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창업가들의 무덤인가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3.10.08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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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생태계에서 먹이사슬, 또는 밸류체인의 선점자는 후발 경쟁자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독점적 지위 구축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생태계는 늘 새로운 도전자가 등장해서 싸움이 그치지 않기 마련이고, 이 과정에서 혁신과 변화가 일어난다.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는 생태계는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징후다. 우리나라 기업 생태계에서 새로운 도전자의 씨앗이 마르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최근 중견 기업들이 줄지어 위기를 맞고 있다. 강덕수 STX 회장과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이 코너에 몰렸고, 팬택의 박병엽 부회장이 사의를 표시하고 떠났다. 이들이 무너진 사연과 기업이 처한 환경은 각각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스스로 창업해서 기업을 키워가다 좌초했다는 점이다.

STX의 오너인 강덕수 회장은 쌍용양회 직원으로 출발해 회사를 재계 순위 12위권에 올려놓았다. 웅진그룹의 윤석금 회장 역시 책 외판원으로 출발해 재계 16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팬택 박병엽 부회장의 경우 샐러리맨 창업 신화의 종언이라고 불릴 만하다.

ⓒ 시사저널 전영기
1987년 맥슨전자 영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박병엽 전 부회장은 1991년 단돈 4000만원으로 무선호출기 제조업체 팬택을 만들었다. 팬택은 한때 세계 7위 휴대전화업체에 오를 만큼 승승장구했다. ‘삐삐 시대’부터 살아남은 유일한 비재벌 계열 휴대전화 제조업체이기도 하다. 그는 2006년 팬택이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워크아웃에 들어갈 때도 자신이 보유한 4000억원대 주식을 내놓고 백의종군하는 등 회사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최근 팬택이 스마트폰 시장에서 입지가 좁아들면서 자금난을 겪자 그는 올 초 퀄컴으로부터 2300만 달러를 유치했다. 지난 5월에는 삼성전자로부터 530억원의 투자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 결과 퀄컴이 2대 주주, 삼성전자가 4대 주주가 됐다. 이는 ‘승부사’ 박병엽의 모험이자 도박이었다. 하지만 박 전 부회장은 9월24일 실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짐을 쌌다.

5대 재벌가가 독점한 한국 기업 생태계

창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이 왜 줄지어 퇴장하는 것일까. 일단 기업 환경 변화가 컸다. 이한구 수원대 경제금융학과 교수는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기업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요즘 시작 단계에 있는 기업들에게 1980년대 이전보다 주변 환경이 가혹해졌다”고 분석했다. 과거에는 정부가 대기업 육성책을 통한 경제 성장을 추구했기에 상대적으로 기업하기가 좋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경제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대기업 규제가 강해지면서 똑같은 잣대가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대기업으로의 도약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지주회사 분석 전문가인 이훈 한국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저성장 기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높으면 기업이 성장할 기회가 많고, 때문에 GDP 성장률이 7%가 넘던 1990년대 이전에는 수많은 신흥 재벌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성장이 정체된 한국에서 기본적으로 사업 기회가 줄어든 탓에 그룹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인수·합병밖에 없다는 것이다.

웅진과 STX가 1990년대 이후 인수·합병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기업이다. 문제는 과도한 경영권 프리미엄 지급으로 본진이 휘청거리게 됐다는 점이다. 이훈 연구위원은 “웅진은 극동건설 인수로 망가지기 시작하다가 태양광 투자에서 카운터펀치를 맞았다. STX는 인수한 기업을 지렛대 삼아 더 큰 기업을 인수하는 전략(레버리지)을 폈는데 경기 사이클을 심하게 타는 업종 특성의 덫에 걸렸다”고 분석했다.

웅진과 STX 실패에 대해 또 다른 시각도 있다. 산업조직론 전문가인 이상승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진단이다. “1980년대 이전에는 수익성 좋은 계열사가 자금줄 노릇을 하는 재벌의 선단식 경영 구조가 통했다. 이를 통해 자본을 축적한 기존 재벌은 삼성이나 현대차처럼 글로벌 플레이어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글로벌 경쟁력이 뒤지거나 수익성에 문제가 있는 하위 재벌이나 신규 대기업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침몰한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창업 당대에 재벌에 오른 STX·웅진·팬택 창업자의 퇴장은 기업가 정신 실종, 한국 경제의 위기론으로 연결된다. 국내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글로벌화된 대기업이 고용 없는 성장 시대를 이끌어낼 뿐 실질적으로 새로운 먹거리나 내수 진작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기업 경영 정보를 제공하는 CEO스코어의 박주근 대표는 신규 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30대 재벌의 업종을 보면 부동산 개발이나 임대·물류·광고·전산 시스템 통합 회사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이런 부분들이 신규 기업의 시장 진입을 어렵게 하고 있다. 네이버처럼 완전히 새로운 업종이 아니라면 사실상 시장에 새로 진입하기가 불가능해졌다.” 박 대표는 이를 ‘사회의 개방성’과 연관 지었다. “미국만 해도 2000년대 이후 구글·페이스북 등 새로운 얼굴이 등장했다. 한국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재벌 리스트 상위권 순위에 거의 변동이 없다. 이는 우리 사회의 경직성이 강하고 기득권 카르텔이 심하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박 대표는 또 일본 사례를 들었다. 일본 20대 부호의 50% 이상이 창업자인 데 비해 우리는 20대 부호의 95%가 상속 재벌이란 것이다. 그는 “사회의 역동성은 개방성과 균등한 기회가 주어질 때 나온다”고 강조했다.

고용 없는 성장…빅5 재벌 시대의 딜레마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신흥 대기업의 퇴장은 한국에서 창업 당대에 재벌(대기업) 반열에 오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물론 재벌도 부침이 있다. 재벌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에 정착한 1970년대부터 수많은 기업이 부침을 거듭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재벌의 문은 완전히 닫히고 상위 5대 재벌과 2, 3세 상속을 거치면서 분화한 5대 재벌의 방계 기업들이 한국 대기업군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미국·일본의 20대 주식 부호를 비교해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나라는 창업자가 20위 안에 딱 한 명(김준일 락앤락 창업자) 턱걸이했지만 미국과 일본에선 절반 정도가 창업자였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맥킨지는 지난 4월 ‘한국 스타일을 넘어서: 신성장 공식’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진단했다. 이 보고서에서 맥킨지는 대기업 수출 주도 성장 전략이 중소기업과 서비스 산업으로 파급되지 못했고, 이는 결국 중산층의 가계 소득 감소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95~2010년 국내 제조 부문 대기업 생산성은 9.3% 증가했다. 제조업 부문 대기업의 해외 생산 비중은 2005년 6.7%에서 2010년 16.7%로 높아졌다. 같은 기간 국내 대기업이 국내 고용 창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에서 12%로 뚝 떨어졌다. 국내외에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한 대기업의 비중은 갈수록 커지는 반면, 국내 기업 생태계에서 먹이를 나누는 역할은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는 뜻이다.

왼쪽부터 강덕수 STX그룹 회장,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박병엽 전 팬택 부회장, 김준일 락앤락 회장. ⓒ 시사저널 최준필·시사저널 포토·락앤락 제공
성장 위해선 새로운 ‘플레이어’ 쏟아져야

보고서에 따르면 300만개의 한국 기업 중 중소기업 비중이 99.9%에 달한다. 그러나 이 중 96%가 종업원 50명 미만의 영세 업체다. 이들이 국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8%에 달한다. 즉 고임금·양질의 대기업 일자리는 제한적이고, 저임금에 고용 불안정의 동의어처럼 쓰이는 영세기업의 일자리만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글로벌화에 성공한 대기업의 성장이 국내 내수 경제 부흥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고용 없는 성장’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이훈 연구위원은 “저성장 시대에 성장하는 기업을 만들려면 결국 벤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이 주도권을 쥐고 성장하면서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는 기업이 여럿 생겨나야 한다는 얘기다. 기존에 없던 인터넷 업종에서 기회를 만들어낸 네이버의 이해진 의장이나 넥슨의 김정주 회장이 바로 그런 기회를 잡은 사람들이다. 덧붙여 그는 “내수 기업도 성장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전했다. 유통이나 식음료업체들이 중국·러시아·동남아 진출을 타진하는 것도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 그래서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일정 부분 성공한 오리온은 식음료업계의 황제주로 군림하고 있고, 롯데제과가 동남아 진출을 꾀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상승 교수는 “방법이 정당하다면 대기업의 경제 비중이 커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산업화 시대에 정부가 감독 노릇을 했다면 지금은 심판의 역할을 해야 한다. 시장 지배력을 남용해 후발 기업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는지 여부를 공정거래법으로 잘 감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닫힌 생태계는 경쟁력을 잃기 때문이다. 그는 “정부가 신규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해 내놓은 ‘창조경제 해법’이 실질적으로 젊은이들의 벤처 도전을 도와주고 시장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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