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얼굴에 먹칠해도 유분수지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13.10.30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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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영사들 잦은 스캔들…임명 기준 허술

지난해 미국 정가를 뜨겁게 달군 ‘CIA(중앙정보국) 스캔들’의 주인공인 질 켈리는 한국의 명예영사였다. 플로리다 주의 사교계 여성인 켈리는 전기 작가인 폴라 브로드웰과의 불륜으로 낙마한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전 CIA 국장의 친구로 스캔들을 최초로 공론화한 인물이다. 그는 또 존 앨런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과 부적절한 내용의 이메일을 주고받은 사실이 드러나 파문을 일으켰다.

문제는 켈리가 평소 자신을 ‘대사’라고 소개하고 다녔다는 점이다. 승용차 번호판에 ‘명예영사’라고 표기하는가 하면, 기자들에게 ‘외교적 보호권’을 주장하는 등 한국의 명예영사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내세웠다. 뉴욕의 한 사업가에게 접근해 한국 대통령과 석탄가스화 프로젝트를 직접 주선하겠다며 2%의 커미션을 요구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한국 정부가 임명한 명예영사직을 이용해 돈벌이까지 나섰던 셈이다.

ⓒ 일러스트 김세중
그런 인물이 어떻게 한국의 명예영사로 임명될 수 있었을까. ‘명예영사의 임명 및 직무 범위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명예영사는 ‘주재할 지역에 5년 이상 거주한 사람, 명예영사로서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두 가지 요건만 갖추면 된다. 재외 공관의 수장이 추천하는 사람 중에서 외교부장관이 임명하는데 임기는 5년이며 연임도 가능하다. 현재 전 세계에 143명의 명예영사가 위촉돼 활동 중이다.

‘CIA 스캔들’ 주인공, 한국 명예영사 과시

켈리를 명예영사로 추천한 인사는 한덕수 한국무역협회 회장이었다. 한 회장이 주미 대사 시절 FTA(자유무역협정) 비준 지원차 플로리다 주 탬파에 방문했을 때 켈리가 먼저 한미 간 경제 교류에 협력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한다. 이에 한 회장이 애틀랜타 총영사관에 캘리를 명예영사로 위촉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고, 이후 현지 공관의 건의에 따라 명예영사로 위촉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미국 국무부가 플로리다 주에 이미 한국의 명예총영사가 있는데 또 명예영사를 위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플로리다 주에는 1982년부터 버턴 랜디라는 변호사가 명예총영사로 활동하고 있다. 북미 지역의 명예영사 19명 가운데 최고 연장자이면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인사다. 같은 주에 명예영사를 두 명이나 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북미 지역 명예영사를 직업별로 살펴보면 변호사가 8명으로 가장 많다. 그 외에 하원의원과 시장 등 정치권 인사, 대학 총장과 이사 등 교육계 인사, 건설사 사장과 은행 수석부사장 등 경제계 인사가 골고루 포함돼 있다. 중미 지역의 경우 17개 국가에서 20명의 명예영사가 활동 중이다. 멕시코가 3명으로 가장 많고 온두라스에도 2명이 있다. 남미 지역에는 5개국에 7명이 활동하고 있는데, 볼리비아와 브라질에 각각 2명씩 주재 중이다.

현재 55명의 명예영사가 활동 중인 유럽에서도 말썽이 일어난 적이 있다. 2009년 그리스의 한국 명예영사가 자신이 소유한 방송사에 축구 경기 방송권을 낮은 가격에 팔아 횡령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2000년부터 명예영사로 활동한 그는 외교부에 의해 해임됐다. 동남아에는 태국에 2명, 필리핀에 1명의 명예영사가 있다. 서남아시아와 태평양 섬에는 14명의 명예영사가 있는데, 솔로몬 제도와 비누아투의 경우 교포가 명예영사를 맡고 있다. 일본에도 2명의 명예영사가 있다. 그중 한 명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 도공의 후예인 도예가 심수관씨다.

1년에 3000달러 미만 보조금 지급

외교 관계가 다른 곳에 비해 느슨한 국가일수록 명예영사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21명의 명예영사가 활동 중인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표적이다. 니제르 명예영사는 현지 공영방송의 한국 드라마 방영 문제를 협의하는가 하면, 라이베리아 명예영사는 이곳에서 한국의 한 선박이 불법 조업 사건에 휘말렸을 때 변호사를 알선해주는 등 행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말리의 수도인 바마코 명예총영사의 경우 지난해 3월 말리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현지에 거주 중인 한국인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스와질랜드 명예총영사는 국왕 주치의를 맡고 있는 교포 민병준 박사다.

명예영사는 말 그대로 명예직이다. 직무 수행에 필요한 경비는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다만 1년에 3000달러 미만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유럽의 경우 1035달러, 북미 2500달러, 아시아 1300~1500달러, 일본 200만원 정도가 지급된다. 명예직이라고 해도 한국의 대외적인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하지만 선발 기준이나 평가 제도가 역할에 비해 너무 허술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정청래 민주당 의원은 “미국 언론들에 따르면 질 켈리는 한 은행에만 220만 달러의 빚이 있는 상태였는데도 외교부는 현행 규정상 몇 개 없는 조건인 경제적 능력도 심사하지 않고 명예영사로 임명했다”며 “외교부가 자격을 강화하고 제대로 된 심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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