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의 전설, 벤처의 신화 되다
  • 김중태│IT문화원 원장 ()
  • 승인 2013.10.0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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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포항공대 해킹 사건으로 구속된 노정석씨, 청년 기업가 ‘멘토’ 활동

1990년대 초반만 해도 ‘해커’라는 용어는 무척 생소한 말이었다. 이것이 일반화된 계기로 1996년 카이스트와 포항공대(현 포스텍) 간 ‘해킹 사건’이 꼽힌다. 1990년대 초반부터 라이벌 관계였던 카이스트의 해킹 동아리 ‘쿠스(KUS; Kaist Unix Students)’와 포항공대의 동아리 ‘플러스(PLUS)’가 서로의 학교 전산망을 해킹하며 대립한 것이다.

1991년 카이스트에 쿠스가 등장하고 이듬해 포항공대에 플러스가 등장하면서 보이지 않는 경쟁이 시작됐다. 본격적인 전쟁은 1996년에 벌어졌다. 1996년 3월 카이스트 내 전산 시스템이 침투당하자 쿠스의 회장인 노정석씨(당시 20세, 산업경영학과 3년)는 이를 경쟁 동아리인 포항공대 플러스의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두 학교의 해킹 동아리는 학교의 자존심이자 영웅이나 다름없었기에 쿠스의 회장 노정석은 포항공대에 대한 보복을 결심한다.

카이스트와 포항공대의 해킹 라이벌 전쟁

운명의 날은 1996년 4월5일로 정해졌다. 노정석과 두 명의 동료는 포항공대의 전산망에 침입해 학과 시스템의 전산 자료를 삭제하고 비밀번호를 변경했다. 사건이 발견된 것은 해킹이 이루어진 다음 날인 1996년 4월6일. 포항공대 전기전자공학과 시스템 관리자인 이종석씨는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자 당황한다. 더 놀라운 것은 해킹 수법이었다. 이전까지의 해킹이 단순 침입 또는 파일 빼내기 정도에 불과했던 것과 달리 이번 사건은 모든 전산 자료를 삭제해 학사 행정이 마비될 정도로 심각했다. 전자과 외에 물리학과 등에서 7개 시스템이 파괴됐다. 피해도 피해지만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학교는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사건이 알려진 것은 1996년 4월12일 익명의 제보가 검찰의 정보범죄수사센터에 접수되면서부터다. 검찰 수사팀은 카이스트 내의 쿠스와 또 다른 해킹 동아리인 스팍스의 서버 시스템에서 포항공대 시스템에 침투한 흔적을 포착했다. 카이스트가 위치해 있는 대전으로 내려간 검찰은 해킹 동아리 회원들을 상대로 1차 조사했지만 학생들은 완강하게 부인했다. 당시 수사팀을 지휘했던 한봉조 검사는 양쪽의 명예를 생각해 수색 영장 없이 학교로 직접 방문해 사건을 수사했다. 학생들 사이의 해킹을 범죄로 확대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노정석을 비롯한 두 동아리 회원은 혐의를 부인했다. 수사팀은 이들의 과민 반응에 심증은 가졌지만 물증이 없었다.

수사팀이 카이스트 전산 시스템의 로그를 확인했지만 4월5일에 아무런 사용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수사팀은 당황했으나 결국 해커들이 로그파일을 삭제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4월29일 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찾아갔다. 한봉조 검사가 다시 설득에 들어갔으나 노정석은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했다. 이를테면 ‘잡을 능력 있으면 잡아봐라’라는 식이었다. 이로 인해 이 사건은 조용히 해결하려던 검찰의 관용 범위를 벗어나고 말았다. 수사팀은 노정석 외에 포항공대 해킹에 협조한 스팍스 회원까지 포함해 총 4명을 체포한 다음 이들의 알리바이를 조사했다. 결국 학생들이 알리바이를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이들은 해킹에 대한 물적 증거를 제시하라면서 해킹 사실은 계속 부인했다.

한봉조 검사는 엄청나게 화가 났으나 물증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수사팀이 철야에 들어가 다시 로그를 분석하기 시작한 지 3일이 지난 5월2일 새벽. 마침내 4월5일 해킹 시간대에 스팍스 소속의 김세환씨가 시스템을 사용한 흔적을 찾아냈다. 미처 지워버리지 못한 단 한 줄의 로그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는 일을 해낸 셈이었다. 단 한 줄의 로그 기록이라는 물증 앞에서 결국 노정석은 해킹을 시인하고 검찰은 그를 구속했다. 쿠스와 플러스는 나중에 화해를 하면서 전쟁을 중단했지만, 이 사건으로 쿠스가 해체되고 노정석은 카이스트 사상 초유의 재학생 구속 사태라는 후유증을 남겼다.

해킹 사건의 주역으로 유치장 신세를 진 노정석은 영재들이 간다는 광주의 한 과학고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할 정도로 수재였다. 그러나 컴퓨터동아리에 들어간 후 해킹 기술 연마에 몰두하면서 학교에서는 두 차례나 학사경고를 받을 정도로 성적이 떨어졌다. 하지만 해킹 사건으로 인해 그는 3번이나 회사를 세워 성공과 실패를 넘나든 벤처기업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지난 5월1일 IT벤처 컨퍼런스인 ‘비론치(beLAUNCH)2013’행사에 연사로 참석한 노정석 아블라컴퍼니 전 대표. ⓒ beLAUNCH2013 제공
과학고 2년 만에 졸업한 영재

해킹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97년 노정석은 보안업체 ‘인젠’ 창업에 참여해 이번에는 해커를 잡는 일에 나섰다. 인젠이 성공하면서 ‘문제아’였던 그는 벤처기업가로 변신했다. 2002년에는 보안회사 ‘젠터스’ 또한 창업했으나 실패했고, SK텔레콤에서 평범한 직장인 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을 갈망하던 그는 2005년 ‘태터앤컴퍼니’를 창업한다. 이 회사는 블로그 도구인 ‘태터툴스’와 ‘티스토리’를 개발했다. 태터앤컴퍼니는 2008년 한국 최초이자 아시아 기업으로는 두 번째로 구글에 매각되면서 또 하나의 전설이 됐다.

태터앤컴퍼니가 구글에 팔리면서 노정석은 구글코리아 프로덕트 매니저가 됐다. IT업계 종사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2년 뒤인 2010년 다시 한 번 창업을 결심한다. 그는 구글에 있으면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2010년 아블라컴퍼니를 설립했다.

현재 노정석은 벤처들의 ‘멘토’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국내 최초의 벤처 인큐베이팅 기업인 ‘패스트트랙아시아’ 창립에 참여해 벤처 전도사가 됐다. 전설적인 해커에서 이제는 전설적인 벤처 전도사로 변신한 노정석은 자신의 경험 나누기를 통해 한국에 수많은 벤처가 더 튼튼하게 뿌리내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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