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정국 주도하고 박 대통령 견제할 사람은 ‘없음’
  • 감명국·이승욱 기자 (kham@sisapress.com)
  • 승인 2013.10.0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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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전문가 20인 설문조사 “청와대 독주 체제 심각하다”

9월12일 진영 보건복지부장관이 부처 실·국장 간부들을 장관실로 호출했다. 평소 ‘젠틀맨’이란 별칭답게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는 그였지만, 이날만은 달랐다. 그는 “도대체 누가 장관이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간부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마다 속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기초연금 공약 후퇴와 관련한 대책 마련을 둘러싸고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와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실 간의 갈등설이 불거졌다. 진영 전 장관은 국가 재정 형편상 기초연금 공약의 후퇴가 불가피하더라도 이를 국민연금과 연계하는 데는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소득 수준에 따른 차등 지급 방안을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박 대통령의 결정에 의해 국민연금과 연계하는 방안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진 전 장관의 입지가 좁아졌다는 것이다.

진 전 장관은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을 거쳐 지난해 대선 때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국민행복추진위 부위원장을 맡았고, 올 초 대통령직인수위 부위원장을 지내며 공약 등 사실상 모든 정책을 총괄했다.

ⓒ 연합뉴스
진영 면담 거절 보도에 청와대 ‘강경’ 대응

진 전 장관과 대립각을 세운 이는 최원영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이다. 8월 초 청와대 인사 때 ‘김기춘 사단’의 일원으로 청와대에 입성한 최 수석은 취임하자마자 8월 둘째 주부터 매주 2~3차례 복지부 실무진을 청와대로 불러 기초연금과 4대 중증질환 보장성 확대 방안 등 박 대통령의 핵심 복지 공약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복지부 차관 출신으로 실무 능력과 조직 장악력을 겸비했다는 평을 받아온 최 수석이었다. 청와대 수석이 복지부 공무원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진 전 장관이 단단히 화가 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진 전 장관이 자신의 소득 연계안이 최 수석의 국민연금 연계안에 밀리는 듯한 분위기가 감지되자 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했지만, 이를 거부당했다는 얘기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 과정에 김기춘 비서실장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국민일보>는 정치권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러한 내용을 10월4일자로 보도했다. 그러자 즉각 청와대 대변인의 반박 성명이 나왔다.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해당 언론사에 정정 보도를 청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청와대가 전에 없이 즉각적으로, 그리고 강경하게 나선 것은 이를 조기에 바로잡지 않을 경우 그 파장이 만만찮을 것으로 내다봤기 때문이다. 장관의 면담 요구를 대통령이 응하지 않고, 그 중간에서 청와대 참모가 막았다는 보도 내용은 박 대통령의 대국민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는 것은 물론, 향후 ‘불통(不通)’ 이미지를 벗기 어려울 것이라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진영 사태로 박 대통령 독주 체제 더욱 공고”

진영 전 장관 사퇴 파동은 이처럼 박근혜정부에 큰 생채기를 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이미지는 다소 손상됐을지 몰라도 리더십까지 흔들릴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정치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정치 전문가들은 “진영 사태를 계기로 오히려 박 대통령 독주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당(黨)·정(政)·청(靑)으로 대표되는 여권의 3각 구도 역시 청이 제일선에 서서 당·정을 리드하며 정국을 주도해나가는 모양새가 계속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들은 “하지만 이는 결코 정상적인 형태가 아닌 만큼오래가기도 어려울 것”이라며 “이런 비정상적인 국정 운영 행태가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박근혜정부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사저널>은 최근 채동욱 전 검찰총장과 진영 전 장관 사퇴 파동 등을 계기로 박근혜정부의 권력 구도와 박 대통령을 둘러싼 권력 실세들의 위상 변화를 살펴보기로 했다. 정치학 교수와 정치평론가 등 국내 대표적인 정치 전문가 20인을 상대로 인터뷰를 겸한 긴급 설문조사를 10월2일부터 4일까지 사흘간 실시했다. 여기서 대다수 정치 전문가는 박 대통령의 1인 독주 체제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청와대가 모든 국정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시사저널>은 20인의 전문가들에게 ‘지금 여권에서 박 대통령을 제외하고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여권에서 박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인물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각각의 질문에 대해 최대 3명까지 1~3순위로 구분해 복수로 답을 받았다. “없다”는 대답이 상당히 많았다. 이 또한 의미 있는 메시지로 봤기 때문에 다른 여권 인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대답으로 순위에 올렸다. 점수는 1순위를 4점, 2순위와 3순위는 각각 2점과 1점씩을 부여해서 합산했고 ‘없다’는 대답 또한 4점을 부여했다.

■ 박 대통령 제외한 여권에서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은?…김기춘·이정현·남재준 순

<시사저널>은 이번 조사를 실시하기 전인 지난 8월과 9월에도 이와 비슷한 전문가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8월에는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과 정치평론가 등 100명을 대상으로 ‘누가 박근혜 정권의 최고 실세인가’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이 조사가 실시된 시기는 공교롭게도 김기춘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이 임명되기 직전인 8월 초였다. 당시 조사 결과 1위는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었고, 2위는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였다. 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당시 청와대 비서실 수장임에도 1, 2위와 현격한 격차를 보이며 3위에 머물렀고, 본지 조사 결과가 나온 직후 그는 청와대를 떠났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지난 9월. 본지가 매년 전문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설문조사에서 ‘박 대통령에게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은 누구인가’란 질문에 김기춘 실장이 압도적 지목률로 1위를 차지했다. 이정현 수석(6위)과 최경환 대표(7위)를 멀찌감치 따돌리며 권력 지도 변화를 알렸다.

다시 한 달 만인 이번 조사에서는 정치 전문가 20인을 대상으로 ‘여권에서 박 대통령을 제외하고 정국을 가장 주도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물었다. 김기춘 실장이 60점으로 역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그를 가리켜 박근혜정부의 ‘부통령’으로 부르는 세간의 평가가 다시 한 번 입증된 셈이다. 모두 14명의 전문가가 그를 1위로 꼽았다. “박 대통령 통치 스타일에서 정국 주도권은 청와대가 모든 걸 장악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이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 1순위라는 것은 당연하다”라거나 “자신이 임명된 8월 이후 공안 정국으로 급격히 쏠리는 현상의 중심에 김 실장이 서 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김 실장은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사심이 없다. 자기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만큼 두려운 게 없는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2위는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었다. 정치 전문가들 중 1명이 그를 1순위로 꼽았고, 많은 응답자가 그를 김 실장에 이은 2순위 또는 3순위로 꼽아 총 18점을 얻었다. 그가 여전히 박 대통령의 ‘복심(腹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 정치평론가는 “지금 정권에서는 이른바 ‘추박(박 대통령을 추종하는 인물)’이 최고 실세 그룹이다. 추종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나 영향력이 유지되기 힘들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 수석”이라고 밝혔다.

이번 조사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남재준 국정원장이다. 2명의 전문가가 김 실장을 제치고 그를 1순위로 꼽는 등 총 14점을 얻었다. 한 정치평론가는 “지금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은 남재준이고, 정국을 관리하는 인물은 김기춘이다. 이 두 사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평론가는 “한때 남 원장은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과 함께 안보 분야에서 경쟁 구도를 이룰 것으로 평가됐으나, 최근의 전시작전권 연장 결정 등을 보면 사실상 안보 분야를 벗어나 정국 전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평가했다.

권력의 힘이 청와대와 국정원 쪽으로 쏠려 있는 상황에서 최경환 원내대표가 당 쪽의 대표적 인물로 가장 많은 점수를 얻었다. 13점으로 4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를 1순위로 꼽은 전문가는 한 명도 없었다. “박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다른 인물은 의미가 없다”며 아예 ‘없음’을 명확히 밝힌 전문가도 3명이나 있었다. 그 외에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6점), 윤상현 원내 수석부대표(3점), 김장수 안보실장(2점), 유정복 안행부장관(1점)을 2, 3순위로 지목한 전문가도 있었다.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목사는 “박 대통령이 어떤 현안에 대해 누구누구랑 의논하고, 누구누구에게 일을 맡겼다는 뉴스만 들려도 지금 국민들은 안심할 판이다. 그만큼 모든 결정을 대통령 혼자서 다 하는 우려스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 역시 “정치란 혼자 하는 게 아님에도 지금은 대통령 한 사람밖에 안 보인다.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 여권에서 박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인물은?…‘없음’ 1위, 김무성 2위

박 대통령 1인 독주 체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본지의 두 번째 질문인 ‘여권에서 박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에서 더 강하게 나타났다. 20명의 정치 전문가 중 절반에 해당하는 10명이 “없다”고 밝혔다. <시사저널>은 이런 전문가의 목소리를 그대로 반영하는 차원에서 ‘없음’을 1위에 올렸다. 총 40점에 달한다. 한 정치평론가는 “지금 박 대통령의 레이저를 견딜 사람이 누가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나마 여당 내 친이계 인사들이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인데, 지금 친이계에서도 그만한 인물이 안 보인다” “진 전 장관의 경우처럼, 대통령과 의견이 안 맞으면 왕따를 시켜서 내보내는 이런 문화에서는 견제 자체가 어렵다”고 평가했다.

나머지 10명의 전문가도 “견제 세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고민 속에 “그나마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 견제 가능성이 가장 크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모두 7명이 김 의원을 1순위로 꼽아 총 28점(2위)을 얻었다. ‘없음’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1위인 셈이다. 한 정치평론가는 “김 의원은 박 대통령의 힘이 시들해지면 언제라도 자기 정치를 위해 독립선언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평론가는 “김 의원은 이미 한 번 박 대통령으로부터 아웃된 경험이 있다. 박 대통령의 불신감은 여전히 상당할 것이다. 향후 두 사람의 갈등 요소가 클 것”이라고 전망했다.

나머지 3명의 전문가도 김 의원 외에 새누리당의 ‘비박(非朴)’ 중진 의원들을 그나마 ‘견제 세력’으로 꼽았다. ‘친이계’ 수장 격인 이재오 의원, 여전히 차기 대권을 노리는 정몽준 의원, 소장파 리더 격인 남경필 의원 등이다. 총 10점으로 3위에 오른 이재오 의원에 대해 한 교수는 “지금은 집권 초기라 잔뜩 웅크리고 있지만, 그래도 친이계는 엄연한 하나의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밝혔다. 4위에 오른 정 의원(9점)에 대해서도 한 교수는 “그래도 정 의원이 계파에 얽매이지 않고 나름으로 소신 있게 자기 목소리를 꾸준히 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 밖에 김문수 경기도지사(4점), 유승민 의원(2점) 등 주로 차기 대권과 관련해 주목되는 잠재력 있는 정치인들이 박 대통령의 견제 세력으로 꼽혔다. 결과적으로 현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은 주로 청와대에, 박 대통령을 견제하는 인물은 새누리당에 많이 포진해 있는 셈이다.

이번 조사에 응한 정치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지금의 정치 실종 현상과 청와대 및 대통령 일방 주도의 정국 현상이 집권 첫해인 올해는 통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큰 변화를 맞을 것”이라며 “박 대통령은 그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김태일 영남대 교수는 “가장 큰 문제는 지금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의 ‘채 전 총장과 여성 정치인’ 관련 발언만 해도 그렇다. 의정 단상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정치 실종 현상이 계속되는 한 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현우 서강대 교수는 “지금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60%대를 기록하고 있지만, 양적인 것보다는 질적인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며 “집권 첫해 지금의 지지율은 대통령에 대한 기대치가 포함된 일종의 상징적 정치에 대한 지지율 현상이 강하다. 앞으로는 업적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리더십은 상징의 리더십에서 업적의 리더십으로 이동하는 건데, 향후 박 대통령이 업적의 리더십을 평가받게 될 때 큰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시사저널> 설문조사 인터뷰에 응한 20인(가나다 순)

김능구 폴리뉴스 대표, 김윤태 고려대 교수, 김태일 영남대 교수, 박명호 동국대 교수,박상병 정치평론가, 박상헌 공간과미디어연구소 소장, 신율 명지대 교수, 유창선 시사평론가,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 이현우 서강대 교수, 인명진 한교연 인권위원장, 전계완 매일P&I 대표,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사무국장,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황인상 P&C글로벌네트웍스 대표, 황태순 위즈덤센터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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