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죽어가던 동양시멘트 살렸다”
  • 김지영 기자 (young@sisapress.com)
  • 승인 2013.10.1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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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기업 사채 동결 긴급명령으로 회생시켜

갈수록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동양그룹. 유동성 위기가 극에 달했던 지난 9월, 동양그룹은 한 뿌리에서 자라다 2001년 갈라진 오리온그룹에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오리온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창업주 이양구 회장의 두 사위,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부인 이혜경 동양그룹 부회장)과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부인 이화경 오리온그룹 부회장)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셈이다.

현재도 오리온그룹 홈페이지의 회사 소개란에는 여전히 이양구 회장의 어록과 기업 이념이 나온다. 그런데 오리온 연혁을 보면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1971년 9월 동양시멘트 법정관리 신청으로 부도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위기를 이겨내고…’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동양그룹과 동양시멘트 홈페이지에는 ‘1957년 동양세멘트공업㈜이 설립됐으며, 1975년 4차 증설 공사 완공으로 연간 생산 능력이 300만톤으로 증가했다’는 ‘화려한 역사’만 등장한다.

1975년 10월27일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이양구 회장(앞줄 오른쪽)과 삼척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1971년 동양시멘트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해 9월10일 동양시멘트는 서울지방법원에 회사 정리(법정관리) 신청서를 제출했다. 은행 빚 30억원, 사채 25억원을 갚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결정이어서 그 충격은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언론은 ‘박정희 정부의 긴축정책과 시멘트 경쟁 업체의 난립 등으로 회사 정리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양구 회장이 불성실한 경영 행태를 보였다”며 “동양시멘트가 그 정도 부채도 갚지 못할 만큼 어렵냐”는 비판도 있었다. 한마디로 이 회장이 엄살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공분을 샀던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동양시멘트는 회사 정리 신청서 제출을 앞두고 100여 개 대리점에 시멘트 현물은 주지 않은 채 ‘덤핑 가격으로 시멘트를 공급하겠다’며 예매 전표를 떠안겼다. 시멘트를 주지 않은 채 돈부터 받은 것이다. 하지만 회사 정리 신청서가 제출되면서 시멘트 공급이 중단됐다. 대리점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이 회장은 행방을 감췄다. 이 대목에서 부실 채권을 투자자들에게 떠안겨 큰 피해를 입힌 오늘의 동양 사태가 오버랩된다. 지금의 사태는 ‘어게인 1971년’인 셈이다.

당시 비난 여론이 들끓자 이 회장은 100여 일 만에 회사 정리 신청을 철회했다. “동양그룹 방계 회사를 매각해 부채를 갚겠다”며 백기를 든 것이다.

“이양구 회장, ‘참회의 글’ 일간지 연재”

이 회장 집안과 가까웠던 재계의 한 인사는 10월4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당시 비난 여론이 식지 않자 이 회장은 (회사 정리 신청에 대해) 한 일간지에 ‘참회의 글’을 연재하며 사죄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당시 동양시멘트가 기사회생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덕분이었다”고 덧붙였다. 이 인사가 언급한 ‘박 대통령 덕분’이란 1972년 8월3일 ‘기업의 모든 사채를 동결한다’는 ‘경제 성장과 안정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가리킨다. 그 사채 동결 대상 기업에 동양시멘트가 포함됐던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이 회장 개인의 천운인지, 권력이 구상한 프로젝트에 따른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검사 출신인 현재현 회장은 1976년 이 회장의 맏딸 이혜경씨와 결혼했고 이듬해 동양시멘트 이사로 들어갔다. 8년 후인 1983년 1월 동양시멘트 사장에 올랐다. 그의 나이 불과 34세였다. 30년이 흐른 지금 재계에서는 “동양그룹이 다른 대기업처럼 신성장 동력을 찾지 못한 채 장치 산업(시멘트)에 주력했던 것이 오늘의 몰락을 불러왔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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