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이기는 놈이 멋진 놈?
  • 하재근│문화평론가 ()
  • 승인 2013.10.0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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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 이정재 신드롬에서 엿보는 선악 구도의 변화

최근 800만 관객을 돌파한 화제작 <관상>의 최대 수혜자는 단연 이정재다. 이 영화는 송강호·조정석·김혜수·이종석·백윤식 등 스타급 배우들이 대거 참가한 작품인데, 결과는 이정재 홀로 우뚝 서는 것으로 끝났다. 영화 덕분에 이정재는 데뷔 이래 연기력과 관련해 최대의 찬사를 받고 있다. 이정재의 분량이 늘어난 <관상> 확장판 개봉도 추진된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이정재는 <관상>에서 완전한 악역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시청자(또는 관객)는 악역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남·미녀 스타들은 언제나 선한 역할을 맡으려 애썼고, 선함이 바로 주인공의 대표적인 특징이었다.

영화 에서 수양대군을 연기한 이정재(왼쪽). ⓒ 쇼박스㈜미디어플렉스
<관상>에서 이정재가 연기한 수양대군은 시대착오적일 정도로 어이없이 악한 캐릭터다. 과거엔 완전한 선인인 주인공이 완전한 악인을 징벌하는 구도가 많았지만 최근엔 그렇지 않다. 요즘 진지한 영화에선 악인의 성격을 옛날보다 복잡하게 묘사한다. 사극에선 전통적으로 익숙한 인물 표현을 정반대로 뒤집거나 조금이라도 비틀어보려는 시도가 대세를 이룬다.

놀랍게도 <관상>에서 수양대군은 조카의 왕위를 노리는 파렴치한 수준으로, 즉 1980년대식(쌍팔년도식) 악인으로 묘사됐다. 번듯한 왕족인데도 불량배처럼 건들거리며 걷고, 얼굴엔 흉터가 있고, 품위와 절제라곤 찾아볼 수 없으며, 왕이 되려는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신의를 저버리는 비열함이 배어 있고, 대중이 보는 앞에서 직접 사람을 죽일 정도로 무도한 인물이다.

악인은 멋있게 보이고 선인은 무력해 보이거나 ‘찌질이’

이렇게까지 수양대군을 노골적 악인으로 묘사한 작품은 지금까지 없었다. 너무나 단순한 악이어서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악인 묘사에 비견될 정도다. 그런데 그런 악인을 관객이 좋아하고 있다. 젊은 네티즌들이 이정재를 다시 봤다며 뜨거운 찬사를 쏟아낸다. <관상>을 통틀어 수양대군이 가장 멋있단다. 사실 연기력으로 따지면 송강호나 백윤식이 국내 최고 수준일 텐데, 이정재의 연기가 호평받고 있다. 멋있기 때문이다. 젊은 관객들이 무도한 악인을 멋있게 느끼는 시대인 것이다.

<관상>에서 이정재의 수양대군과 다른 배역들을 가르는 차이가 딱 하나 있다. 송강호·백윤식·조정석·이종석 등은 모두 패자다. 오로지 이정재만 승자의 역할을 맡았다. 패자들이 장렬하게 죽는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힘도 한번 쓰지 못한 상태에서 어이없이 밀려난다. 오로지 이정재만이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그것을 네티즌은 ‘멋있다’고 인식했다. 영화 속에서 수양대군 다음으로 강한 승자는 한명회인데, 그에 대해서도 찬사가 쏟아진다. <관상>은 한명회에 대한 묘사도 1차원적이어서, 정략적 이익을 위해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잔인무도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비난을 많이 받은 배우는 이종석이다. 이종석은 지금까지 <시크릿가든> <하이킥>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등에서 승승장구한 배우인데, <관상>에서 처음으로 쓴소리를 듣고 있다. 이종석이 맡은 캐릭터는 패자 중에서도 가장 무력한 ‘찌질이’ 캐릭터다. 아무런 힘도 없이 비치적비치적거리며, 대의명분에 입각한 바른말만 하다가 힘없이 쓰러지고 마는 인물로 수양대군의 대척점이라 할 만하다. 패션이 돋보이는 수양대군에 비해 옷도 볼품없이 입는다. 즉, 가장 강하고 멋진 승자 악인과 가장 약하고 비루한 패자 선인에 대해 대중의 호오가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드라마 <하얀거탑> 때부터다. 당시 매사에 옳은 말만 하는, 하지만 그것을 실현시킬 의지도 힘도 없는 선인 최도영은 시청자의 얄미움을 한 몸에 받았다. 반대로 병원 과장이 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장준혁은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장준혁은 승자가 되기 위해 기존 승자에게 도전했고, 결국 운이 다해 패하긴 했지만 기존 승자를 누를 만한 실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겐 수많은 후배 의사 위에 군림할 정도의 권력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에겐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있었다. 반면에 선인 최도영은 말만 착했지 악에 대한 투쟁 의지도, 장준혁 수준의 실력도, 후배들을 움직일 권력도 없었다.

선과 악의 전도 현상은 나중에 <선덕여왕>으로 이어졌다. 선인 덕만이나 김유신보다 악인 미실이 더 큰 사랑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의 캐릭터 차이도 <하얀거탑> 구도와 비슷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악인 조연이 선인 주연 이상으로 조명받는 시대가 왔고, 요즘엔 주인공과 조연들이 모두 악인이거나 선악을 구분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도 이전 작품들은 악인을 묘사할 때 복합적인 성격으로 그려서 시청자가 그에게 몰입할 이유를 제시했다. 이번 <관상>의 수양대군은 그저 순수한 악인으로 그려졌는데도 관객이 열광한다는 점에서 특이한 현상이다. 강하고, 잘생기고, 패션도 뛰어나면 선악 윤리는 상관없는 셈이다. 1980년대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MBC 제공
약한 자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현상 반영

2000년대 이후 입시 교육이 강화됐다. 입시 교육은 무조건 이기는 게 최고라는 세뇌 교육이다. 학교에서 그런 세뇌가 이루어지는 사이에 사회에선 무한 생존 경쟁이 펼쳐졌다. 루저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극에 달했고, 승자에 대한 선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이젠 ‘선인이 승자가 되는 게 아니라, 승자가 곧 선인’이라고 받아들여진다. 돈과 권력을 향한 욕망을 표현하는 것도 당연해졌다. 그래서 <청담동 앨리스>에선 문근영이 돈 많은 남자를 찾아다니며 꽃뱀을 자처했다. 시청자는 물론 열광했다.

돈 많고 멋진 권력자, 승자에 대한 열망이 커진 만큼 돈 없고 비루한 약자, 패자에 대한 혐오도 커졌다. 10대 아이들이 가장 혐오하는 건 ‘악인’이 아닌 ‘찌질이’다. 바로 <관상>의 이종석, <하얀거탑>의 최도영(이선균) 같은 인물이 여기에 속한다. 악인이라도 강하고 멋지면 동경의 대상이고, 선인이라도 힘이 없으면 배척당한다. ‘일베’를 중심으로 퍼져가는 젊은 층의 혐오 댓글은 호남, 여성, 혼혈 등 약자를 향한다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은 자신이 강자라는 걸 과시하기 위해 폭행 가해 동영상을 찍는다. 피해자는 혹시 약한 찌질이로 낙인찍힐까 봐 피해 사실을 숨긴다.

그런 시대상의 변화가 대중문화 캐릭터의 인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스캔들>에서 재벌 회장은 “사람은 말이야 강한 거에 끌리는 법이거든. 욕은 해도 머리를 숙이지”라고 말한다. <황금의 제국>에서 회장은 “착한 사람이 되지 마라. 두려운 사람이 돼라”고 했다. 두려운 강자가 바로 이정재가 연기한 수양대군이다. 젊은 사람들이 그런 강자에 열광하는 사회. 이것은 두려운 강자에 대한 복종으로 이어져 정치적 퇴행을 부를 염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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