자회견을 통해 사민당과 녹색당 모두와 접촉하고 있음을 시인하면서도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이 때문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의중을 읽어내려는 암호 해독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선거일에 그가 착용한 목걸이가 기민당의 상징인 검은색과 녹색당의 상징인 녹색이었다”면서 두 당이 연합할 가능성이 크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메르켈 총리 역시 이를 의식한 듯 기자회견에서 “오늘 아침 옷장 앞에서 어떤 상의를 입을지 고민했다. (사민당의 상징인) 붉은색도 안 되고 녹색도 안 되고…”라며 곤란한 처지를 내비쳤다.

사민당은 기민-기사당의 가장 유력한 파트너로 꼽히고 있다. 이미 메르켈 집권 1기(2005~09년)에 함께 정부를 꾸린 전력이 있다. 사민당은 개표 직후부터 “기민-기사당과의 연합은 우리의 미래가 아닌 과거”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기민당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애 태우기 전략으로 해석되고 있다.

   
ⓒ 연합뉴스
대결보다 포용·융합으로 선회 가능성

실제로 마르틴 슐츠 사민당 의원은 시사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유럽 정책 수정을 협상의 조건으로 내걸 수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밝혔다. 그는 “메르켈 총리가 경제 위기 국가의 높은 청년 실업률에 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하며 더 이상 긴축 재정을 계속해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슈피겔>은 “사민당이 이중 국적 허용과 최저임금제 도입, 연금제 개선과 주요 장관직을 협상 카드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서든, 유럽연합의 시대적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든 집권 3기에 들어서는 메르켈이 포용·융합 정책을 펼 가능성은 커졌다. 늦어도 10월 중에 시작될 연합정부 구성 협상은 앞으로 4년간 독일과 유럽의 미래가 어디로 갈지를 가늠해볼 좋은 기회다.

메르켈에게 포용·융합은 마냥 낯선 단어가 아니다. 위기 대응 능력에서 메르켈은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마거릿 대처 영국 전 총리와 종종 비교된다. 하지만 메르켈의 정치 기술은 국론을 양분하는 것을 감수하고도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대처와 대조적이다. “가장 큰 특징은 좋은 의미에서 현실주의적이라는 점이다.” 베를린 자유대학의 오스카 니더 마이어 교수는 메르켈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의 대처다. 메르켈은 자신의 소신과 반대로 ‘탈원전’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독일 내 임대료 상승이 문제로 떠오르자 야당인 사민당이 호소한 임대료 억제책을 도입하기도 했다. 현실적 갈등을 노출하기보다 억제하는 데 능한 정치인이다.

9월22일 사민당의 페어 슈타인브뤼크 의원은 연합정부 수립을 메르켈 총리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지금 공은 메르켈의 코트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이번 게임도 그녀의 것이 될 것인가. 승패 여부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에 달려 있다. 그리고 새 규칙의 이름은 ‘유럽 통합’과 ‘공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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