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 발목 잡힌 문재인
  • 조해수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3.10.0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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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록 실종으로 궁지 몰려…야권 역학·대권 구도 지각변동 예상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자신이 있었다.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는 2007년 10·4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문만 공개되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자신에게 덧씌워진 ‘안보 논란’을 단번에 불식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문 의원은 민주당 내 ‘비노(非盧)’ 세력은 물론, 일부 ‘친노(親盧)’ 세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화록을 공개하자”고 칼을 빼들었다. 일종의 정치적 도박이었다.

처음 분위기는 좋았다. “‘사나이’ 문재인다운 선택”이라거나 “문재인이 이제야 비로소 자기 정치를 시작했다”는 평가들이 나왔다. 비주류로 밀려났던 친노 진영도 다시 결집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 친노 성향 의원은 “이제는 친노가 아닌, ‘친문(친문재인)’으로 불러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 의원은 승리를 자신했기에 ‘정계 은퇴’라는 배수진까지 쳤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국가기록원에 대화록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야의 정치 공방은 팽팽했다. 새누리당은 “노 전 대통령 측이 대화록 자체를 국가기록원에 넘기지 않았다”고 공격했지만,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에서 폐기됐거나, 있는데 찾지 못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기획재정위 회의장 떠나는 문재인기획재정위 회의장 떠나는 문재인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10월2일 굳은 표정으로 국회 기획재정위 전체회의 회의장을 떠나고 있다. ⓒ 연합뉴스
민주당 내분 가열…친노는 또 ‘폐족’ 위기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가 10월2일 “노무현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국가기록원에 이관시키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분위기는 급반전했다. 심지어는 “대화록 초본이 ‘이지원’ 등재 후 노 대통령 지시로 삭제됐다”는 내용까지 덧붙이면서 민주당은 ‘멘붕’에 빠졌다. 건곤일척의 대전을 준비했던 친노 진영은 칼 한번 부딪쳐보지 못하고 퇴각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배수진을 쳤던 그들이기에 퇴로 역시 쉽게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자칫하다가는 친노 진영 전체가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당장 수장인 문재인 의원의 향후 거취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새누리당은 “문 의원은 ‘사초 실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번 국회의원 임기를 끝으로 정계를 은퇴하든가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한다”며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다. 이참에 아예 야권의 유력한 대권 주자 한 명을 완전히 찍어내겠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만약 향후 검찰 조사에서 노무현 정부 측에서 ‘고의’로 대화록을 누락시킨 사실이 밝혀진다면, 문 의원으로서도 마냥 침묵으로만 일관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친노 성향으로 분류되는 한 민주당 중진 의원은 “문 의원의 평소 성품상 정계 은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문 의원 자신이 밝힌 대로 귀책사유가 있다면 상응하는 책임을 분명히 질 것이다. 일단은 검찰의 최종 수사 결과를 기다려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새누리당으로서는 설령 문 의원을 끌어내리지 못하더라도 잃을 것이 없다. 사실 NLL 대화록 정국이 조성되면서 가장 덕을 본 쪽은 여당과 청와대다. 지난 6월21일 문 의원이 대화록 공개를 주장하고 나서면서 이 문제가 정치 쟁점화하자 당초 핵심 사안이었던 ‘국정원 정치·대선 개입’ 의혹과 ‘대화록 사전 유출’ 의혹은 한동안 묻힐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검찰의 ‘사초 실종’ 수사 발표로 채동욱 전 검찰총장 제거 음모와 박근혜 대통령의 기초노령연금 공약 파기 논란 등 정국 이슈가 당장 이 문제로 덮이고 있는 모양새다.

반면 “박 대통령의 복지 공약 후퇴, 채 전 총장과 진영 전 복지부장관 사퇴 등 나쁜 악재를 덮기 위해 검찰이 또 한 번 작전을 쓴 것”이라는 민주당의 이른바 ‘음모론’ 주장은 국민들에게 그리 어필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 내 분위기 역시 다르지 않다. 한 민주당 고위 당직자는 “여당과 관련한 악재가 터질 때마다 국면 전환용 사건이 연이어 터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화록 정국은 전적으로 문 의원의 주도하에 이뤄진 것이다. 어찌 됐든 문 의원이 책임질 부분이 있다. 당 지도부 역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여당의 장단에 춤을 춘 꼴이 됐다. 올해만도 정국 주도권을 (민주당이) 가져올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았나. 갈팡질팡하는 당 지도부에 한숨이 나올 때가 많았다”고 비판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국가기록원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 내린 검찰 직원들이 국가기록원을 떠나고 있다. ⓒ 연합뉴스
“NLL 포기 발언 있었나” 새로운 쟁점

누구에게 잘못이 있건 이번 ‘사초 실종’ 논란으로 민주당은 내분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미 비노가 중심이 된 민주당 주류 일각에서는 우려 섞인 한숨과 함께 격앙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번 논란이 장기화되면서 자칫 ‘보수-진보’ 이념 대립 문제로 비화할 경우, 당장 코앞에 다가온 10월30일 재·보궐 선거와 내년 6월 지방선거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사초 실종에 대한 책임론과 더불어 노무현 정부의 NLL 포기 논란이 친노 진영을 넘어 민주당 전체의 이미지로 고착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 의원은 10월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10·4 남북정상선언 6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지금까지 확인된 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대화록은 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발언)는 없었다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자칫 대화록에 ‘NLL 포기’ 성격의 발언이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또다시 새로운 쟁점이 불거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비노 성향으로 분류되는 한 민주당 의원은 “이번 재보선은 차치하더라도 내년 6월 지방선거와 7월 재보선은 박근혜정부에 대한 중간 평가 성격을 넘어 차기 대선에까지 영향을 미칠 중요한 선거다. 여당은 내년에도 케케묵은 이 문제를 다시 끄집어들 것이 분명하다. 지긋지긋한 NLL 포기 발언 등을 들먹이며 안보 논리를 악착같이 걸고넘어질 게 뻔하다. 당이 친노 세력 전체에 공동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민주당 전체가 늪에 빠져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민주당 내 비노를 중심으로 한 신주류 측의 입장은 ‘결자해지’로 요약할 수 있다. “더 이상 당에 피해를 주지 말고, 문 의원이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을 계기로 아예 당내 주도권 경쟁에서 친노를 확실히 밀어내고 신주류의 리더십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같은 셈법은 차기 대권을 노리는 잠룡들 사이에서도 복잡해진다. 문 의원과 함께 야권의 ‘빅3’라고 할 수 있는 안철수 무소속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도 지금의 사태를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다. 박 시장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다면, 단번에 가장 유력한 야권의 대선 후보로 발돋움할 수 있다. 당내 기반이 약하다는 것이 최대 약점이었지만, 수장을 잃고 흔들리는 친노 세력을 껴안을 수만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안 의원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안철수 신당’을 창당해 본격적인 대선 행보에 나설 계획이다. 아직까지 체계적인 조직이 없는 안 의원인 만큼, 만약 민주당이 친노와 비노로 갈려 분열한다면 이 틈을 노려 어느 한 세력과 힘을 합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손학규 전 대표는 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상황이다. 손 전 대표는 이번 10월 재보선 화성갑 지역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 상대는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로 결정됐다. ‘사초 실종’ 논란으로 민주당이 위기에 처한 이때, 만약 손 전 대표가 박 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으로 불리는 서 전 대표를 꺾을 경우 단번에 다시 정국 주도권을 거머쥐는 반전을 꾀할 수 있다. 하지만 ‘사초 실종’ 논란으로 민주당 지지율이 더 바닥을 치는 상황이어서 “지금은 때가 아니니, 내년 재보선을 노리자”는 측근의 만류가 강하다는 전언이다. 손 전 대표가 어떤 결단을 내릴지도 향후 대권 구도와 민주당의 역학 구도에서 주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친노 진영에서는 세대교체가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새로운 수장의 등장만이 친노 진영의 혼란을 조기에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인물은 안희정 충남도지사다. 안 지사는 NLL 포기 발언과 사초 실종 논란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다. 안 지사는 애초 문 의원의 대화록 공개 주장에도 반대했었다. 한 친노 성향 의원은 “친노라는 것은 노 전 대통령의 가치를 계승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계파로서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 최근에 ‘친문’이란 말이 퍼지질 않았나. 그런 논리라면 향후 ‘친안(희정)’으로 바뀌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초 실종’ 중간 수사 발표가 나온 후, 문 의원의 행보에 여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주변에서는 대선 패배 후 너무 섣부른 ‘조기 등판’이 이런 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새누리당 내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사초를 폐기했다”며 국가정보원에 보관 중인 회의록 녹취 음원 공개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결국 이번 사태를 조기 종결할 수 있는 열쇠는 문 의원이 쥐고 있다. 문 의원으로서는 또 한 번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어야 할 중대 기로에 서게 됐다.


NLL 대화록 핵심은 ‘왜 안 넘겼나’ ‘왜 삭제했나’ 


지난 초여름 정국을 강타했던 2007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실종 논란이 가을에 접어들며 또 다른 국면을 맞고 있다. 결론이 날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민주당, 특히 ‘친노’ 세력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논란의 첫 번째 핵심은 왜 노무현 정부가 대화록을 국가기록원에 정상적으로 이관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검찰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는 2008년 초 퇴임 직전 모든 기록물을 국가기록원에 넘겼는데, 이때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은 넘어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과 여권은 노무현 정부가 대화록을 이관하지 않은 배경과 의도를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단순히 기록물에 대한 은폐를 시도한 것이라고 단정 짓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왜 국정원에는 대화록을 놔뒀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남기 때문이다. 후임 정권에 의해 기록이 열람되는 것은 국가기록원보다는 국정원 쪽이 훨씬 쉽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또 다른 쟁점은 검찰이 밝혀낸 대화록 초본의 실체다. 검찰은 국정원이 보관하고 있던 수정본과 다른 대화록 초본의 존재를 밝혀냈다. 그런데 “초본과 수정본 내용은 별 차이가 없다”면서도 “단, 의미 있는 차이는 있다”고 밝혀 묘한 여운을 남겼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대화록 초본을 열람하고 “내 의도와 다른 말이 들어 있다”며 초본 삭제를 지시했고, 이에 이지원 관리를 담당한 박 아무개씨가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의 지시를 받고 초본을 삭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여권은 이 부분에 대해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이 있어 삭제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야권에서는 “오·탈자를 고치는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이에 따라 향후 초본이 공개되더라도 여야 각자의 시각에 따라 또 다른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에 대한 논란이 계속될수록 야권에는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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