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만사’
  • 김재태 편집위원 ()
  • 승인 2013.10.16 11:3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년 전에 개봉됐던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한 편의 가슴 뭉클한 ‘그레이 로맨스’ 영화입니다. 우유 배달을 하는 할아버지와 폐지를 줍는 할머니 사이의 러브스토리가 애틋하고 잔잔하게 그려집니다. 이 영화는 그동안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노년의 사랑뿐만 아니라 어렵게 살아가는 어르신들의 쓸쓸하고 남루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뜨거운 눈길을 모았습니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실제로 종이 박스 같은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할머니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삶의 무게에 가없이 눌린 그분들의 좁은 어깨가 금세라도 부서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입니다. 1kg에 100원도 채 안 되는 폐지를 줍기 위해 그들은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골목길을 뒤지고 또 뒤집니다. 그렇게 모아서 팔아봐야 하루에 단돈 몇천 원. 요즘 들어서는 그처럼 고단한 노년의 모습이 더 많이 더 자주 눈에 띕니다. 길에서 만난 한 폐지 줍는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이 일도 갈수록 경쟁이 심해져서 하루에 5천원을 벌기가 빠듯하다고 합니다.

이분들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힐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게 단순히 남의 얘기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 1위인 이 나라에선 지금도 어느 누군가에게 노년의 생계는 애처로운 ‘실존의 전투’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폭발적 논란을 부른 기초연금 문제가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65세 이상 모든 노년층에게 지급하기로 했던 기초연금을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과 달리 소득 하위 70%에게만 주기로 하고, 그 기준을 국민연금과 연계하는 방안이 발표되면서 온 나라가 한순간에 연금 논쟁에 빠져들었습니다. 정권 실세로 여겨졌던 주무 장관이 의견 충돌로 사퇴해 파문이 이는가 하면 국민연금 장기 가입자들에 대한 역차별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방송에서도 잇달아 이 문제를 놓고 공개 토론을 벌였지만 말싸움만 반복될 뿐 뾰족한 묘책은 찾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기초연금 문제는 이제 단순한 돈의 문제를 넘어 약속의 문제로 비화되어 있습니다. 야권에선 당장 공약 파기라는 비판이 거세게 터져 나옵니다. 게다가 기초연금이 국민연금과 연계되면서 수혜층인 노인들의 문제를 넘어 전 국민의 현안으로 판이 커져버렸습니다. 물론 재정 부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정부의 고충은 일정 정도 이해될 만합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계획을 공약으로 내놓아 국민들에게 ‘희망 고문’을 주었던 점은 비난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장 나쁜 것은 요령을 피우는 일입니다. 본질을 놓아둔 채 껍데기만 고친다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초연금 논란에서 본질은 확실한 재원을 마련해 약속

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증세든 뭐든 모든 논의를 열어놓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공약 설계에서든 이행 과정에서든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면 과감히 들춰내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기초연금은 말 그대로 복지의 ‘기초’입니다. 기초부터 단단히 서지 않으면 복지의 뼈대 자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기초만사(基礎萬事)’입니다. 나라에 세금이 부족하다면 자신부터 나서서 ‘특별 기부’ 형식으로라도 세금을 더 내겠다고 했던 유럽 어느 나라 대기업 CEO의 말이 자꾸 귀에 곱씹혀지는 날입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